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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1강 -3 (2009. 04. 01
曲順人情(곡순인정) 方登此座(방등차좌)그랬어요.
제가 소리 내어 읽을 테니까 같이 따라 읽어도 좋고 아니면 속으로 읽어도 좋고 한글로 음 달아 놨으니까 좀 좋아요? 소리 내어 읽으면 전부 한문 읽는 줄 알지요.
1-1 曲順人情 方登此座(곡순인정 방등차좌)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가 與諸官(여제관)으로
請師陞座(청사승좌)하니 師 上堂云(사 상당운),
山僧今日(산승금일)에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曲順人情(곡순인정)하야 以方登此座(방등차좌)나,
若約祖宗門下(약약조종문하)하야 稱揚大事(칭양대사)인댄
直是開口不得(직시개구부득)이라 無儞措足處(무이조족처)니라.
山僧此日(산승차일)에 以常侍堅請(이상시견청)이니
那隱綱宗(나은강종)이리오.
還有作家戰將(환유작가전장)하야
直下展陣開旗麽(직하전진개기마)아
對衆證據看(대중증거간)하라.
이것이 한 단락 인데 이 단락을 나누는 것도 의미대로 했고, 제목을 붙인 것도 제 의미대로 했습니다. 혹시 이해에 도움이 될까 해서 했는데 오류도 있을 줄 믿습니다. 한문에 조금 익숙하신 분. 또 여기에서 여러 번 강의를 들으셨던 분들은 조금은 아마 이 뜻을 눈치 챘을 겁니다.
曲順人情(곡순인정)하야 方登此座(방등차좌)라. 인정에 따라서, 인정에 못 이겨서 이 자리에 올라왔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렇고 저도 역시마찬가지입니다.
府主王常侍(부주왕상시). 하북부입니다. 하북부의 지방 장관입니다. 성은 왕씨이고 상시는 이것도 벼슬 이름입니다. 천자를 항상 옆에서 시중하고 있고 또 하던 사람이다. 한 번 장관이면 영원히 장관이듯이 그렇습니다. 저 앞에서 마방. 너덜너덜 붙여놓은 벼슬 이름 봤지요? 부주 하북부 장관인 왕상시라는 사람이 그날은 공무 다 그만두고 제관들 전부 다, 큰스님 초청해서 법문하니까 여기에 법문하는데 모여라. 정말 오늘 같은 날 총무원장이 직원들이고 스님들이고 다 총동원해서 여기 앉았어야 옳은데, 참 깝깝하구만요. 제관으로 더불어 請師陞座(청사승좌)하니, 임제 스님을 청해서 법좌에 오르게 했다. 청중은 서서 듣습니다. 중국에는 그래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또 법당이 앉도록 되어있지 않더군요. 서도록 되어있어요.
師 上堂云(사 상당운), 임제 스님께서 법상에 딱 올라갔다.
그리고는 云, 말씀하셨다. 형식이 거의 비슷하니까 눈여겨보십시오. 그러면 혼자 다 새실 수 있습니다.
山僧今日(산승금일)에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산승이 금일에 일이 부득이 해서 曲順人情(곡순인정). 억지로 할 수 없이 인정에 끌려가지고서 바야흐로 이 자리에 올라왔다. 그렇지만 왔으나 만약에 祖宗門下(조종문하)에 의지해서 祖宗門下라고 하는 것은 우리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리 불교의 진수에 입각해서 이야기해본다면, 그런 뜻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불교의 根本宗旨(근본종지)에 입각해서 한 번 본다면 稱揚大事(칭양대사)인댄, 입각해서 큰일을, 大事를 稱揚한다. 일컬어서 드날려 본다고 한다면, 大事. 이 세상에 정말 진정 큰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부 큰일 따라 왔어요. 오늘 이 시간에 하실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저울로 답니다. 무의식적으로 전부 각자 저울이 있어서 저울 달아가지고 ‘아, 오늘 임제록 공부하는 것이 제일 큰일이야. 제일 중요한 일이야.’라고 이쪽으로 기울어져서 이쪽으로 오신 겁니다. 그것 참 묘한 겁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순간에 다 일이 있어요. 일이 없어서 온 사람 없습니다.
제가 또 제일 혐오하는 신도중에 "아이, 시간이 없어서 못 왔습니다." 석가모니는 시간이 남아돌아서 출가 했는가요? 직장이 없어서 출가 했는가요? 자식새끼 없어서 출가 했는가요? 그것이 그게 아닙니다. 무엇이 큰일인가? 과연 이 시간 내가 가장 가치 있고, 큰일이 무엇인가? 이것 잘 지혜롭게 판단해 가지고, 우선순위를 정해요. 그래서 그 우선순위 따라서 하는 겁니다.
大事. 이것이 정말 보다 다른 차원의 삶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이다 무슨 도다 견성성불이다 이런 진부한 표현보다는 보다 다른 차원의 삶. 우리 이렇게 살고 말 것인가? 뭔가 좀 툭 터지고 속 시원한 일이 좀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그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한다면 直是開口不得(직시개구부득)이라 그랬어요. 直是는 솔직히 입을 열 수가 없어요. 開口不得입니다. 이것은 입을 열 수가 없는 도리입니다. 입 열면 다 그르치고 입을 열어서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좋은 언변을 가지고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부 오점 투성이고, 실지로 안 한 것만 못한 입장이 되고 맙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제록 책만 찍어놓고 그대로 설명 아니 하는 것이 제일 임제록을 세상에 잘 전하는 것이지요. 군더더기 붙여가면서 설명 하는 것. 이것은 만부득이 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처럼 曲順人情(곡순인정)해서 方登此座(방등차좌)처럼요. 정말 이것은 開口不得입니다. 입 붙이면 아무리 설명 잘 하더라도 틀리게 마련이고 잘못 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또 내 상식만치 내가 깨달은 것만치만 말하지 그 이외의 것이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표현을 못하지요. 왜냐? 말은 그 표현에 한계가 있어서 저도 표현해 놓고도 성에 차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큰 소견도 없이 더구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無儞措足處(무이조족처)입니다. 儞는 그대, 당신들, 발붙일 곳도 없다. 나는 입 벌릴 수도 없고, 여러분들은 발붙일 데가 없어요 여기에...
무슨 일인지 어쨌든 大事라고 했어요. 큰일 거기에는 그런 정도다.
山僧此日(산승차일)에 以常侍堅請(이상시견청)하니, 산승이 此日. 오늘에왕상시라는 사람이 堅請. 굳이 청 한다 이겁니다. 지방장관이 돼가지고, 예를 들어서 서울시장이 돼가지고 그 밑에 서울시청에 있는 국장 부장 다 그냥 직무 다 놓고 여기 법석에 모여라. 이렇게 까지 한다면 임제 스님도 어찌 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那隱綱宗(나은강종)이리오. 어찌 강종을 숨기리요? 綱宗은 종지. 근본취지라는 말입니다. 綱은 벼리강자지요? 이것이 그물을 들 때 제일 위에 중심에 있는 것을 강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綱領(강령)그러지요? 그런 종지. 근본취지를 어찌 숨길 수 있으리요?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표현해 보겠다.
還有作家戰將(환유작가전장)하야 또한 作家戰將. 이것은 아주 뛰어난 장군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늘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변방으로 항상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작은 왕들. 작은 지방장관들이 있어가지고 그 사람들이 항상 전쟁을 일으켜요. 그래가지고 예를 들어서 다행히 제갈량 같은 사람 하나 만나면 그래도 한 3분의 1 땅이라고 차지해갖고 몇 10년 살다 망하기도 하고, 그런 사례들이 수 없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분위기가 표현이 그래요. 作家戰將그러거든요. 전쟁터에 장군이라는 말 아닙니까? 전쟁터에 뛰어난 장군. 눈 밝은 禪師(선사). 눈 밝은 禪師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直下(직하)에 바로 당장 展陣開旗麽(전진개기마)아?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고, 중국 무협영화 같은 것 보면, 또 삼국지 같은 것 보면 깃발이 촥~ 갈라지지요? 그리고 장군이 말을 타고 촥~ 뛰어나오지요. 상대편은 저쪽 건너에 있고 아군은 이쪽에 있고 그 중심은 텅 비었어요. 거기에 나와서 1:1로 막 싸우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을 연상하시면 이것이 눈에 잘 들어올 겁니다.
展陣開旗. 진을 펼치고 깃발을 열고 뛰어나을 장군이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에 있다면 대중들 앞에 증거해 보여라. 한번 붙어보자 이것이지요.
이런 식입니다.
그 당시 소위 선불교가 절정에 달했을 때 정말 선사, 눈 밝은 禪師는 선사와 선사끼리 또 선지식과 선지식간에 어떤 법을 가지고 거량할 때, 정말 이런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그러니까 사정없이 몽둥이로 후려치고, 귀가 멀도록 고함을 치고, 걸핏하면 몽둥이, 걸핏하면 고함을 치는 겁니다.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그냥 피가 끓어오르고 정말 그 수준에 100분의 1 도 못되는 사람도 덩달아서 아주 긴장을, 초긴장을 하게 되고, 법회가 끝나고 나면 돌아가서, 선방에서 어디 코골고 잠을 자요?
그런 분위기에서 법문 듣고 선방으로 내려 왔다면 잠을 잘 수가 없지요. 정말 초긴장을 해서 용맹정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왜 그때 뛰어 나가서 한 마디 말을 못 했던가?' 그런 생각이 날 것 아닙니까? 아니 자기 안생을 올인 해서 이 공부 하고 있는데 모든 것 다 바쳐서 하잖아요. 세상 그 좋은 것 다 포기하고 이 공부 하려고 들어왔는데 여기에 수십 년 인생을 바쳤다 이겁니다. 수십 년 인생을 바쳐서 공부한 놈이 있으면 나와 봐 라고 했는데 못 뛰어 나갔다 이겁니다.
돌아가서 잠 오겠어요? 가죽 밑에 피가 있는 사람이라면 잠 안 오는 겁니다. 그 동안 생각했던 불교하고는 전혀 다른 불교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만 살펴봐도 그렇지요. 그러나 불교는 틀림없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전혀 색다른 불교. 뭐라고요?
[불교는 쉽다.] 아주 쉬운 불교. 그 동안 우리가 전부 옆길로 갔기 때문에, 전부 옆길로 갔기 때문에, 거품만 쫓아 갔기 때문에 불교가 어려웠습니다. 알고 보면 정말 이 임제록은 가장 쉬운 불교입니다. 그래서 타이틀을 불교는 쉽다. 그래 임제록은 불교 마지막에 공부하는 것이고, “임제록 공부하면 불교공부 끝이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1-2 佛法大意(불법대의) 이제 근사한 것 나왔지요?
僧問(승문),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師便 喝(사변 할)한대 僧 禮拜(승 예배)어늘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거기에 정말 눈 밝은 스님이 한분 있었어요. 스님이 탁 뛰어나와 가지고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이것이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이 소리 더러, 선지식이 법문하는 그 법문 자리에서 더러 봤습니다. 더러 들어 봤습니다. 나와 가지고 막 그냥 젊은 수좌가 열심히 정진하다가 선지식 앞에 한 마디 하려고 하는데 말도 제대로 튀어 나오지 않고 그냥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한 마디 했다가 개망신하고 젊은 열기에 그냥 더 이상 얼굴 들고 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법문 끝나고는 당장에 걸망 들고 도망가고 하는 것 우리 그런 것 봤어요. 그리고 그것이 참 공부하는 분위기답고요. 그것이 좋았어요. 여기 그런 스님이 한분 나왔어요.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어떤 것이 불법 대읩니까?
어떤 것이 불굡니까? 그러니까 師便 喝(사변 할)이라고 그래서 사가 문득 "왁" 하고 고함을 쳤다 이겁니다. 전번에 서장 강의할 때 제가 고함을 "왁" 이렇게 했지요? "할" 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잘 맞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선 잘 맞아요. 제가 여러 수백 번 연습해 봐도 잘 맞아요.
"왁" 하는 것이 좋더라고요. 그것이 우리한테는 더 익숙해요. 어릴 때 우리 놀때 그렇게 하잖아요. 가만히 있는 친구를 놀래려고 그렇게 하잖아요. 바로 그 겁니다. 놀래려고 하는 것도 있고, 또 꾸짖는 의미도 있고요. 또 떠 보느라고 하는 것도 있고요. 내가 이렇게 한 번 던져봤을 때, 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 이런 의미도 있고 그래요.
어쨌건 첫 고함을 쳤습니다. 불법 대의를 물었는데 "왁" 하고 고함을 쳤다 이겁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임제 스님이 불법 대의를 보여준 겁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불교 대의가 고함소리입니다. 고함치기 싫으면 방구를 뀌어도 좋아요, 다 불법 대의입니다. 구지 화상. 손가락 든 사람 알지요? 역시 불법 대의입니다. 거기도 불법 대의를 물었거든요. 그 때 손가락 딱 들어보였잖아요. 그런데 임제 스님은 참 재수 없이 불법 대의를 똑 같이 물었는데 이렇게 고함이라도 쳤으면 아프지라도 아니 했을 텐데 임제 스님은 흠씬 두들겨 맞았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德山棒(덕산방) 臨濟喝(임제할)그러지요. 여기 임제 스님의 스승인 황벽 스님도 방을 후려칩니다.
그래 스님이 예배했다 이 말입니다. "할" 하니까 '야 그것 근사한 불법 대의다. 그 만하면 불법 대의를 아는 사람 같다.’' 이런 뜻인지 뭔지 하여튼 예배를 했어요. 그러니까 임제 스님이 있다가 "야 이 중이 한 번 이야기 해볼만 하구나." 却堪持論(각감지론). 능히 이야기를 해볼 만하다. 한 번 따져 볼 만하다 이겁니다. 불법 대의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거량해볼 만하구나.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삼도발문 삼도피타가 나옵니다.
1-3 三度發問 三度被打(삼도발문 삼도피타)
問, 師唱誰家曲(문, 사창수가곡)이며 宗風嗣阿誰(종풍사옥수)오
師云, 我在黃檗處(사운, 아재황벽처)하야
三度發問(삼도발문)하야 三度被打(삼도피타)니라.
僧擬議(승의의)한대 師便 喝(사변 할)하고 隨後打云(수후타운)
不可向虛空裏(불가향허공이)하야 釘橛去也(정궐거야)니라.
그 스님이 예를 들어서 왕상시라는 분이 시내에다가 큰 홀을 하나, 강당을 하나 준비를 하고 거기에 스님을 모셨어요. 그래가지고 많은 청중이 그야말로. 여기 서울시로 치면 서울시장에서 부터 전부 다 나와 가지고 물론 스님들도 많지요. 이렇게 법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법석이 이루어졌는데 여기 눈 밝은 선사가 있으면 한 번 나와 봐라 하니까 어떤 스님이 탁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 "불법 대의가 무엇입니까?" 하니까 할이 한 번 오고 그 다음에 예배를 하니까 "야, 자네하고는 그래도 이야기 할 만하네." 그랬다고요. 그러니까 스님이 좀 힘이 났어요. 용기가 생겨가지고,
師唱誰家曲(사창수가곡)이며, 스님께서는, 임제 스님께서는 누구네 집의 곡조를, 노래를 부르십니까?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십니까? 이 말입니다. 어느 분의 전통을 이었느냐? 이 말입니다. 宗風(종풍)은 嗣(사옥수)? 종풍은 누구에게 阿誰라고 해요. 종풍은 누구에게 이었습니까? 누구네 집의 노래를 부르며 누구네 법을 이었느냐? 같은 뜻이지요. 그 근본을 대라 말입니다.
어디서 뜬금없이 그 왕상시하고 친해가지고서 이런 자리에 떡 나타나서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서 법문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당신 출신이 어디요? 이런 겁니다. 나는 이 지방에 오래 살아서 터줏대감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나타나서 출신이 뭐냐? 그러니까 보십시오. 스스로 소개한 자기 이력입니다.
我在黃檗處(아재황벽처)하야 師云(사운), 나는 황벽 스님의 처소에 있으면서 三度發問(삼도발문)에 三度被打(삼도피타)니라. 세 번 물었다가 세 번 두들겨 맞았나니라. 이것이 임제록의 大旨(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화엄경의 대지는 通萬法하야 明一心(통만법명일심)이다.
서장의 대지는 斥邪解現正見(척사해현정견).
법화경의 대지는 會三乘歸一乘(회삼승귀일승). 모두 경마다 여섯 자 정도로 이렇게 그 경의 대지를 표현합니다.
여기는 三度發問三度被打. 여기에 다 있습니다. 임제록에 다 있어요. 그리고 이것은 "세 번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았다." 라고 하는 이것이 임제불교의 전부이고, 아니 어쩌면 전체. 불교의 전체일지도 모릅니다. 불교가 뭐냐? 우리가 불교가 뭐냐라고 하기 이전에 너는 뭐냐?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인도 성자가 쓴 책도 있지요. 나는 누구인가? 그러기 때문에 "세 번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았다." 라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쉽게 읽고 넘길 일이 사실은 아닙니다. 선불교는 달마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입니다.
임제 스님은, 임제는 선불교의 완성입니다.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고 임제는 선불교의 완성이다.] 선불교도 역사적으로 아주 원시적인 선불교가 있고 아주 쇠퇴했을 때의 선불교가 있습니다.
앞에 서두에서 좀 살펴보았듯이 선불교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봅니다.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고 임제는 선불교의 완성이다.] 그러면 선불교는 그 정도로 불교에 있어서 정말 최고 정상에 군림하는데, 그 최고 정상에 군림하는 선불교에서 어떤 것이 불법 대의냐? "할이다." 이겁니다.
무슨 3승12분교가 어떻고 반야심경 외우랴 12인연이 어떻고 4제 8정도가 어떻고 그놈 외우랴 얼마나 쉽습니까?
"할" 고함 못 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손가락 못 드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여기에 다 있습니다. 사실은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여기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그것이 정말 내 인격이 되기까지 내 가슴속에 그것이 얼마나 절실히 사무친 내 살림살이냐?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지요. 각자의 공부의 문제이고 각자의 수행의 문제이고, 얼마나 여기에 시간 투자를 많이 했고 고심을 했느냐 여기에 따라서 이 말이 "할" 고함한번 치는 그 자리. 또 손가락 드는 그것이 정말 불교의 전부라고 하는 그 사실을 제가 느끼는 것은 정말 각자의 어떤 깊이에 따라서 각자 다릅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 드는 것 틀림없어요.고함한번 치는 것 틀림없습니다.
법화경. 경전으로서의 정점에는 법화경 이 있다고 했습니다.
법화경에는 역시 선불교 못지않은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부처님 앞에 꽃 한 송이 올리는 것으로서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니라.
다 이미 불도를 마쳤느니라. 성불해서 끝났다. 성불 끝났다 이렇게 했어요.
꽃 한 송이. 또 부처님 앞에 절하기 싫어서 손 한번 번쩍 들었다 이겁니다. 뭐 건방지게 했다 해도 좋고, 술 취했다 해도 좋고, 돌았다 해도 좋습니다.
부처님 앞에서 손 한번 떡 든 것으로서 皆已成佛道라. 의심스럽거든 집에 가셔서 당장에 법화경 찾아보십시오. 방편품에 그 말이 있습니다.
손 한번 번쩍 드는 것으로서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끝마쳤다. 다 성불해 끝마쳤다. 성불 끝냈다 이겁니다. 법화경불교도 대단하잖아요. 경전이라고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그런 수준의 불교가 어디 있습디까? 대단하잖아요. 어린아이가 장난친다고 오줌을 싸서 모래를 뭉쳐가지고 "이것이 불탑이다." 불탑이 둥글게 모여 있으니까 그렇게 장난을 치는 겁니다. 모래를 뭉쳐서 "불탑이다." 라고...
그것도 오줌을 싸가지고 그렇게 해놓고 장난쳐도 皆已成佛道.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법화경 대단하잖아요. 법화경은 그런 경전입니다.
참 무섭습니다. 경도요 우리가 제대로 보면, 안목을 가지고 보면 그렇게 무서워요. 어디 구지 화상 손가락 든 것이 대단하다고요? 임제가 할 한 번한 것이 대단하다고요? 법화경도 대단해요. 오히려 더 높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법화경에서 보면 불교가 쇠퇴 했을 때 선불교가 생겼다.
임제 지아무리 임제 임제해도 불교가 쇠퇴 할 때 선불교가 생겼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선불교 역사에서 두고 볼 때는 임제가 최고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누구에게 법을 이었느냐?
師云, 我在黃檗處(사운, 아재황벽처)하야 三度發問(삼도발문)에
三度被打(삼도피타)다. 최소한도 오늘 이것 하나는 외워야 돼요.
三度發問三度被打. 모르겠거든 세 번 때리고 세 번 물었다 세 번 맞았다.
이렇게 외워도 좋습니다. 三度發問三度被打라. 그러니까
僧(승)이 擬議(의의)라, 이거 무슨 뜬금없이 앞뒤 없는 소리냐?
僧이 擬議라, 승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머뭇거리다.
擬議는 머뭇거리다 이런 뜻입니다. 그 중이, 앞에 나가서 법문을 물었던 그 중이 이것이 무슨 소식인가? 하도 머뭇머뭇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師便 喝(사변 할)이라. 임제 스님이 곧 바로 할을 한 겁니다. 또 고함을 "왁" 하고 친겁니다. 그렇게 머뭇거릴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것 三度發問三度被打.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니까 머뭇거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눈 밝은 사람이라면 처음 듣는 소리라도 전혀 이 말을 처음 들었지, 사람이 말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잖아요.
무슨 말을 했든, 영어를 했든 독일어를 했든 중국말로 했든 한국말로 했든 간에 반드시 그 사람의 작용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三度發問三度被打라. 말뜻은 처음 들었지만 임제 스님이 뭐라고 표현을 했다 이겁니다. 표현을 했으면 즉각 반응이 있었어야지 僧 擬議 라고 하는 것이 벌써 틀린 것이지요. 제 말이 그른가 여기에 힌트가 있어요.
뭐라고 표현 했든 간에 임제는 표현을 했어요. 그것은 영어라서 나는 못 알아듣겠다 해도 임제는 100% 임제를 표현했다 이겁니다. 표현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것은 영어가 됐든지 중국어가 됐든지 처음 듣는 말이든지 그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말 속에 말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말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 도대체 뭔데요. 세 번 물었는데 세 번 얻어맞았다. '아 이거 황벽 스님한테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거 안들 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 알아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또 정말 임제를 아는데, 불교를 아는데 하나의 힌트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무슨 소리라도 자기표현 다 한겁니다. 그러니까 임제 스님이 할 한 것. 이것도 모르겠느냐? 그래도 또 모르겠네 이겁니다. 두 번 세 번 이렇게 가르쳐줬는데 또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隨後打(수후타)입니다. 바로 뒤따라서 후려 친겁니다.
할한 것 보다는 좀 고단위 주사를 놓은 것이지요. 三度發問三度被打보여줬다. 그 다음에 할 보여줬다. 그래도 모르냐? 아무 반응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더 강한 법을 쓰는 것이 隨後打입니다. 바로 주장자로 후려 친 겁니다. 대가리가 깨지든지 말든지 그것 사정 안 보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제자를 못 들어오게 하는데 제자가 얼른 문을 열고, 중국에는 문을 안으로 열게 되어 있더군요. 밖으로 여는 것은 우리 식이고 안으로 밀게 되어 있어요. 얼른 열고 발을 들여 놓으니까 스승이 있다가 문을 발로 콱 차버렸어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다리 하나가 거기 끼어가지고 부러져 버렸어요. 그래도 그 방에 못 들어가요. 쫓겨 나와야 돼요. 이런 식입니다.
몇 생의 생명을 걸고, 몇 생의 인생을 걸고 그 일 하나 해결하자고 하는데 그 까짓 다리하나 부러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손가락 하나 들었을 때 스승이 계도로서 싹 날려버렸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불교가 자신의 어떤 정신세계에서, 한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볼 때는 정말 최고조에 달한 정신세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전에 인도에서 아무리 훌륭한 마명 용수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정말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어떤 최고조의 정신에는 이르지 못하지 않았겠는가? 미치지 못하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건방진 생각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 隨後打입니다. 뚜두려 팼다 이겁니다. 아마 한번 때리고 말지 않았을 겁니다. 한번 때리면 그것이 모양이 아니지요. 도망 갈 때까지 그냥 뚜두려 팼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不可向虛空裏(불가향허공이)하야 釘橛去也(정궐거야)로다. 허공에다가 말뚝을 박을 수가 없구나. 내가 괜히 허공에다가 말뚝질 했구나.
이것이 뭐 좀 밑천이 좀 있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근거도 없는 인간이 나와 가지고 누구 집의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에게 종풍을 이었느냐? 이런 것을, 남의 밑천을 감히 그렇게 함부로 물어?
이것은 참~ 不可向虛空裏하야 釘橛去也라고 한 이 말은 정말 선지식답지 않게 아주 매몰차게 사람을 무시해 버리는 뜻입니다. 허공을 향해서, 허공에다가 말뚝을 박을 수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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