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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76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부활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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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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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t9kSJu2mig&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4&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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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이제는 내가 행해야할 기적>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복음 선포 사업에 매진하시던 공생활 시절,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목숨까지 바쳐가며 말씀을 선포하던 초대교회 시대 당시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표징들, 기적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귀를 쫒아낸다든지, 죽어가던 병자들을 치유시킨다든지, 독을 마셔도 쌩쌩하다든지 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술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어와 관련된 기적에서 참 부러웠습니다. 수십 년간 죽도록 공부해왔지만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 전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술술 딴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표징의 강도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사도행전 28장 3절에 보면 바오로 사도가 탄 배가 난파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한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섬은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위치한 몰타라는 섬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는데다 날씨까지 추워 불을 피우게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는 땔감 한 다발을 모아 불속에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오로의 손에 달라붙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 사람은 이제 끝장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바오로 사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독사를 손에서 떼어내어 타는 불속으로 떨어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몸이 곧 부어오르거나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계속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는 초대교회 시절 부지기수였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공생활 기간, 초대교회 시대는 ‘기적의 시대’ ‘표징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권능을 만방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적의 원동력,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명확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그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표징, 확신 없는 기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사라진다, 우리 인간은 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그 숱한 표징과 기적, 치유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징과 기적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이어져왔습니다.
다만 믿음이 형편없이 약해진 시대,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 탁해져서 그러한 기적과 표징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믿음, 완고한 불신으로 인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 우리는 사랑의 기적을 펼쳐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 작은 선행, 내 작은 헌신, 내 작은 봉헌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기적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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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요셉 신부님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youtu.be/Alt28VWaswY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뒤 그 병사는 홀홀 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신 ‘복음’은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셨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렇게 복음을 선포한 인물입니다. 그의 집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또한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승천 이후 유다인들의 공격 대상 1호 가정이 그 집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기 민족으로부터, 또 이방 민족으로부터 미움받아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도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보필하며 복음서까지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복음은 세상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무슨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성당 나오면 가정이 모두 평안하고 남편이나 자녀도 하는 일이 잘 될 거야!”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요? 남편과 자녀, 가정이 풍비박산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은 이보다 더 큰 무엇이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잃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무엇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 찾을 힘이 생긴다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집은 1억짜리이고 찾고 있는 보석은 10억짜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복음은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2013년 TV프로, SBS 힐링캠프에서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 씨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얼굴과 온몸이 성치 못함에도 “지금이 행복해서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이지선 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밝은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의 자세입니다. 복음을 지녔다면 절망이 그 사람을 짓누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그렇게 쉽게 자신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잉태했다면 그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이지선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참으로 두려운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지선 씨는 그 울퉁불퉁한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고, 짧아진 손을 들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연예인과 자신이 10가지나 닮은 것이 있다고 하며,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매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지선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 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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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20 :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게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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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카이사리아에 있는 회당 앞에서 이교도들의 제사가 행하여지자, 이에 분노한 유다 최고 의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교도의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저항에 잔인하게 대응합니다. 성난 유다 군중이 안토니아 요새를 습격하였고, 로마군은 마침내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로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합니다.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결별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고, 로마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로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합니다. 마르코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온 베드로를 만나 그의 마지막 생애에 아들로서, 시종이며 통역관으로 함께하였습니다. 또한 사촌 바르나바의 소개로 함께 복음 선포 여행을 하였던 바오로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해 주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글로 남긴 복음사가가 마르코입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전한 교회의 첫 복음서가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마르 8,29; 15,39 참조)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으로 복음서의 제목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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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택면 예로니모 신부님]
키프로스 태생인 마르코 복음 사가는 바르나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복음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 끝까지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선포할 것입니다.
흔히 마르코 복음서는 광야에서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으로 상징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의 적대자인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라는 말씀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맹수의 울부짖음은 안전하게 우리 안에 쉬고 있는 양떼를 놀라게 하고 그 서슬에 놀란 양떼들이 우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면 오히려 맹수의 먹이가 되고 말겠지요.
세상의 요란한 소음이 교회 안에 안전하게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놀라게 하여 교회라는 울타리를 뛰쳐나가면 결국은 죽음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전서의 내용은 이방인으로서 갓 신자가되신 교우들에게 앞으로 있을 박해와 그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어떤 경우에도 악의 위협에 굴복하거나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겸손하게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나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대하라고 교우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사회에서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윽박지르거나 박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으르렁거리는 소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꼬드기고 미혹하는 유혹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게 하여 고귀하고 고귀한 인간의 영혼을 죽음의 세상에 던져 버릴까 골몰하는 악마는 하느님께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다문화 시대, 다 종교 시대에 특별히 그 유혹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특정한 종교나 신앙체계에만 구원이 있지 않다는 사고들 입니다.
상대적이고 다원주의 세계 안에서 하나의 신앙 체계를 고수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을 마치 비인간적이고 보수적이다 못해 수구 꼴통이란 인상을 은연중 퍼뜨리고, 반면에 신앙은 자유라는 철칙아래 휴머니즘을 최고의 가치로 주창하면서 여러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마치 그 속에서 정수만 취하여 신앙의 모든 것을 깨달은 도사 같은 언행을 하면서 종교 상대주의, 종교 다원주의를 퍼트리는 것이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종교를 세속화하여 신앙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본질이 변하여 종교가 하나의 세속의 기관으로 변질됩니다. 믿음의 단체를 하나의 자선단체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유가 있다면 진리를 향한 자유가 있으며 정의를 이야기 하고 진리를 실천할 자유가 있을 따름입니다. 허위를 유포하고 더욱이 거짓을 선으로 위장하고 거짓을 행할 자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 진리는 모든 허위와 거짓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죽음에 붙이셔서 그 죽음에서 승리하신 구세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믿음의 표지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질곡이 해방되는 참다운 생명의 힘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은 사자후의 목소리로 세상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라 하십니다. 세상에 나아가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위해서 파견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말씀을 계속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세상 끝 날까지 전해 줄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당신 교회 안에 어떻게 함께 하고 계시고 교회와 더불어 일하고 계신지를 분명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 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하는 분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이신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 안에 자유가 있고 진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축복이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간곡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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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정민 비오 신부님]
<복음의 진리>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사제의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언직과 왕직, 사제직의 세 직분 중에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명확히 선을 그어 구분할 수는 없지만 예언직, 즉 복음을 선포할 직분이야말로 사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1코린 1,17)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단 사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실존 자체가 복음과 그것을 전할 사명에 의해 규정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진정 알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일생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이 복음의 진리일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에 무엇보다도 ‘마르코 복음서 다시 읽기’를 결심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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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유철 요한보스코 신부님]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말씀하십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16,16) 믿음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거듭 태어나는 사람은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合一)을 말합니다. 아울러 하느님 나라는 걸림이 없고 부족함과 어두움이 없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아픈 자를 낫게 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죄를 지어서 아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아픔을 치유함으로써 죄의 걸림돌을 치워주신 것입니다. 걸림돌이 치워진 사람은 얼마나 기쁜 삶을 살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걸림돌이 없는 나라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나라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나라의 주민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민의 조건은 당신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힘은 너무나 커서 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뱀을 쥐어도 뱀이 꼼짝을 못합니다. 악마에게서 흘러나오는 죄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은 힘이 있고 참된 것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강물처럼 넘쳐 흐르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당신을 믿는 우리 인간들을 협력자로 삼아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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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대화하면서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리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뿌리가 약하면 줄기가 제대로 뻗지 못합니다. 줄기까지 제대로 뻗지 못하면 바람이 심하게 불면 부러지기도 합니다. 이런 나무는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로 ‘신천지’가 드러났습니다. 신천지는 뿌리가 약한 신자들을 포섭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신천지는 ‘모략전도’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전교하였습니다. 신천지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다녔던 사람, 성당에 다녔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신천지의 거짓된 선교도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잘 모르고, 성서를 잘 몰랐던 신자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리를 충실하게 알고, 성서를 성실하게 읽으면 이단의 바람이 불어도, 세상의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들이 순교하였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도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교리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 알려야 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해준 교리교사였습니다. 그 뒤로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서가 나왔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져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했습니다. 메시아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식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참된 말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복음서가 되었고, 복음서는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세상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박해와 시련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낚시를 하는 것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는 여러분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낚시를 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밑밥을 열심히 주는 것입니다. 낚시를 할 때 밑밥을 주는 것은 고기들이 모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밑밥에는 고소한 향이 있습니다. 밑밥이 있는 곳으로 고기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낚시를 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비슷합니다. 친절, 겸손, 나눔, 사랑의 밑밥을 주면 사람들은 마음을 열기 마련입니다.
둘째는 밑밥은 같은 곳에 주어야 합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같은 곳으로 밑밥을 줄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밑밥을 같은 곳에 던지지 못합니다. 고기들은 여러 곳으로 떨어진 밑밥 때문에 같은 장소에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보자들은 고기를 잡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비슷합니다.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정성껏 대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집중을 해야 합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항상 ‘찌’를 바라봅니다. 어느 순간 찌는 물위로 올라오고, 그때 낚싯대를 들어 올리면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집중을 잘 하지 못합니다. 잠시 딴 곳을 바라보거나,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찌가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낚싯대를 들어 올려보지만 고기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없습니다. 집중을 하고, 관심을 가지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아픈 곳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기다림입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낚시를 하기 어렵습니다. 낚시는 때로 밤을 새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비를 맞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있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다리면 결국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꾸준히 참고 기다리면 희망의 꽃, 사랑의 꽃, 복음의 꽃은 피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은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합니다. “복된 마르코 복음사가를 뽑으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가르침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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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쁨>
마르코 16,15-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승천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기쁨>
나로 말미암아
당신이 기쁘다면
당신보다 내가
더 기쁘답니다
기쁨이 되라고
당신에게 나를
보내신 분께서
우리 안에서 몸소
기쁨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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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간다고 자부하고 있는 저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도무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용한 강의를 들을 경우가 있으면 얼른 이 자리를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바로 미술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림 숙제를 내주셨고, 저는 밤늦게까지 흰 도화지에 정성껏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께 제가 그린 그림 때문에 혼이 났습니다. 그림을 성의 없이 그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당시에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멘트가 저녁 9시면 나올 때였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더 늦은 시간까지 그림을 정성껏 그렸는데, 선생님은 성의 없이 그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뒤 저는 어떤 그림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못 그린 것을 성의 없다는 말로 바뀌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모습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못하는 것을 정성이 없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 결과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절망과 좌절로 향하는 소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있습니까? 힘이 되어 주는 말이 아니라 힘이 빼는 말을, 함께 하는 말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거부하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단죄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전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주 중요해집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나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드로 사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충실히 따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쓰면서 참된 회개와 복음의 기쁨을 지금 이 시대에까지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충실한 도구로 자기 자신을 봉헌하면서 복음서를 쓰셨던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를 기억하면서, 지금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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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사람들>
소설책을 읽다가 주인공이 엄마와의 여행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가격이 비싸다, 식당이 지저분하다, 쓸데없는 곳에 왜 돈을 쓰냐 등등의 잔소리를 계속합니다. 딸인 주인공은 큰맘 먹고 엄마를 위한 여행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엄마는 계속해서 딸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거는 것입니다.
딸은 마음이 상했고 엄마와의 여행이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엄마와 자신은 뼛속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했다.’ 모녀 관계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을 모두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이 사실을 자주 잊어먹는 우리입니다.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생각과 반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큰 실망과 함께 분노까지도 일게 됩니다. 상대와 내가 다른 사람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임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면 안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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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사랑, 겸손, 깨어있음, 믿음-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봄꽃들과 신록의 아름다움 가득한 부활시기에 맞이하는 복음 사가 축일이라 기쁨도 더욱 고조되는 느낌입니다. 마침 오늘은 요셉수도원의 대들보 같은 존재인 마르코 수사 축일이라 어제 저녁식사 때는 조촐한 축하식도 있었습니다. 문득 떠오른 이사야서 말씀과 성가 한 대목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52,7ㄱㄴㄷ)
그대로 아름다운 복음적 수도공동체에 대한 상징적 묘사같습니다. 즉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의 삶자체로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공동체 형제들!”로 바꿔봤습니다. 이어 성가416장 1절입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시편133,27을 바탕한 위 성가의 가사와 곡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사랑의 공동체 자체가 바로 복음 선포의 선교입니다. 즉시 축일을 맞이하는 마르코 형제와 곁에 있는 두 형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사랑의 선물로 전송했고 이어 주고 받은 메시지에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이란 말마디가 좋은 반향反響을 불러 일으킨 듯 합니다.
-“사랑하는 마르꼬 수사님! 영명축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철쭉꽃 축하인사도 받으세요.-
“항상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주님 찬미하며 형제의 사랑으로 위로하며 살아봅시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요셉 수사님!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와! 저까지 포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란치스코 수사님께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바오로 신부님!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저는 신부님이 계셔서 이 요셉수도원이 낯설지 않고 편안합니다.”
마르코 수사님 축일이 전 수도형제들의 축일이 된 듯 화기애애한 식탁분위기였습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환히 드러내는 것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보다시피 복음 선포는 우리 모두의 본질적 사명이요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각자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특히 정주의 삶을 사는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공동체는 더욱 그러합니다. 밖에 나가 선교가 아니라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올해 발간된 ‘코이노니아 45집’의 특집은 ‘베네딕도회 선교’를 다루고 있고, ‘베네딕도회 선교에 관한 제언’(허성석)의 마지막 결론 부분도 이와 일치합니다.
“특히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일차적으로 말이나 활동이 아닌 ‘생활 선교로 불림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일치된 형제 공동체 생활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복음의 정신으로 갈아입고 복음의 가치를 지향하는 개인과 공동체야말로 참된 선교사일 것이다.”
지난 4월22일 수요일은 50차 지구의 날이었고 '생태적 회개ecological conversion'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원 집(garden-home)’인 지구와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을 보살핌에 실패함으로, 지구에, 이웃에, 궁극으로는 창조주께 죄를 지었다. 하여 우리는 지구와 인류의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공동집(our common home)’인 지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구를 착취하기 위한 자원창고로 간주해선 안된다. 자연세계는 믿는 이들에게는 ‘창조의 복음서(Gospel of Creation)’이다.”
복음성서만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대상인 피조물의 자연세계도 ‘창조의 복음서(Gospel of Creation)’라니 얼마나 놀라운 신선한 발상인지요. 성 프란치스코의 후예다운 교황님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포함한 세상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복음 선포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 고맙게도 이런 진리가 잘 드러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얼마나 감사하고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파스카의 예수님은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오른쪽에 좌정하시어 하느님과 우리의 중재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십니다. 동시에 늘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고 우리 삶을 확증해 주십니다.
참으로 이런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살맛나는 인생이요 언제 어디서나 복음 선포의 삶을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의 스승인 베드로는 제1독서 베드로 1서 서간에서 복음 선포자의 구체적 삶의 지침을 주십니다.
물론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복음 선포의 원동력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샘솟는 사랑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는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바로 사랑의 복음 선포입니다. 비상한 복음선포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사랑의 삶자체가 빛나는 복음선포입니다. 사랑에 이어 겸손, 깨어있음, 믿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에 자신을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신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방심은 금물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습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깨어있음과 더불어 굳건한 믿음이요 이보다 악마에 대한 좋은 대책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하고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한 다음 주님의 고마운 말씀이 우리에겐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불러주신 그분께서 몸소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세게 하시며 든든하게 하시고 굳건히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은 영원합니다. 아멘.”(1베드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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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 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 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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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에 이끌렸습니다. 현재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에 대해 말씀이 길을 제시하고 계신 듯 느껴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안의 예수님 부활 메시지에서 복음 선포의 대상이 "모든 민족"(마태 28,19; 루카 24,47 참조)이라면, 마르코 복음에서는 "모든 피조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여기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시는 선교 활동의 범위는 "온 세상"이고, 그 대상은 "모든 피조물"입니다.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야 하고,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복음 앞에서 소외되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1베드 5,5)
원문에서 이 권고는 "젊은이 여러분"이라는 대상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연관성 안에서 보면 부족하고 미숙하나마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을 배운 사도들과 우리는 서로에게 겸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이며 또 그분께서 친히 행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앞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님은 역설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나 자연의 조화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 모상으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만물의 영장 인간이라도, 저마다 제 목적과 사명을 띠고 자기 자리에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피워내는 피조물 앞에서 경이로움을 가지게 마련이지요.
근시안적인 자기 이익에 눈이 먼 인류의 생태계 파괴는 우리에게 피조물을 맡기신 주님의 당부를 간과하고 무시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합니다. 과연 우리 인류는 주님의 당부대로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는지요! 만일 이 말씀을 경청하고 행동했다면 기후 변화나 생태계 파괴, 금일 겪는 바이러스 재앙은 아마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1베드 5,6)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앞에 자신을 낮추기보다, 권력자와 자본가가 조장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분열 정책에 자신을 맡겨 왔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그 정책에서 소외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자신도 그들처럼 재물과 힘을 소유하리라는 로망에 들떠 힘 없는 피조물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기후 변화와 온갖 자연재해, 신종 돌연변이 바이러스들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훼손된 우주가 참다 참다 몸살하는 아픔의 여파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회복하기에 우리가 너무 늦은 걸까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1베드 5,7).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
오늘 우리가 듣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아직 우리에게 길이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면서, 그 희망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근심과 공포, 좌절을 야기하는 모든 걱정을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만물이 함께 살아갈 방식을 깨어서 선택하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12)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받은 존재들입니다만, 어쩌면 그동안 발전이나 성과, 부의 축적을 은총과 혼동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라는 관계성을 자각하고 회복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피조물, 이 네 바퀴의 축과 각각 평화로이 공존하며 화목할 때 하느님의 모상성과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을 맞아 우리의 형제인 "모든 피조물"이 말을 걸어온 듯합니다. 우리의 이기주의와 탐욕에 그들이 병들고, 그들의 몸부림에 우리가 무너지는 이때, 다시 한 번 주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행동합시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움직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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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소원(wish)과 소망(희망- hope)
즈카르야, 엘리사벳, 마리아, 시메온, 안나에게는 소원들(wishes)이 없었다. 그들은 소망(hope)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들의 소망은 아주 다른 어떤 것이다. 그들의 소망이란 어떤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지만,그 성취는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그들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소망은 항상 끝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하면서 진정으로 말하고 있는 바를 상상해 보라. 그녀는 “도무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느님을 신뢰하고 당신을 신뢰하며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나 깊이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기다림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주의 깊게 들을 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신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헨리 나웬 <영성에의 길>에서
♣‘그대의 마음은 한 알의 씨앗, 그것이 기쁨으로 문을 열 때, 그것은 한 송이 꽃이 된다.
씨앗은 이 한 가지를 배워야만 한다. 봄이 와서 싹이 틀 적당한 시기가 될 때까지 기다려라. 씨앗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씨앗이 봄을 데리고 올 수는 없다. 씨앗이 너무 많은 노력을 한다면, 노력 그 자체가 방해가 되어 닫혀 버린다.
씨앗은 그저 받아들이고 열려 있고 기다려야 한다.
언제 봄이 오든지……그러나 씨앗은 언젠가는 봄이 오리라는 것을 가슴 깊숙한 그 곳에서 확신하고 있다.’
-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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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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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가 바로 마르코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서 선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 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님의 유언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명이 아닌 다른 것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말씀선포’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사명이요 의무임을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에,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참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고 있는가? 하여, 함께 일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복음만’으로, ‘말씀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정녕, 복음을 믿고 말씀을 따르는 일,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에 깊이 동참하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 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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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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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피조물의 찬미>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하지 않았다면 ~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써 내려갈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아마도 강렬한 체험에 이끌려 펜을 잡지
않을 수 없는 두근거림이 많았을 것입니다.
일기를 쓸때, 기도시를 쓸때
우리도 이런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하튼, 마르코는 복음서를 가장 먼저 쓴
인물로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이죠.
'누구에게만 복음전파가 아닌'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는것에 집중합시다.
꽃들, 새들, 지렁이, 곤충 등 ~
그 어떤 피조물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꽃들아 찬미하여라' 하고 말한다면
오늘 당신은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좋은 몫을 택한것이 됩니다.
"샘들아 물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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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숨차게 달렸고
심장처럼 요동치는
회의와 의심의
강을 건넜습니다.
이 거친
길을 걸으며
신앙을 발견한
마르코
복음시가를 오늘
만나게 됩니다.
가장 어렵고
사나운 시대에
마르코 복음이
쓰여집니다.
부딪히며
깨닫게 되는
복음의
참된 빛입니다.
복음의 빛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합니다.
복음의 길은
막을 수 없습니다.
공중누각이 아닌
생생한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복음의 세상이
진실로 올 것임을
마르코 복음시가는
믿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십자가의 여정을
피하여 갈 수 없듯이
십자가의 여정이
필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의
수난에서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뜻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여정에서
진리를 재발견하는
은총의 기쁜
축일 되십시오.
십자가는
복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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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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