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칠천량해전 대패의 비보를 접한것은 이틀이 지난 1597년 7월18일 새벽이
었다.
원균의 대패에 가장 난감해야 할 사람은 통제사 원균에게 곤장을 때리며 부산출동을 지시한 도원수 권율이었다.
그도 칠천량 해전 대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권율은 답답한 마음에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찾아가지만 이순신도 당장 뾰족한수가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백의종군인 신분인 이순신에게 권율이 더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이순신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였다.
말하자면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 기개와 자신감은 여전했다.
이순신은 권율과 면담이 끝난후 곧바로 출발하여 아홉명의 참모와 약간의 군사를 동반한 현장 조사 길이었다.
계속 행군을 강행하여 삼가, 단성, 강정, 곤양, 노량진,등지를 답사하고 여러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에서 도주한 배설의 12척의 판옥선이 노량진에 있었다.
그러던 8월3일 조정에서 이순신을 3도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하면서 선조는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한것은 자신의 불찰이고 칠천량해전 패배에 대해 무슨 할말이 있느냐며 조정의 다급한 심정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름만 3도수군 통제사일뿐 그 휘하에는 9명의 군관과 군사밖에 없었고 판옥선은 거의 사라진 뒤였다.
이순신은 배설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자격으로 12척의 전선을 인수하고 난리통에 군사를 모으고 관고를 뒤져 식량과 무기를 모았다.
여기서 이순신의 행보를 말하면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이순신이 그 긴거리를 주파하면서 일본의 좌군과 거의 맞닥뜨릴 뻔했다는것이다.
옥포해전에서 패한 도도 다카도라, 한산해전에서 패한 와키자카, 당포해전에서 패한 구루시마의 아우 구루시마 미치후사등등..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수군 장수들이 이순신의 뒤를 쫒았다.
다행이 이순신이 두치, 구례 등지를 떠나자 일본의 수군이 하루이틀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바로치고 들어왔다.
참으로 이순신에게는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계속된 행군에 마침내 이순신은 회령포에서 함선과 군사를 이끌고 어진으로 진을 옮겼다가 다시 8월 24일 어란으로 옮겼다.
이순신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땅에 떨어진 사기를 조선 수군의 위세를 높이는 것이었다.
이때 이순신이 회령포에서 어진을 거쳐 어란으로 진을 옮긴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순신이 어진을 떠난 것은 8월24일인데 불과 이틀후인 8월26일, 그곳 어진에 일본 수군이 도착한 것이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순신은 어란에서 다시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한것은 8월29일이었다.
진도의 서북쪽에 있는 벽파진은 명량(울돌목)의 좁은 해협을 등지고 있었다.
전라도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한산도를 전진 기지로 삼았던 이순신은 이번엔 서해를 사수하기 위해 벽파진을 선택했던 것이다.
적이 벽파진을 뚫고 명량해협을 통과하면 바로 서해였고 서해로 일본수군이 진출하면 바로 한강으로 연결되어 한양까지 진격하는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순신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했지만 그 규모가 너무 미약하여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 휘하에서 육전에 종군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가 담겨있는 장개를 올리게 된다.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오히려 할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수군을 폐지한다면 적들은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
니다.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고 살
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장개로 수군의 명맥은 유지되게 된다.
선조의 지시는 어찌 보면 이순신의 어려운 입장을 배려한 측면도 있다.
이순신은 선조의 지시대로 육지로 올라가 목숨을 구하면 되는데 하지만 그것을 일축해 버렸다.
이순신은 그의 장기인 수전으로 죽든 살든 끝장을 보자는 것이었다.
전세는 이미 일본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일본의 좌군이 남원성을 점령한것은 8월16일 이었다.
그리고 전주성이 일본의 좌,우군의 수중에 떨어진것은 8월25일이었다.
이순신이 벽파진에 진을 친 8월29일 일본의 좌군은 전라도 지역을 완전 장악하기 위해 남하했고 우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 중이었다.
이순신은 이 시기에 감기와 심한 병을 앓기도 했다.
왜냐하면 조선수군은 꼭 이기는 전투를 해야했고 이순신은 이길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만한 장소를 찾기란 이순신에겐 너무 힘들었고 엄청난 압박이었을것이다.
말그대로 모든게 최악이었다.
이순신은 좁은 명량해협이 일으키는 거센 물살속에 자신의 운명과 조선의 운명을 실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해협을 이용한 전투도 문제는 있었다. 명량해협이 뚫리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점, 더 이상 일본 수군을 방어할 지점이 없다는 점이다.
이순신은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진을 옮기고 부하들에게 최후의 연설을 한다.
이번 전투에서 그냥 죽자는 것이었다.
아예 살려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비장하다 못해 너무 비극적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 이었던 것이다.
저는 이부분이 가장 감명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순신장군. 알면 알수록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했지만 그 규모가 너무 미약하여 수군을 폐지하고 권율 휘하에서 육전에 종군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가 담겨있는 장개를 올리게 된다.
'지금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오히려 할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 수군을 폐지한다면 적들은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
니다. 그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고 살
아 있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