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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은혜
제목 : 모든 은혜의 하나님
성경 : 벧전 5:8~14
찬송 : 441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61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벧전 5: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벧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벧전 5: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베드로전서 강해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부분에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했을까요?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반감과 탄압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우는 사자와 같은 적대적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이렇게 사방에서 고난이 밀려오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베드로의 답변은 ‘은혜’였습니다. 은혜로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에 굳건하게 서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마지막 부분에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고난의 시간을 지내 성도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는 먼저 ‘근신하라 깨어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도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죽기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최후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을 데리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졸다가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었다면 이런 시험에 들었을까요?
또한 여기에 ‘대적 마귀’가 등장합니다. ‘마귀’(디아볼로스)는 참소하는 자입니다. 마귀가 무엇을 참소합니까? 마귀는 일찍이 그리스도를 참소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를테면, 마귀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한’(벧전 3:18)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마귀는 스스로 하나님 행세를 했습니다. 승리한 것 같았지만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심으로 최후의 선고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마귀는 영원토록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자’임을 스스로 증언한 꼴이 되었습니다.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인 사망을 당하신 십자가만큼, 마귀의 불의함을 영원토록 증거 하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참소자의 입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법정 판결의 선고에 따라 형(刑)을 집행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그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입니다. 베드로는 이 묵시론적 결말을 배경으로 제시합니다. 4절에서 이미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를 언급합니다. 6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하고 정한 종말의 때를 언급합니다.
8절에서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종말론적 신앙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귀가 등장합니다. 그는 ‘대적’(호 안티디코스)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의 ‘대적’입니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불의함이 선고되었지만, 주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마귀는 그 어리석은 악을 계속합니다. 그는 여전히 ‘울부짖으며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이미 심판을 선고받았습니다. 아직도 우는 사자처럼 성도들을 삼키려 두렵게 하지만(딤후 4:17), 그는 이미 자신이 불과 유황의 못에 삼키워질 형벌을 선고받은 죄수에 불과합니다(계 20:10). 먹잇감을 집어삼키려고 으르렁댄다는 것은 매우 위협적인 모습입니다. 대중들은 근거 없는 ‘괴담’에 휩쓸립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두려움을 자극하고 공포감을 극대화시켜서 스스로 그 공포감에 질식당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실, 곧 진리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셨고, 마귀를 굴복시키셨으며, 마귀는 십자가에서 정죄 받아 묶여 있습니다. 쇠줄에 묶여 있는 채로, 마치 자기가 성도들을 집어 삼킬 수 있는 것 마냥 거짓으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회를 멸할 능력이 없습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마귀의 권세를 멸하시며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신’ 사실에 굳게 서서 분명히 대적하여 진리를 선언함으로써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되고 교만한 존재이므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을 빛을 비춤으로 쫓아내듯이, 말씀의 참된 진리로 비추어 거짓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철저히 순복함에서 오는 겸손한 권세로 모멸감을 주어 쫓아내야 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직접 나타나실 때까지는,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와 그에 미혹되는 세상 풍조와 철학, 사상들과 시대의 정신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 그분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악인들의 핍박은 ‘잠시’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영적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일 단계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약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기에 앞서서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후에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믿음을 굳게 하라!
벧전 5: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성도들이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은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벧전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믿음을 굳게 한다는 것은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건축은 기초가 중요합니다. 기초를 든든히 하지 않으면 지진이 일어나거나 비가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짐이 심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인 우리는 무슨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교회는 ‘생존’의 싸움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고 준비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싸움이 아닌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뜻을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 6:19-34).
교회는 누구와 더불어 싸워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 서로 갈라서서, 상대편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그런 싸움을 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싸움을 싸워야 할까요? 이웃 교회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자신의 예배당에 채우기 위해 싸워야 할까요?
성도의 싸움의 대상은 생존도, 원수 같은 사람도, 자아실현도 아닙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오늘날 ‘세속주의’와 싸우고, 넘치는 죄악의 풍랑에 맞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싸움,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려는 싸움,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싸움을 죽기까지 다해야 합니다. 잘 싸우는 것보다 바른 싸움을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꼭 싸워야 하는 싸움, 주께서 명하신 싸움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세상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고 언급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세상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어느 시대든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형제애를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2:17).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형제들이 헛되이 고난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고난을 경험하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완성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압니다. 형제들이 받는 고난을 아는 것은 종말론적 관점을 더 견고하게 하며, 그들이 소유한 ‘산 소망’(1:3)을 더욱 확고하게 붙잡게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만연해 있다는 것은 완성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을 붙들라!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곳을 향해 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교회가 정한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도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방향은 부르신 분께서 정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사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의 모습은 베드로전서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벧전 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친히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방식으로, 혹은 심판주로서 행하며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보면, 베드로전서에서 ‘은혜’는 그분이 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표시입니다. 그분이 주권자 되시며, 그분이 교회를 붙들고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중간의 과정, 그리고 끝까지 그분의 교회를 인도하시며 온전하게 하시는 통치의 수단이 은혜입니다. 그분은 ‘모든 은혜’로 그분의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진행되고, 은혜로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썩어지고 더럽고 허무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도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굳이 그렇게 부르셔야 할 근거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분의 ‘많으신 긍휼’ 때문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무엇 때문에 불러주셨을까요?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나라의 영광’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영광,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 그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영광입니다. 그 영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베드로전서의 문맥에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과 연관되는 ‘영광과 존귀’이며, ‘영광의 면류관’으로도 표현됩니다(1:4,8; 5:4).
중요한 것은 죄인이었던 우리가 원할 수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하며, 우리 힘으로는 결단코 얻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영원한 면류관을 얻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황홀하고 복된 소식입니다. 문제는 이 황홀하고 영광된 영광을 자신의 인생의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때로 신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정하신 이 ‘영원한 영광’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고된 과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과연, 은혜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들이 약속되어 있을까요?
1)회복하시는 은혜-‘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온전하게 하시며’(카타르티세이)는 정확한 의미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다시 원래의 위치로 제 위치로 돌려놓는다. 회복한다, 그래서 준비하게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련을 당하면 흔들리고 흩어집니다. 제 위치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한 양심으로 살려 하다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며 넘어집니다. 주님의 은혜는 이러한 교회를 그저 두지 않으십니다. 다시 회복하십니다. 제 위치로 돌려놓습니다.
다시 세상은 세상 자리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자신은 자신의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부르심을 받아 나온 세상에 다시 빠져 들어가지 않게 건져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목적인 영원한 영광이라는 최종목적지를 다시 향하도록 식어지는 소망을 다시 뜨겁게 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양심으로 세상 사람들의 양심조차 부끄럽게 하는 그런 길에 서도록 계속해서 위로하시며 격려하시며 진리의 말씀과 넘치는 은혜로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2)굳게 서게 하시는 은혜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잠시 고난으로 흩트러진 성도를 제 위치로 회복 하실 뿐 아니라, 그 위치에서 견고하게 되고 또한 대항하여 맞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기서 ‘굳건하게 하시며’(스테릭세이)는 ‘고정하여 흔들리지 않게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제 위치에서 더욱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전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견고해집니다. 더구나 다가오는 고난과 환난 앞에서 움츠러들고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맞서서 굳게 서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3)강하게 하시는 은혜
믿음의 마땅한 싸움을 싸우려면 강해야 합니다. 무릇 전쟁에서 승리하면 강해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흩트러진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제 위치에 놓으실 뿐 아니라, 굳게 서서 대적에 맞서게 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강력으로 채우십니다. ‘강하게 하시며’(스떼노세이)라는 말씀은 오늘날 흔히 ‘스태미나’라고 하듯이, 어떤 일을 넘치는 활력과 좌절되지 않는 끈기로 기어코 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리킵니다. 이제 주께서 주시는 은혜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더욱더 온전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도를 강하게 하시는 가장 우선되는 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므로, 성령이 역사하시는 심령이 말씀을 통항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관하여 들을 때에, 그 믿음이 능력을 얻고 소망이 더욱 살아 역사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능력이 더욱 가득 차게 됩니다.
4)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은혜
부르신 은혜도 있고, 영원한 영광을 목적지로 허락하신 은혜도 있습니다. 그리고 출발점에서부터 도착점까지 그 길고 험한 과정을 인도하시는 은혜도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중간도 모두 은혜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공급되는 은혜를 통해, 신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 진리와 악과 십자가 앞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 자리에 굳게 서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며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며, 십자가의 길로 주님을 따라 걷게 됩니다.
‘터를 견고하게’라는 표현 속에는 건물을 지을 때 그 기초 돌이 되는 반석, 바위와 같은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돌’로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음을 선포했습니다(2:3-5).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라는 표현은 베드로 자신의 간증처럼 들립니다.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 바위’가 아니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교훈하고 권고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박히고, 성도들에게 그 은혜 안에 굳게 서라고 권합니다(12절). 베드로의 편지를 요약하면 결국 은혜 안에 굳건하게 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고,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권면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 안에 거하며 그 은혜로 강건해지는 것’ 외에는 고난을 이길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고난과 마귀의 공격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은혜로 부름을 받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마귀를 물리칠 수도 없고, 고난을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은혜, 굳건하게 하시는 은혜, 강하게 하시는 은혜,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셔서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