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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81
4월30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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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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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UnO1o79O5A&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13&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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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수도원을 오르는 언덕길이 ‘환상’입니다. 왼쪽으로는 샛노란 개나리가, 오른쪽으로는 벚꽃이 만발해, 마치도 천국으로 오르는 언덕길 같습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고, 이 절경도 잠깐이겠지요. 벌써 수많은 꽃잎들이 잠깐 내린 비에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 한결같지 않다는 것,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 세상 것들이 지닌 특징입니다.
절정의 나날에 그 화사했던 얼굴들이 며칠가지 빛을 바랩니다. 유한하기 그지없는 세상 것들이 형상을 바라보며 드는 한 가지 생각은 ‘모든 것이 헛되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입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처럼 속절없이 눈 깜짝할 순간에 세상 것이 사라진다 해도, 주님께서는 잠시 접었던 파라솔을 펼치듯이, 또 다시 희망으로만 가득 찬 우리의 하루를 활짝 펼치십니다.
결국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은 매일이 새 출발이요, 매일이 절정이요, 매일이 천국입니다.
결국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 끝까지 청청하게 남아있는 것, 언제나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 속한 것뿐입니다.
꽃그늘 아래서 세상을 바라보니 온천지가 천국입니다. 때로 미워보이던 형제들도 한 송이 꽃처럼 어여뻐 보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은총일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죽음조차도 축복으로 변화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분께서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양식을 먹고 세상을 향해 길을 나서면 세상이 온통 꽃길일 것입니다.
그분께서 매일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몸을 영하고 이웃을 바라본다면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천사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성체성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 지상에서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생명을 주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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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youtu.be/ucoo3aywqUU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대화’는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 어색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저도 그랬기에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방법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 5가지를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말하는 것보다 들어라 –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내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오늘 좋은 대화였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2.상대의 말에 관심을 가져라 – 보통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정서이고 우리는 인중 쪽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해주고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신나게 말할 수 있습니다.
3.상대를 긍정하라 – 옳고 그름은 사실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압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다가는 상대가 가진 나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상대는 지금 상담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4.질문하라 –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화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있고 그 대화가 계속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를 흐르게 하려면 나의 대화 다음에 반드시 상대의 대답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5.상대가 관심있는 것을 질문하라 – 질문이 취조가 되면 안 됩니다. 상대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면 상대는 신이 나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 주제를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사실 대화의 기술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면 내 말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알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입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라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고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묻는 것이 없다면 하느님도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의 신비에 대한 믿음까지 오지 못하는 이들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알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친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요즘은 하늘나라 신비에 대해 알려고만 하면 그 정보를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를 따로 하지 않더라도 SNS나 유튜브만 봐도 수많은 정보와 가르침들이 흘러넘칩니다. 그런데도 표징만을 요구하며 배우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참 구원과 진리에 무관심해지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2007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워싱턴 D.C의 기차역에 서서 여섯 곡의 바흐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바이올린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조슈아 벨로였습니다. 조슈아가 바쁜 직장인들로 가득한 기차역에서 350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2,000여 명이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45분간 계속해서 연주했습니다. 단 6명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20명가량이 돈을 냈지만 이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기차가 내는 소음 외에는 정적이 흐를 뿐이었습니다. 박수갈채도, 군중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진행한 이 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마저도 치열한 경쟁에 휩쓸리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 자신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주님에 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먼저 그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 뒹굴고 있는 우주에 관한 그림책을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친밀해집니다. 더 많이 알고 싶을수록 더 많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지금 하느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체 안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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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늘의 빵을 달게 느끼는 어떤 갈망이 있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이사 54,13의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이끄신다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46절)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목소리를 아드님에게서 들었다는 말씀이다. 그 아드님은 아버지를 아시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듯이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이렇게 나오는 말씀은 지나가고 없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에게 남아 있으며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말씀이시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46절) 아들과 성령만이 그분을 제대로 보신다. 외아들과 성령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아신다.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1코린 2,10)하시기 때문이다. 외아들과 성령은 하느님으로 아버지를 아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죽으셨다.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49절)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셔서 나날이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서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다.”(시편 78,25)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빵을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 모시는 이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며, 이 빵을 먹는 이는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ㄱ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들이 모아지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ㄴ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신다. 생명을 주신 말씀께서는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ㄷ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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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서 6장의 전체 맥락 안에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성체성사에 대한 언급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 안에서 그 표징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몸은, 구약 성경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고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은 만나의 신비로움을 하느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선물인 율법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참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들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공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 참조)을 율법을 통하여 배우고 믿었던 이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선택을 재촉합니다. 유다인들처럼 듣기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될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그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세로 늘 성경을 읽고, 또 그 뜻을 풀이해 준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이 부활의 시기를 보내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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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나는 생명이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요한 14,6) 예수님은 ‘참 생명’이신 분이고,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4) 그렇기 때문에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들을 통해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고, 부활을 통해서 당신이 생명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라는 말씀은, ‘만나’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아니었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나’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양식이었지만, 사람들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을 뿐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라는 말씀의 뜻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먹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믿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믿는다.’를 ‘먹는다.’로 표현하셨을까? 듣기가 너무 거북한 표현이 아닌가?(요한 6,6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은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음식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섭취함으로써 생존합니다. 음식 안에 들어 있는 영양분은, 또는 생명력은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내 몸의 생명을 유지해 줍니다. 그 단계에서는 음식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과 나는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생존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먹고), 예수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 될 때까지 예수님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빵’으로 표현하시고, “나를 먹어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말은, 그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나타내고, “살아 있는”이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라는 앞의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죽지 않는다.”라는 말과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지상에서의 죽음은 그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나 자신이 곧 생명이다.”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나는 생명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나의 살이다.”는 뜻으로는 “나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가 주는 빵을 받아먹어라. 그 빵은 곧 나다. 나를 믿는 것은 곧 내가 주는 빵을 받아먹는 것이다.”입니다. <“나의 살이다.” 라는 표현도 당신에 대한 신앙은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과 ‘한 살’(한 몸)이 될 정도로 완전하게 일치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란, 나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나는 너희를 크게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너희에게 나를 모두 주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즉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이, 요한복음 6장에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15장에는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곧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의 생명력을 잘 받아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무줄기와 가지의 관계와 같은 것인데, 사실 나무줄기와 가지는 ‘한 몸’이고, ‘한 살’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가지가 줄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가 그 다음에 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라고 표현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준 사랑이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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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동원 베드로 신부님]
옛 어른들이 ‘세 끼 밥은 먹으면서 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꾸짖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는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자신이 영혼의 양식을 잘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육체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밥은 먹으면서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육체의 허기는 잘 느끼지만 영혼의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체의 양식 못지않게 영혼의 양식을 먹지 못하면 공허감이나 애정 결핍이나 실망이나 분노와 같은 영혼의 굶주림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닥치는대로 먹어치우고 마셔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말로만 우리를 먹여 살리겠다고 하시지 않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빵으로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하는 신앙인은 생명의 빵을 먹으면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이란 영원이신 하느님께서 시간 안에서 사는 인간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나가 됨으로써 주시는 충만한 삶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5-56)
속담에 ‘먹으면서 정난다’는 말대로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며 나누는 행위는 생명을 유지할 뿐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내맡겨 드립니다. 또한 성찬례에서 빵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변화시키도록 내맡깁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고, 내가 그분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나와 하나가 되시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성체는 바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이며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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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아버지의 간절한 심정>
운전면허증을 갓 취득하고 한창 운전에 맛을 들이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면 운전을 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듯 그날,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때는 겨울인지라 눈이 소복이 쌓인 노면은 차가 다니기에 위험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막무가내로 아버지께 떼를 써서 자동차 키를 받아내려 했고,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우셨던지 아버지께서는 마침내 키를 내주셨습니다.
키를 받아냈다는 기쁨과 운전을 하는 즐거움도 잠시, 차가 그만 눈에 빠지게 되어 옴쭉달싹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 봐라! 아버지 말을 좀 들을 때는 들어야 할 것 아니니.”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식인종 취급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고 그분 말씀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알아듣지 못했으면 “진실로 진실로” 말씀하셨겠습니까?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뜻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확신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자세가 필요하고 아버지 말씀의 참 뜻을 헤아리며 행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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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가톨릭 교회가 그 주축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는 유럽의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분야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또 모든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큰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지요.
이렇게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왔고 또 앞으로도 끌어갈 그리스도교의 태동과 전개 과정을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서 접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시작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으며 또 얼마나 큰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야 했는지를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여실히 느낄 수가 있지요.
무기력하고 보잘 것 없던 사도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방대하고 거룩한 조직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었는지가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이야기되어 있고 오늘 독서를 통해서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대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초대 교회의 놀라운 열성과 성령의 섭리를 동시에 느낍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초대 교회를 세우고 죽음 앞에서, 또 그 어떤 위험 앞에서도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증언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환난을 특권이라고 생각하면서 박해 또한 기쁘게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노력 속에 초대 교회는 점점 자리를 잡아가지요. 요즈음 독서가 사도행전 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은 사도행전보다는 성령행전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사도들의 중심에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그 열심한 활동 뒤에, 그리고 그들의 역할 앞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의 부활 체험을 더욱 증폭시키시고 그들 활동에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지요. 우리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도들이 순리대로 해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이 기록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교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체험은 몇몇 개인의 체험으로 머물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자 노력할 때 그 체험은 더욱 깊어지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발걸음에 함께 했던 성령께서 풍요로운 결실을 이루어주시고 또 우리에게 깊은 체험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부활의 기쁨은 그것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 중의 한 사람인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에게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곳 저 곳을 다닌 필리포스에게 주님의 성령께서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주님의 천사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고 계시지요. 지금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은 필리포스가 아닙니다. 필리포스는 단지 도구이며, 복음을 전하고 결실을 맺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는 그저 성령께서 시키신 대로 움직일 뿐이지요.
필리포스는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놓았으며 성령은 그 결실을 풍요롭게 열매 맺어 주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우리가 이 부활의 기쁨을 성령의 풍요로운 열매로 연결시키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독서가 그 답을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을 우리 삶의 교과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내 언변이 부족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진하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언변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에 겁 많은 배반자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큼 뛰어난 언변과 지혜를 보여주지요. 바로 성령의 도구로 자신을 내놓는 순간 베드로는 놀라울 만큼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체험을 더 깊게 하는 바탕은 사도들이 그랬듯이 성령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 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원하시는 풍요로운 결실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요?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그리고 나를 도구로 쓰시도록 기도할 때 그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의지만 남고 인간적인 의지는 아주 작은 걸림돌에도 나를 넘어지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 앞서서 그를 주님께 봉헌하고, 또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뜻을 세웠다면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을 제가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시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도록 성령으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나를 성령의 도구로 내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선교를 하면 자존심을 다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선교를 하려다가 상처를 받고 오히려 본인의 신앙까지도 움츠려드는 안타까운 결과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 당신의 도구로 써 달라고 진실 되게 기도하고 자신을 내 맡기면 상처는 이미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좀 우습게 아는 것이 오히려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사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받는 박해를 그들의 특권으로 생각했듯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시련이 보람과 기쁨으로 느껴지는 것이지요.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쁨이 가득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고 상처를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려움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지요.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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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우리의 성탄절처럼 불교에서는 커다란 축일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호법사’라는 사찰이 본당 지역 내에 있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님 오신 날 축하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을 성당에 걸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호법사에서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찰과 성당의 교우들이 함께 ‘족구대회’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이웃 종교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서로 연대하면 좋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축하드리며, 부처님의 자비하심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는 정부의 코로나19 억제 대책에 협조하였습니다. 법회를 중단하였고, 부처님 오신 날에 있던 연등행사도 연기하였습니다. 종교 행사도 좋지만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입니다. 천주교도 정부의 코로나19 억제 대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사순시기를 미사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전례인 성삼일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도 영상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입니다. 내일부터 성모성월이 시작됩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5월에는 뉴욕에서도 모두가 함께하는 미사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1998년입니다. 22년 전입니다. 전주교구의 한 사제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오토바이를 몰던 대학생이 대학 등록금을 잃어버렸고, 찾으러 가던 길에 사고를 냈습니다. 신부님은 고등학교의 교장 신부로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나의 안구는 기증하여 누군가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장기는 의대생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화장해서 재는 나무에 뿌려주면 좋겠습니다.’ 후배 신부들은 구치소에 있는 학생이 나올 수 있도록 했고,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신부님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신부님 통장에는 300,000원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볼펜을 사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신부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신부님이 기증하신 안구는 누군가의 눈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저의 가슴에도 신부님은 따라야 할 사제로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성체성사’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멘’하며 받아 모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한 성인들은 신앙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저도 물리적인 시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미와 가치의 삶을 살아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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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먹어라>
요한 6,44-51 (생명의 빵)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나를 먹어라>
“나를 먹어라”
“나에게 먹혀라”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밥이신
그분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고 행하시는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밥을 먹는
나는 뭐라고
말하고 행하는가
“나를 먹어라”
“나에게 먹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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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분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하는 것도 ‘일’, 집에서 하는 것도 ‘일’, 성당에서 봉사하는 것도 ‘일’, 친구 만나는 것도 ‘일’입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꼭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직장은 우리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재정을 도와주는 곳이고, 가정은 사랑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성당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따라서 일이 아니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장소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나는 평생을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라고 말합니다.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놀이라고 생각하니 평생 발명에 몸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일’을 떠올리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쉬고 싶다.’ 아닐까요? 그러나 ‘놀이’를 떠올리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계속’이 아닐까요? 즉, 계속 놀고 싶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하는 것을 ‘일’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서 스스로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일보다는 놀이로 계속하고 싶은 무엇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것이 감사이고, 가정에서 하는 것이 사랑이며, 성당에서 하는 것이 행복임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냥 한 번 해도 충분할 것을 연속해서 말씀하시며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지만, 이스라엘에서 주식은 ‘빵’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반드시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을 단순히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이 필요가 채워지면 없어도 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일’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무조건 함께해야 할 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함께해야 할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십니다. 이를 위해 생명의 빵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관점을 채워줄 주님이 아니라, 당연히 함께해야 할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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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총 받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쇼핑을 많이 이용합니다. 저 역시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가는 것이 힘들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과 구매평 등을 꼼꼼하게 살피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하루 이틀 뒤에는 받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자리에 없어도 상품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 줍니다. 한 번은 늦은 시간에 택배가 온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외부 강의로 자리에 없었고, 또 직원도 퇴근한 시간이라서, 이 사정을 택배 기사님께 문자로 넣었습니다.
곧바로 다음 날 아침에 배송하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냥 성지 문 앞에 두고 가도 될 것을 왜 다음 날 배송하겠다고 할까요? 혹시라도 모를 분실 위험 때문입니다. 배달하는 물건 모두 귀하게 여기기에 안전하게 배송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 은총의 가치는 인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이렇게 귀한 은총을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질까요? 아닙니다. 귀한 은총이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전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밖으로 싸다녀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닌 내가 직접 받아야 하기에,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도 않으면서 은총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이니 우리 앞에 와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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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여정>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의 삶-
오늘도 어제처럼 강론 주제를 “구원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때로는 단순한 말마디가 치유의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 마침 어느 지인으로부터 ‘구원의 여정’이란 제목으로부터 위로와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제가 자주 피정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남편은, 아내는, 자녀는, 여러분 자신은 선물입니까 혹은 짐입니까?” 물으면 대부분 망설이다 선물이라 대답하기도 하고 짐이라 대답하기도 합니다.
사실 살아갈수록 무거워지는 삶의 짐에, 삶의 무게에 힘들어 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렸을 때는 몸이 에너지 덩어리와 같아 하루종일 놀아도 지치지 않는 몸이 그대로 선물처럼 느껴졌지만 나이들며 무거워지는 몸과 마음은 그대로 짐처러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에 관계 없이 정말 구원의 여정에 충실한 신자들에게는 삶은 선물이란 자각과 더불어 삶의 무게도 가벼워짐을 느낄 것입니다. 고백성사중 가장 많이 써드리는 다음 말씀 처방전대로 살아간다면 구원의 여정은 그대로 선물의 삶이 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이 말씀을 가훈으로, 또는 좌우명으로 삼은 이들을 자주 만나곤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구원의 여정입니다. 구원의 여정에 함께 하는 도반들에 대해 연민이나 고마운 마음의 동지애同志愛가 들 때 또 짐을 나눌 때 삶의 무게는 선물처럼 가볍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어제 읽은 “무게(백무산)”란 시도 생각납니다.
“시내버스에 앉아 졸고 있으려니
차가 기우뚱 쏠리면서 서서 졸던
살찐 사람의 무게가 사정없이 내 가슴을 밀어붙인다
그 당황한 무게의 여운이 얼룩처럼
몸에 남는다 연민처럼 번진다
모든 절박한 것은 무게다
슬픔의 모든 것은 무게에서 배어나온다
견디기만 해왔던 무게
들어내려고만 해왔던 그 무게에서
언제나 허덕여온 무게
벗어버리고 싶던 짐짝
초월을 꿈꾸던 중력
나의 배후에 수줍게 실려 있던 그 무게
그런데 이렇게 쾌활한 무게라니
묵직하게 실리는 무게의 실감이여
긍정적인 무게라니
나를 덜어내는 무게라니”-
연민과 더불어 무게의 짐이 선물이 된 깨달음의 놀라운 기쁨을 고백한 시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더불어 구원의 여정에 주님과 함께 할 때 은총의 선물처럼, 쾌활한 무게, 긍정적인 무게, 나를 덜어내는 무게를 느끼게 되고 삶은 홀가분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고 기도할 때 삶은 선물이지만. 사랑과 기도가 사라지면 삶은 무거운 짐이 되어버립니다.
엊그제 연로한 두 분이 일년 만에 고마운 분의 차량봉사 도움으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도움이 있었기에 무겁고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마운 도반이 되어준 자매와 주고 받은 덕담이 생각납니다.
-“자매님들 모셔다 드리고 집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자매님들께서 신부님을 뵙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고 자연힐링을 하고 하고 가신다며 행복해 하셨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자매님! 오늘 주님의 천사, 주님의 성녀로 잘 사셨고 늘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자연힐링 참 좋은 말마디입니다. 구원의 여정중에 얼마나 절실히 갈망하는 힐링의 치유인지요. 파스카의 주님 자체가 힐링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집인 수도원은 힐링센터요, 영육의 치유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힐링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역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주님의 천사의 지시에 따라 에티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를 방문하여 도반이 되어준 필리포스가 내시에게는 주님의 천사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같고 성령의 심부름꾼 같은 필리포스가 참 매력적입니다.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이르시자 본격적 개입이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던 내시와의 만남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 의 예수님 말씀이 실증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산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생명의 빵,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이요, 이 생명의 빵을 모시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구원의 여정중에 있는 사도행전의 필리포스나 칸타케의 내시,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삼위일체 하느님안에 있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자 예수님께 보내 주셨고 성령의 은총으로 성서말씀을 깊이 깨달아 가면서 주님과의 일치도 깊어질 것이며 더불어 무거운 삶의 짐도 가벼워질 것입니다. 새삼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성경공부가 구원의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천사의 사람이자 성령의 사람, 필리포스의 구원여정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이는지 참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삶의 짐은 완전히 삶의 선물로 변한 듯 참 경쾌해 보입니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십니다.
성령따라 집착없이 살아가는 참 자유인 필리포스는 구원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의 롤모델이 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는 필리포스를 통해 일하듯이 역시 오늘의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구원의 여정중에 참 좋은 도반 필리포스를 만나 세례까지 받은 칸타케의 내시는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갑니다. 구원의 여정중에 참 아름다운 만남이자 아름다운 떠남입니다. 필리포스는 물론 내시의 몸과 마음도, 삶의 짐의 무게도 많이 가벼워 졌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동시대 함께 하는 모든 이들 역시 넓은 의미에서 도반들입니다. 어제 이천 물류 창고 화재 대참사로 38명이 사망했습니다. 화재 당시 이곳에는 9개 업체, 78명이 근무중이었고 사망자는 추가로 늘어달 가능성이 있다 합니다. 참 가슴 답답하고 먹먹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구원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의 참 좋은 영원한 도반이 되어주시고, 뜻밖의 이천 화재 대참사로 죽음을 당한 분들에게는 자비를, 유가족들에게는 위로와 힘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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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은 선물>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여 졌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 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짐에서 자유로울 때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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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말씀이 점층적으로 강도를 더해갑니다. 당신은,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만나와 비길 수 없는 "생명의 빵"이시라는 말씀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시니 군중을 당혹스럽게 만드십니다.
게다가 "살"은 인간 조건을 가리키는 참으로 실제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지요.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살"은, '가능성과 나약성을 포함해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빵으로, 양식으로 세상에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방식입니다. 혹자는 식인을 떠올릴만큼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미친 소리쯤으로 냉소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제1독서는 필리포스의 선교 대목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사도 8,27-28)
천사의 안내로 필리포스가 만난 사람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사람 내시로 왕궁의 고관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경배나, 여행 중간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 신앙을 받아들여 독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사도 8,33)
하느님께서 그의 실존을 건드리는 말씀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후손"은 말씀 속 '주님의 종'에게서도, 내시인 그에게서도 박탈된 하느님의 축복이지요.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미련을 갖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내시의 마음속에 의문을 일으키시고 답을 일러 줄 필리포스를 보내신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흔히 생명과 후손을 결부시켜 생각하면 자손을 위한 인간의 생식 기능을 떠올릴 겁니다. 이 차원에서는 주님의 종이 가리키는 예수님이나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육신적 "생명"은 끝났지만, 그분이 남긴 "살"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후손"들이 온 세상 모든 민족 안에서 이어져갈 것임을 설명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부활 사건으로 이제 생명과 후손의 개념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것이지요.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
말씀에서 위로를 얻은 내시는 자청해 세례를 받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기쁨은, 생명과 후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으로 배가됩니다. 이후 성경은 더 이상 그를 언급하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전율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살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받아모시는 주님의 몸이 나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자기 증여이고, 살을 베어 먹일 만큼의 사랑의 결정체라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코로나19 사태로 미사 참례가 제한되어 성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가는 이 시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그 님의 살(몸)을 향한 이 허기와 갈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들 느끼실 겁니다. 이 결핍이 우리의 실존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더 깊은 일치에로 이끄시니 감사합시다. 우리가 초대받은 생명은 일시적이지도 한시적이지도 않고, 선착순이나 인원 제한이 없는 "영원함"이니 인내로이 기다리며 사랑을 깊여 갑시다. 믿음을 굳히고 희망을 키우며 나아갑시다.
"잔인한 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썪은 나무 뿌리에서 새싹이 돋음을 보았으니, "생명의 달" 오월은 성모님과 함께 이 생명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제일 좋은 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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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희망과 기쁨의 원천은 하느님의 현존에서 온다.
로랑 수사의 단순함과 조화와 힘은 그의 말없는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숨쉬었으므로, 하느님을 숨쉬었다.
“오래 전부터 영원하신 하느님만을 묵상한 나머지 그 자신도 그분처럼 영원해졌다.”(행장 17)고 보포르는 말한다.
그의 시선은 이미 자기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도처에서 발견하는 기쁨으로 빛났다. 믿음과 체험이 한데 어우러져 그로 하여금 이 단일한 비전을 갖게 했으니,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기대 이상이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반영이고 반향이었으므로, 아주 사소한 사물들도 비밀한 전언을 감추고 있는 만남의 터전이었다.
-「하느님의 현존 연습」-중에서
♣로랑의 가장 심오한 증언은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의 삶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는 그처럼 충만하고 행복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일 터이다. 파리에 나자렛을 조금 옮겨오기만 한다면 말이다! 저 마을의 목수와 그의 아내는 단지 잘 듣고 ‘예’ 라고 순종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께서 그토록 인간들 가까이, 영원히 계시고자 한다는 것을, 믿기 힘든 기적을 제 눈으로 보게 되지 않았던가!(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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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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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1코린 15,21)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꼬무작거리며 활동하고 있는 생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빵”은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인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살리는 빵”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인 것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 이 어리석음의 완고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먹히는 빵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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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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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마리아 수녀님의 아침 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O6a9CAZTq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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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생명의 빵을
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생명의 빵을 봅니다.
당신의
고통과 희생으로
우리의 죄와 고통을
없애 주십니다.
고통과 희생의
살아계신
생명의 빵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생명의 빵은
믿음의 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시 살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강력한
믿음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말씀이 있고
가르침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빵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살과 피로
생명이 생명을
끌어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은
죽지 않고서는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음을
말씀과 믿음으로
가르쳐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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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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