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조심스럽게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이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안에 매우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교회학교 어린이 출석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며칠 전 서울시장에 출마한 어느 후보자는 공약중에 셋째 이상 자녀에게는 대학 학비 전액 지원하겠다고 공약을 세울 정도이니까 요즘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1명이상 낳지 않으려는 오늘의 현실이 교회 안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하면 다음세대 주인공 우리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오늘의 현실은 더욱더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주 보성 일임산 산행을 아내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하산한 한 아버지의 인상 깊은 한 장면을 보았는데 아버지가 자녀를 어깨위에 앉히고 다정스럽게 하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냥 보고 지나갔지만 저는 하산하는 한 아버지의 뒷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해보지 못했는데 부러움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소중하고 귀한 다음세대 주인공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보며 가르치고 계십니까?
엄마의 자존감 공부에 이런 짧은 글이 있습니다. TV에 비치는 이미지로 한번 볼까요?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보면 아이들을 바라보는 3그룹의 시선이 너무나 다르게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3그룹이란 첫째가 부모들이요....... 둘째가 제자들이요...... 그리고 마지막은 예수님...... 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소중한 아이를 자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부모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13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안수하고 기도하심)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여기 등장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미 들었든지 아니면 고침을 받았던지 예수님을 통해 은혜 입은 부모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네가 받은 은혜를 예수님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받도록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께 아이를 동반하여 데리고 나온 부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으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자녀들을 데리고 온 부모의 생각입니다. 부모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한번이라도 만져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접촉인데 유대인들은 만져주시는 즉 축복하고 안수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구약 족장시대만 놓고 보아도 이삭이 두 아들 야곱과 에서를 축복할 때 그들을 불러 앉히고 친히 안수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 통해 배운 방법대로 열두 아들을 일일이 불러 축복 했습니다. 효의 모델인 요셉의 두 아들인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까지 축복합니다. 이런 족장들이 했던 축복의 행위는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워 졌습니다.
창48: 16......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안수의 축복은 접촉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마치 피가 정맥을 통하여 온몸에 흐르는 것처럼 영적인 교감이 안수로 통하여 말씀과 함께 흐르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통해 접촉될 때 이것은 사랑의 접촉이요,,,,,, 인격의 접촉이요,,,,, 신앙의 접촉입니다.
세상의 어떤 좋은 학습보다도 더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부모 자신이 자녀를 끌어안고 축복해야 합니다. ........ 만약 부모가 자녀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집에서 놀아라 아빠 엄마는 예수님 말씀 들으려 갈때니까 친구들하고 놀아라 외면 했다면 이 아이들은 영영 예수님께서 안수하신 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온것입니다. 이것은 강제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라는 어른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어린이들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른들을 통하여 어린이를 낳게 하였습니다. 인간 혼자의 힘으로 어린이를 낳거나 기르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자녀를 낳게 하고 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녀를 올바르게 키울 수 없습니다. 이 세계가 이렇게 어지럽고 혼탁하여 절망이 가득한 것은 사람들이 자녀를 기를 때, 하나님과 함께 기르지 않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만 키워왔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어린이를 지으시되 부모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잠시 맡아서 키울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창작품이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의 예술품도 아닙니다.
부모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청지기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만져주심의 축복을 바라는 아이들 부모앞에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두 번째.... 제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13절 하반절 보십시오,,,,,,,,,, "제자들이 꾸짖거늘"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항상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러한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기를 여기 부모들이 데려온 아이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못하실까 봐 부모들을 향하여 왜 아이들을 데려왔느냐고 꾸짓는 것입니다.
즉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무관심입니다. 한마디로 너희들은 이곳에 올수 있는 대상이 아니야 이런 말과 똑같습니다. 당시는 아이나 여자는 숫자의 대상에서도 빠져 있었습니다. 무관심이요 소외당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주향교회오셔서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만약 어른들만 오고 너희들은 집에서 tv나보고 집 봐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좀 냉정하게 말하면 나는 천국에 있을테니까 너희는 멀리서 천국 구경만해! 그런말과 같습니다. 인격적인 모독을 생각없이 내빝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믿음으로 하지 않아요 제자들은 언제나 인간적이고 계산적이고 즉흥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보세요 교회에서 교인숫자를 따질 때에 먼저 장년 성도가 얼마나 되는가에 초점이 맛추워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년들이 헌금한 것이 교회 모든 재정을 책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있습니다.
어느 교회든 그 교회의 미래를 보기위해서는 교회학교 유,아동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교회의 모판과 같은 역할이 유아동부입니다. 모든 성도가 외면하지는 않지만 우리교회 100년 대개를 위해 영혼을 사랑하되 내가 지도하는 아이가 우리교회를 앞으로 살릴 수 있다라고 하는 심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예수님께서 세 번째 어떻게 하셨습니까?
14-16절,,,,,,,,,,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우리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부모들을 꾸짖었던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 노하셨습니다. 언제나 인격적인 우리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 즉시 노하시는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신할 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나오려고 소리를 질렀을 때도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간음한 여인을 잡아 돌로 치려는 사람들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잘못을 그 즉시 지적하시면서 노하셨을까요? 아이들에 대한 편견 잘못된 생각을 바로 고치기 위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①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는 것은 영접입니다. 그리고 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마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하셨습니다. 용납하고 즉 영접하고 아이가 오는 것을 받아드리고 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영접하면서 땅에 권세 있는 사람들보다 최고로 높이고 안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②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이를 샘플로 놓고 천국은 곧 아이 같이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제자들을 지적하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는 순수합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합니다. 꺼풀이 하나뿐입니다.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고 졸리면 잠자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삽니다. 그러나 어른은 이중 삼중 언제나 계산적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아이를 보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고 예수님 천국사역을 가로 막고 있다고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제자들의 이런 행동을 보고 가슴이 철령 내려 앉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프로젝트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 천국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주인공들을 제자들이 모르고 있으니 아마 한심하다 생각하시고 아이를 가운데 세우고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다.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아이처럼 순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막10:35절 이하에 보면.......설익은 제자들이 주의 영광 중에 누가 더 크냐하며 잣대를 제고 있으니 한심하지요? 그만큼 어른들은 아이들과 다르게 순수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화가 날수 밖에요
③이제 예수님 제자들 보는 앞에서 아이들을 안아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16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3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째는,,...안아 주셨습니다. 둘째는,,....손을 얹어 안수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이들을 안아 주셨을까요? 아마 우리가 자녀를 안듯 두 손 벌려 가슴에 품어 주셨을 것입니다. 부모들앞에서.... 제자들앞에서 아이를 이렇게 안아 축복해주면 좋겠네~~~~ 보여주셨습니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엄마 품에 한참 안기고 나서 느낌을 적어 오세요”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그리고 다들 감상문을 적어 냈는데 감상문 내용을 보면 “구름 속 같아요”....... “숨소리가 크게 들려요”.......... “따뜻하고 푹신해요” 등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넓고 가장 푹신한 품은 주님 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품은 오직 주님 품입니다. 예수 잘 믿는 가정의 자녀들은 주님 품에 안겨 사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으로 키우는 것은 품에 안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충성스러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기도하고 전화하고 주일에 아이들 맞이하는 것은 주님 품으로 안아 주는 것입니다. 손을 얹어 안수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자녀라고 인 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을 통하여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내 자녀 아니 우리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주신 기업과 같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바라 보십시오...... 물질로 뒤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좋은 세상 같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은 점점 더 강팤 해 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다음 세대를 꿈꾸며 우리자녀들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의 상급임을 믿습니까?........ 우리는 자녀를 절대로 기계로 키우는 오류를 범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축복해 주셔야 만이 진정한 영적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