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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샬 롬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계 2:12-17)
[역사적 배경]
버가모는 에게해 해안에서 26km쯤 떨어져 있고 무시아의 남단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버가모는 아시아 지역의 로마의 수도라고 할 만큼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요, 노천극장 병원 경기장 그리고 제우스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주께서 그곳을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2:13)이라고 하실 만큼 정치의 세력이 종교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황제숭배나 제우스신 숭배 등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았고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버가모는 “견고한 요새지”라는 그 이름과도 같이 박해 가운데도 굳건하게 믿음의 순결이 지켜졌지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침투함으로 급격히 상실하게 되었고 교회는 세속과 타협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하늘의 신령한 만나도 변화된 삶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셨고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계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2-17)
버가모란 “견고한 요새지”라는 뜻인데 그 이름과도 같이 박해 가운데도 굳건하게 믿음을 지켰지만, 어느 때부턴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침투함으로 세상과 짝하는 길을 걸으면서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은혜로운 하늘의 만나도 찾아볼 수 없고 성도들 역시 변화된 사람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타락이 이처럼 두렵습니다. 진리가 타락하면 다 타락하고 맙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후3:3-4에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랬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신앙의 세속화였습니다.
14절에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했는데 발람의 교훈이란 당시 버가모 교회에 침투한 니골라당이 추종한 교훈을 가리킵니다.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인 니골라가 타락했다는 설이 있는데 니골라당은 그 주장하는 바가 발람의 교훈과 같았습니다.
민수기 22장-25장을 보면 발람이 모압 왕 발락의 재물에 눈이 어두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인계와 우상으로 시험에 빠뜨린 자입니다. 이처럼 니골라당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예수 피의 영원한 속죄를 오해하여 어떤 행위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폴리투스나 유세비우스 같은 학자들은 니골라당이 당시 영지주의에 빠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영지주의는 육신의 죄가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원론입니다. 이처럼 버가모 교회는 밖으로 세속의 물결과 안으로는 복음의 오해로 급속히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하셨지 범죄의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자유를 범죄의 자유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연약함으로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방종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는 짐짓죄는 용서 받지 못할 죄입니다(히10:26-27). 예수 공로로 우리 죄과는 물론 죄악까지 못 박으셔서 여기에 거룩하게 사는 비밀이 있다고 외쳐야 할 자들이 범죄의 자유를 외치다니 어떻게 그런 발상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러한 교회에 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셨고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란 무엇일까요?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육신의 양식이었을 뿐 아니라(출 16장), 영생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요6:48-51, 요5:39, 고후4:16), 우리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마6:11). 만나가 꿀 섞은 과자 같다 했듯이 감추인 만나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만나가 감춰진다는 것은 비극입니다(암8:11-13). 그래도 고상한 지식으로 전하면 그것이 양식인 줄 착각하지만 진정한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딤전5:6에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했습니다. 카토릭 교회가 왜 은혜가 없습니까? 진리가 없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을 보거나 이적이라도 나타나는 날에는 희귀한 것을 보는 것처럼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게 일상인데 그들에게는 그것이 희귀합니다. 자유주의 교단에 소속되어 있지만 신앙은 보수를 추종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점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세속이 틈타면 감추인 만나가 될 수밖에 없듯이, 계시록도 세속적 사고로 보기 때문에 해석되지 않고 감추인 만나처럼 된 것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리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좌우에 날선 검은 진리의 예리함과 명확함을 가리킵니다(히4:12).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버가모 교회의 상태가 이단이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예리한 칼날이 짐승의 더러운 것을 제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속적인 것들을 잘라내야 하는데 세속을 옹호하고 있으니 되겠습니까? 죄인은 용납해도 죄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이비 이단이 우후죽순처럼 난무한 것도 하나님께서 어쩌면 예리하지 못한 우리를 치시는 채찍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속히 깨달을 수록 좋습니다.
2. 정통신학에 서야 합니다.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안디바(안티파스, Antipas)는 황제숭배를 거절하다가 화형을 당한 버가모 교회의 위대한 감독인데 주님은 안디바를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시면서 내 이름을 굳게 잡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안디바가 발람과 니골라당처럼 두루뭉실한 교리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부정할 수 없다고 끝까지 믿음 지키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물려준 정통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얻으려면 정통신앙에 서야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말씀에서 인간의 편집이나 작품이 아닌 완전한 영감설을 느끼게 합니다. 성경의 한 자 한 획까지도 성령이 감동하신 것으로 믿어야 성경이 열립니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비밀입니다.
3. 복음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14-15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의 교훈과 같은 니골라의 교훈에 빠진 것은 성경을 깊이 몰랐기 때문입니다(딤후2:10).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란 자녀 되고 용서 받는 수준을 넘어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칭의 성화 영화 승리 권능 천국까지도 포함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성령으로 누리는 것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를 그토록 말하고 주장하면서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누리는 사람이 많지 않고 누릴 줄도 모릅니다. 성화 영화는 고사하고 칭의의 확신조차 없어 양심의 평안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한 분 모시면 그 안에서 수 백, 수 천 가지가 달라지는 그 복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곧 복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해처럼 밝게 사시기 바랍니다.
4. 삶에서 입증된 진리여야 합니다.
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지키는 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켜보니 어떻더냐? 술 담배 제사까지 허용하는 카토릭 다녀보니 어떻더냐? 편리한 듯해도 세상 사람이나 다름이 없지 않던가요? 은혜가 있던가요? 기쁨이 있던가요? 혹은 교회 출석도 않고 영상예배만 드려보니 어떻더냐? 영혼의 만족이 있던가요? 그건 간식이지 주식이 아닙니다. 그걸 왜 깨닫지 못하는지, 찬양의 시간에 세상가수가 나와 노래하니 성령의 은혜는 사라지고 세속의 영이 지배하던데 그걸 왜 느끼지 못하는지,,, 이단설로는 영적인 어둠과 환난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사8:20-22).
지식에 그치는 복음이라면 그 역시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는 나의 주로 부른다면 마음의 좌소에서 나와 세상을 몰아내고 예수를 중심에 모시고 높이고 순종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모시는 일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나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완료형 교리만 되풀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모셨다면 그 진리에 서서 감사하거나 누리거나 악의 세력에 맞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적 생활에서 승리하려면 적용까지도 알게 하는 예리한 검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럼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은 무엇일까요?
1. 새 이름은 새 사람입니다.
7절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2:12-17) 예리한 검을 가질 때 약속하신 두 번째 약속으로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인데 먼저 본문 자체에서 주는 힌트가 있습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성경에서 이름은 실체와 동등한 개념이므로 새 이름이란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 여화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쉽게 풀립니다. 새 이름에 대한 성경 밖의 호기심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흰 돌은 새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자체 힌트는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나 밖에는 모르는 것은 마음입니다(잠30:20). 다른 말로 양심을 가리킵니다. 새 양심이니까, 새 마음, 새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답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2. 흰 돌은 새 양심입니다.
성경의 용례로서 살펴보면 성경에서 흰 돌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제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제사장의 가슴의 에봇 속에 있던 우림과 둠밈 중 하나가 흰 돌입니다. 우림은 '빛들'이란 뜻이고 둠밈은 '완전함'이란 뜻인데 둘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응답을 상징하는 돌입니다. 이 판결흉패에 있는 두 돌은 Yes, No의 기능입니다. 이처럼 우리 가슴에도 판결의 흉패가 있습니다. 새로워진 양심은 하나님의 뜻일 때는 기뻐하며 밝게 빛나지만 뜻이 아닐 때는 마음을 굳게 닫고 어둡게 침묵합니다. 성경으로 접근해 봐도 흰 돌은 역시 새 양심,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른 말씀만이 새 양심, 새 사람을 만든다는 교훈입니다(고후5:17, 벧전1:23).
양심과 지식의 관계로 봐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양심을 부패하게 하고, 부패한 양심은 옛 사람을 의미합니다(딤전1:19).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성도들의 마음을 버려놓았습니다. 이것을 바로잡을 방법은 바른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일러준 말로 가지를 제거하듯이 깨끗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요15:2-3). 딤후3:8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한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원리로 봐도 흰 돌의 새 이름은 새 양심, 새 사람입니다. 바른 말씀만이 바른 양심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흰 돌에 쓴 새 이름은 새 양심 새 사람입니다. 이처럼 바른 말씀에 돌아올 때 그 말씀이 영혼의 만나가 되고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바른 진리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거짓을 알아야 합니다.
13절 “네가 어디에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 한 것처럼 버가모 교회는 주변 상황이 너무나 악했습니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아에스쿨라피우스, 아테네, 디오니소스를 주된 신으로 섬겼는데 그 중 특히 뱀을 상징하는 아에스쿨라피우스를 많이 섬겼습니다. 내부적으로는 발람과 나골라 등의 거짓 사상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주변 환경 뿐 아니라 거짓이 바로 사탄의 권좌이기도 합니다. 반면 진리가 있어야 하나님을 모십니다. 요이1:9에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교종교학 이단학 철학사상 등으로 상대도 잘 알아야 합니다.
2.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12절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상대를 아는 것도 좋지만, 버가모 교회의 감독 안디바처럼 사도들이 물려준 정통신앙을 아는 것입니다. 참 진리에 서면 거짓된 것들이 밝히 보일 뿐 아니라 퍼지는 것을 예방하고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송이나 유튜브 등에서 진리를 벗어난 불건전한 지식들이 너무나 많이 퍼져 나가고 있는데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3. 참의 실재를 누려야 합니다.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받는 자는 안다고 했듯이 바른 진리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진리가 부정확하거나 이설이라면 적용도 안 되고 누려지지도 않습니다(사8:20). 그 열매로서 나무를 압니다. 가령 '기도하지 마라. 해도 묵상만해라. 헌금하지 마라. 교회출석 안해도 된다. 자연에 나가서 주일지켜라. 목사가 필요 없다. 다른 예수를 믿어라. 다른 하나님을 믿어라...' 이 따위 사이비 이설을 따르다가는 내 신앙이 엉망이 되고 교회 역시 엉망이 되고 선교사역 역시 중단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좋은 열매를 맺고 충분히 누려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서 참된 은혜를 누릴 때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알지 못하던 옛날 천국에 반역사건이 있었습니다. 루시퍼 천사장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루시퍼의 그럴 듯한 말에 속아 많은 천사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복된 은혜 속에 살아갈지라도 거짓을 허용하면 우리의 믿음은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예리한 말씀이 없으면 이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도 이단이지만 우리 마음의 육의 생각부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성령의 도우심으로 열심히 말씀공부해서 감추었던 만나도 먹고 그 진리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흰 돌도 받아 더욱 아름답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