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무도회장
金宇鐘
소설사에서 유진오(兪鎭午, 1906~1987)는 30년대의 주요 작가로 되어 있지만 해방 후 그는 문단을 떠났다. 법학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초안을 작성하고 고려대학교 총장으로도 명성이 높아지면서 소설가 유진오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양귀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그녀의 명성에 깔려서 황제 현종은 유명도가 낮아진 편이다. 아내가 유명해지면 남편은 흔히 누구의 남편으로만 기억된다.
그런데 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에서 김강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지식계급이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는 이중 삼중 아니 칠중 팔중의 중첩된 인격을 갖도록 강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많은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정말 자기의 인격인지는 남 모르게 저 혼자만 알고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것은 일제 때 유진오의 자화상에 가깝다. 김강사는 도쿄제대 출신이고 졸업 후 좌익문학운동에도 가담했다. 유진오는 경성제대 출신이고 그도 잠시 좌익 단체에 가담한 일이 있다.
김만필 강사는 자신이 멸시하던 N교수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한다. 그래서 s전문학교 강사가 되어 일본군 장교와 함께 단상에 올라가 학생들에게 소개되는데 눈이 핑핑 돌고 다리가 우둘 우둘 떨린다. 옆의 일본장교의 군도와 호령소리 때문이다.
경성제대에서 법학도로서 소설도 잘 써서 내 문학사에 이름이 오르고 해방 후 경력도 화려하지만 그 소설이 그의 자화상이라면 그는 가엾은 지식인이다. 깊은 학문과 사상과 인격의 지식인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유진오가 누린 그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허상이기 때문이다. 가면의 얼굴은 유지오가 아니다. 그는 자기 신념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지 못했다면 가엾은 허수아비 인생이다.
소설 속의 김강사가 허수아비가 된 것은 그가 경멸하는 N교수를 찾아가며 세상과 타협할 때부터이고 그 전에는 때묻지 않은 참신한 인류대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았다면 일제 때도 감옥에 갔을 것이고 해방 후에도 매 맞고 전향서를 쓰고 보도연맹에 가입해 있다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대전 골령골) 같은 곳에 묻혔든지 아니면 월북 후 숙청당했을 것이다. 좌익이든 아니든 신념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이 살 수 있는 곳은 한반도에는 없다.
유진오가 소설 쓸 때 정지용은 시를 쓰고 있다가 해방 후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빨갱이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좌익 문인들과도 친했고 특히 친하던 이태준이 월북한 것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일제 때 좌익문학의 반대편에 있던 대표적인을 문인이다. 1939년에 ‘문장’을 발행하며 이를 이끌어나가게 되었을 때 이태준은 그 동안 카프에게 억눌리던 설움을 여기에 기록했다. 그 때도 그랬고 해방 후에도 그는 빨갱이가 아니었다. 이태준이 월북한 것은 해방 후 친일파들이 설치는 더러운 세상에서 지식인의 양심으로는 살기 힘들어 다른 곳을 찾아 갔을 뿐인데 거기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정지용은 ‘이태준 돌아오라“하며 큰 소리로 북쪽 하늘을 향해 외쳤다. 타블로이트판의 큰 신문 첫면 전체를 기록했던 이 기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며 자기는 빠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라고 강요당했었을 것이다.
그는 보도연맹 명단에 있었기 때문에 수원 남쪽에 있었으면 총살당했을 것이다. 6.25 때는 임화가 인민군 고급장교가 되어서 나타났던 문협 사무실에도 나갔었지만 사무실밖 계단에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9.28 수복때 좌우 어느쪽에 의해서든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렇게 맑은 시인은 갈 곳이 없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일가분 현민 유진오박사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우종 펼론가는 한국평론계의 대표적인 분이십니다.
일생을 윤동주 연구에 횜을 쓰셨지요.
저와는 윤동주 서거 70주년 추모 모임 행사에 직접 일본 후쿠시마에 다녀왔습니;다.
젊은 시절에 충대에 근무해서 대전문인들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지금은 90이 넘으신 분이 계간 <창작 산맥>을 발행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