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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의 교회에서 자녀교육을 전공한 교수님을 초빙해서 자녀교육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강사님은 준비한대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강의하기를 “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고 본이 되면, 반드시 그 자녀는 성공하고, 절대로 부모 속 썩이지 않고, 평생토록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잘 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녀를 키우기에 자식 때문에 속 썩는다고 합니까? 준비된 강의를 은혜롭게 잘 마쳤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강단에서 내려왔는데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한 집사님이 강사님에게 다가 와서 물었습니다. “강사님! 자녀는 혹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 몇 살이지요? “예 만 두 살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집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더랍니다.
담임목사님이 옆에서 다 듣고 있었는데 이렇게 느껴지 더랍니다. 집으로 가시면서 우리 집사님 속으로 교수님!! “두세 살 때 착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강사님!!~~ 자식 커 봐야 압니다”............. 우리 자식들 지금 잘한다고 다 장담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어버이주일에 참석한 성도님들은 이미 부모가 됐든지 아니면 앞으로 부모가 되실 분이 오늘 이 예배에 참석 했습니다. 오늘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함께 읽은 본문은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주인공을 둘째 아들을 곧 탕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큰 아들도 둘째 아들 못지않게 별 다를 봐 없는 아들입니다.
본문 말씀 속에 아들들의 모습보다 실제적인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둘째 아들도 큰아들도 아닌 오늘도 내일도 자식들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주인공은 아버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만나 뵙고자 합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우리가 주인공을 알려면 그 얘기의 결론을 보면 압니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소설 한 권을 읽어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엑스트라는 칼만 지나가면 윽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총 몇 번 맞아도 다시 살아나 끝까지 영화 끝 마무리를 멋지게 장식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11-24절은 둘째 아들이야기입니다. (큰아들 등장하지 않음) 그런데 25-32절은 큰아들 이야기입니다. (둘째아들 등장하지 않음)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 이야기는 아들이 초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누구에게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까?......... 오직 홀로 계신 만유의 주 하나님 아버지께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지만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참 모습을 보게 되고 긍극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1. 이제 본문11-24절 등장한 둘째 아들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 아들은 패역한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재산을 주었습니다. 둘째아들은 휘바람 불며 재산가지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받은 유산가지고 사업을 잘해서 성공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땀 한번 흘려보지 않고 어버지가 준 재산 다 허랑 방탕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랑 방탕은 한마디로 세상 쾌락을 즐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집과 기생들과 즐기며 돈을 마음대로 뿌리고 낭비 했습니다.
이 정도로 살면 성경은 패역한 자라고 했습니다. 신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이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패역한 아들을 끌고가 사람들이 왕래가 빈번한 성읍에 데리고 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장로님!... 네 아들입니다. 이 놈이 너무나 말을 듣지 않아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고쳐 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돼 데려 왔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을 돌로 쳐 죽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을 직역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대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고소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이 알게 되면 돌로 쳐 죽일 놈입니다.
본문을 보세요........ 둘째 아들 돈 다 떨어지고 화려했던 생활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호구지책이라 입에 풀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구걸하다 한 집에 들어가 먹을 것 만 주면 일 하겠습니다 라는 심정으로 돼지를 치지만 흉년이 들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아십니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은 율법상으로 금지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돼지에게 먹이를 주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일을 둘째 아들이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자존심이나 존엄성 자체까지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둘째아들은 완전 밑바닥입니다.
이제 자존심까지 잃어버린 둘째아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구제불능입니다. 하나님은 이 상태까지 우리를 내려놓게 하시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기까지 하나님께서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스스로 돌이켰다고 ” 했습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여기 17-18절.......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 아들 보세요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나님앞에 제가 죄를 졌습니다. 아버지앞에 사람앞에 죄를 졌습니다. 회개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즉시 과거를 청산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도여러분!! 둘째 아들!! 이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기다리신 분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이셨습니다.
어느날도 아버지는 전과 똑 같이 집 앞에서 저 멀리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저 멀리서 패가 망신하여 돼지만도 못한 패역한 아들이 돌아오는데 아버지가 그를 먼저 발견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형체만 보고도 자기 아들을 알아봅니다. 그가 아무리 누더기 옷에 바짝 말라서 형체도 걸음 거리도 달라졌어도 아버지는 그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20절...... 측은이 여겨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20절....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장면은 그져 우리가 쉽게 상상하고 지나갈 말씀이 아닙니다. 그 안에 더 깊은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20절하반절에 “달려가” 이 단어 헬라어 원어에는 “전력질주” 했다는 말이 더 맞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가만히 있어도 아들이 아버지 앞에 와 무릎을 꿇고 빌게 될 것인데 아버지는 왜!! 아들을 향해 전력질주하며 달려 갔을까요? 둘째 아들을 성읍사람들이 먼저 알아보면 혹시나 돌로 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신명기 21장 기억하시지요 패역한 아들을 동네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돌로 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이 먼저 알기 전 아들을 보호하기위해 전력 질주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멀리 보고 누구 보다 더 더 빨리 달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달려가서 그 아들의 목을 안았습니다.
대개 반가우면 우리는 가슴을 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버지 보세요 장성한 아들을 늙은 아버지가 안은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쓰인 “목을 안았다” 목이란 헬라어 단어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단칼에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그의 목을 안았다는 것은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위해 아버지의 보호 본능적 행동입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아버지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아들에게 어떻게 해줍니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천사처럼 대접합니다.
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그져 둘째 아들 보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먼저 심판 하실 것 같죠 아닙니다. 너는 타향에서 뭐! 했냐 내가 준 돈 어디다 섰느냐 왜 이런 꼬라지로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였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써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이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스스로 돌리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그냥 무조건 받아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막연히 기다리고 전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둘째 아들에게 확 나타나서 만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행위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허랑방탕했던 아들의 잘못을 전혀 묻지 않으시고 받아주신 아버지입니다.
2. 잘못한 것이 들어나지 않지만 큰 아들도 탕자 였습니다.
25절이하 말씀이...... 큰 아들에 대한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둘째 아들만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했으니까 탕자라고 하지만 큰 아들도 잘못이 있습니다.
큰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집에 왔을 때 집에서 잔치소리가 납니다. 궁금하여 종을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뭔 일이냐! 종이 하는 말이 당신 동생이 돌아 왔어요 그래서 당신 아버지가 지금 잔치를 벌리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불만입니다. 그동안 큰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잘 참고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한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먼저 받아야할 유산을 받아가지고 세상에 나가 허랑방탕한 동생을 책망 한 번 안하시고 잔치를 베풀다니요 나에게 흔한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잡아 주었다며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29-30절...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아들이 하는 말은 맞지만 자기 생각으로 불만입니다. 왜 동생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 동생이 집으로 돌아온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를 보십시오 흥겨운 잔치로 작은 아들 곁에 있어도 아버지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큰 아들의 마음을 모를 이유가 없어요 아버지는 잔치자리에서 나와 큰 아들을 달립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을 작은아들처럼 품어주고 안아주지는 않았지만 어찌 아버지의 마음이 큰 아들을 차별하겠습니까?
31-32절.......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전형적인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다 알면서도 바라보시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녀를 키우다보면 철없이 말썽을 부리며 살아도 우리 부모는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 부모는 자녀들을 바라보는 것 그것 하나 만족하며 살아 갑니다. 자녀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부모는 자녀들 앞에서 그냥 바보가 됩니다.
지난 5월 8일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충은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부모님께 효도편지를 쓰도록 하여 집으로 보낸 것 갖습니다.
편지 내용을 살펴보니 아버님 어머님을 깊이 들려다 보며 울림을 주는 손 편지였습니다. 읽을수록 감동으로 다가왔는데 그냥 효도편지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깊이 있는 내용이 들어있어서 부모로써 아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찡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살아가는 자녀가 되겠습니다.......... 제 학업에 대해 기도를 생활화 하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
비록 짧은 손 편지이지만 감동으로 다가와 그날 집에와 상의를 훌렁벗고 밥을 먹는데 아들 사랑한다 안아 줄려고 했더니 아빠 이상해~~~ 하는겁니다. 지난 금요일 아침 아들을 데려다 주면서 그랬습니다. 아들아!! 아빠가 더 잘할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모이고 앉아 있는 우리자녀들도 부모가 되겠지만 우리의 부모의 진정한 샘플은 누구입니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육신의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찡하기만 합니다.
이사야 49:15-16.....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살아계신 우리 부모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를 섬기듯 지금 살아 계실 때 잘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