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 朴宜中, 表請曰, “昊天廣大, 覆育無遺, 帝王作興, 疆理必正, 玆殫卑懇, 仰瀆聰聞. 粤惟弊邦, 僻在遐壤, 褊小實同於墨誌, 崤嶢何異於石田? 况從東隅, 以至北鄙, 介居山海, 形勢甚偏. 傳自祖宗, 區域有定,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至遼乾統七年, 有東女眞等作亂, 奪據咸州迆北之地, 睿王告遼請討, 遣兵克復, 就築咸州及公嶮鎭等城. 及至元初戊午年間, 蒙古散吉大王·普只官人等領兵, 收附女眞之時, 有本國定州叛民卓靑, 龍津縣人趙暉, 以和州迆北之地迎降, 聞知金朝遼東 咸州路附近瀋州, 有雙城縣, 因本國咸州近處和州, 有舊築小城二坐, 矇聾奏請, 遂將和州, 冒稱雙城, 以趙暉爲雙城摠管, 卓靑爲千戶, 管轄人民. 至至正十六年間, 申達元朝, 將上項摠管千戶等職革罷, 以和州迆北, 還屬本國, 至今, 除授州縣官員, 管轄人民. 由叛賊而侵削, 控大邦以復歸. 今欽見奉, ‘鐵嶺迆北迆東迆西, 元屬開元, 所管軍民, 仍屬遼東. 欽此.’ 鐵嶺之山距王京, 僅三百里, 公嶮之鎭, 限邊界, 非一二年. 其在先臣, 幸逢昭代, 職罔愆於侯度, 地旣入於版圖. 還及微軀, 優蒙睿澤, 特下十行之詔, 俾同一視之仁. 伏望, 陛下度擴包容, 德敦撫綏, 遂使數州之地, 仍爲下國之疆. 臣謹當益感再造之恩, 恒祝萬年之壽.”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주원장에게 보내 표문을 올리길 본조 이래로 철령이북 역대로 고주,화주,정주,함주 와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땅이었는데 요나라 건통7년(1107)에 이르러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 함주 북쪽의 땅을 탈취하니 예종이 요에게 토벌하길 요청하여 병사를 보내 다시찾고 함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았고 지원초(1264) 무오년간에 몽고 산길대왕등이 여진을 붙였으며 고려의 정주 반민 탁청,용진현인 조휘 등을 화주의 북에서 항복해 맞았으며, 듣고 알기로 금나라의 요동인 심주 근방 함주로에 쌍성현이 있는데 본국의 함주 근처에 화주가 있기 때문이며 옛날 쌓은 성 2개가 있는데 쌍성이라 하여 조휘를 쌍성총관 탁청을 인민을 관할하는 천호로 하였기때문입니다. 지정16(1356)년에 이르러 천호등을 혁파하여 화주 북쪽을 본국에게 환속시켰읍니다. 지금 보건데 철령의 북,동,서 원에 속한 개원의 군민은 요동에 속하였으며 이로서 철령의 산은 왕경과 300리 거리에 있고 공험진은 변방의 경계에 있은지가 한 두해가 아닙니다.
卷一百三十七 列傳 卷第五十 禑王 14年 3월 (1388)
西北面都安撫使 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帝豫設本衛鎭撫等官, 皆至遼東.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站置百戶.” 禑自東江, 還馬上泣曰, “群臣不聽吾攻遼之計, 使至於此.” 遂徵八道精兵, 下令曰, “明日欲西幸, 臣僚宜皆著大元冠服.” 我太祖及諸宰樞言, “大明使將至, 今西幸, 則民心動搖. 請待大明使還.” 禑從之, 國人皆喜. 時城中人, 編髮胡服者已多, 憲府以大明使將至, 禁之.
첫댓글 철령에서 심양까지는 당시거리로 100리,,, 제가 조선철령이라고 입증한 팔달령에서 하북성 청현까지는 당시거리로 대략 300리-350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