요즘에 남자는 뭐니뭐니해도 능력이 있어야 된다. 그 “능력”중에서도 아무래도 현대사회에서 제일 쳐주는 것은 경제적 능력이 아닐까 한다. 사실 아무리 명문대 나와 학벌이 좋고 외모가 연예인 닮아 출중하며, 목소리가 울리는 천둥같이 우람하고 또 미끄러져 내려가는 시냇물처럼 감미로우며, 또한 집안이 제 아무리 좋다한들 그게 결국엔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남자가 경제적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돈을 집에 많이 못벌어 오면 집에서 소박맞기 딱 쉽상인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 보여진다. 부당 부인들한테로만 당당한 한 가장으로서의 대접 못받을 뿐더러,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은 예쁜 토끼 새끼들 같이 소중한 자식들한데도 아버지 대접 제대로 못받는게 요즘 냉정한 가정경제100의 제일 첫번째 철칙이 아닐까 한다.
결혼생활에서뿐만 아니라 혼사를 앞둔 현 총각들한테도 이 황금만능주의 캐티탈리스트주의 경제관이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니,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자들은 제 아무리 잘 났어도 인기가 없고, 반면에 남들이 보기에 지질이 못생겼다 하더래도 돈만 많고 재정적 능력있어 키 서너개 별 문제없이 장만할 정도라면 천하일색의 미녀가 당장 시집오려 할 것이다. 돈이 모든 생활의 첫 척도이며 한 인간을 저울질 하는 넘버원 기준인 것이 요즘 한국의 현실이다.
지금으로부터 좀 거슬러 올라가서 조선시대를 보자; 그때는 혈통, 문벌, 출신성분을 제일 쳐 주었다. 그런데 말이다, 제 아무리 떵떵거리고 큰 소리 치며 살던 누대에 걸쳐 내려오는 엘리트 양반신분이라 하더래도, 현대시각으로 보자면 보편적으로 벼슬 못한 선비는 분명 무능력한 사람일 것임에 틀림없으니, 왜냐면 말단직 벼슬살이라도 해야 녹봉이 나와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현실적으로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벼슬살이를 몇대에 걸쳐서 못하면 양반행세 하기가 대를 거듭할수록 힘들어 졌으며, 가세는 자꾸 기울어져 가서 말만 허물좋은 양반이었지 실상은 양반신세에서 소히 말하는 잔반, 평민수준으로 전락하기 일쑤였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아주신씨 할머니의 남편되시는 나의 10대조부 통덕랑 이석관은 통덕공 이효제의 일곱 아드님들중 장남이었는데, 추정하건데 아마도 공의 선조들이 그리하였듯이, 집안생활(살림)이나 가사돌보는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후손(들)이 기록한 문집을 보노라면 그저 문학에 미쳐있었다고 하는 분이시다. 통덕랑은 당당한 정5품의 품계이나 실직은 당연히 아니었고, 그저 간판만 화려한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는데, 이석관 통덕공은 이 글 초반에 내가 언급한 소히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양반이었다고 이 불손한 10대손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에 비추어 보면 아마도 이석관 할아버지는 집안에서는 혹 인정을 못받은 무능력한 가장이었을지는 몰라도, 집밖에서는 향토 사족사회에서 널리 존경받고 인정받았던 양반중의 양반, 한 인격자로 평가 받으셨던 것 같다. 통덕랑 직책을 받은 것 뿐 아니라, "문학사장" 자리까지 지내셨던 분이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고, 물질이나 돈벌이에 전혀 무관심하여 농상공업을 천시 여기던 풍토가 양반사회에 만연했으니, 그것이 제대로 된 양반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었다. 조선중후기 200년에 걸쳐 재지사족이었던 나의 조상들은 이렇듯 가정 경제살리기는 나 몰라라 하고 그저 “문학”과 학행수양 및 조상섬기는데 열중하였던 전형적인 당시의 선비들이었던 것이다.
통덕공 이석관 할아버지의 부인되시는 공인 아주신씨 할머니의 가계도를 다시 한 번 더 살펴보자면, 퇴계 문인이었던 회당 (悔堂) 신원록 (申元祿) 이 고조부가 되었으며, 신흘 (申仡) 이 증조부, 문과장원을 거쳐 홍문관 수찬, 지제교를 지내고, 승정원 도승지에 증직되었던 신달도 (申達道) 가 조부였으며, 친정 아버지 신규 (申圭) 는 문과를 거쳐 예조 좌랑에 올랐으나 공인 할머니께서 어린 나이일때 세상을 뜨시었다. 외가로는 문과장원급제를 거쳐 형조좌랑을 지낸 권득경 (權得慶) 이 외증조부가 되었고, 통덕랑 (通德郞) 안동인 (安東人) 권향 (權晑) 이 외조부가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