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부산시협 세미나
미학적 가상과 상상적 가상
-헤겔의 미적 가상 비판과 아도르노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박사)
I. 로그인
풍경이 더 아름다울까, 아니면 그림이 더 아름다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풍경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제시하고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제안하면, 당혹감이 찾아들 것이다. 우리의 선입견은 풍경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림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근거의 노릇을 하고 있다. 예) 플라톤에 따르면,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그림은 현실의 모방이다. 현실은 이데아보다 열등하며, 그림은 현실보다 더 열등하다. -플라톤의 예술배격론
플라톤 이래로 ‘미메시스’는 서양 예술론의 중심이론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연보다 열등한 예술을 창조하려는 인간의 이상한 열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근대에 이르러 예술작품이 가지는 고유의 형식미를 강조하는 헤겔과 칸트의 정연한 이론적 성과에 맞닥뜨리게 되자 모방론을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미적 가상, 미적 진보, 미적 취향, 미적 의무
1. 개념 정의
미적 가상이란 일차적으로 예술을 말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일종이다. 이에 따라 예술은 미적 가상이라 일컬어진다.
2. 진리이면서 허위
예술은 현실세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참된 세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 진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참된 세계를 가상 속에서만 꿈꾼다는 점에서 – 허위
예) 신데렐라의 행복
-우리가 바라는 참된 행복이지만 결코 그런 행복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허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진리로서의 예술과 허위로서의 예술
1) 진리로서의 예술 –헤겔
인간정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자연보다 인공미 즉 예술미를 더 아름답다고 봄.
어지럽게 늘브러져 있는 천연 그대로의 자연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가공된 미적 가상이 더 아름답다고 봄.
인위적 행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무의식은 헤겔에서 유래한다. 헤겔은 플라톤과는 정반대로 자연을 오히려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한다. 인위적 노력으로 자연을 가공할 때 자연은 발전하고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림은 인위적 행위가 개입된 창작물로서 본래의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예) 그림 같은 풍경
풍경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는, 즉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 아름답다는 우리의 무의식적 판단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인공미로 탄생하는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참된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
2) 허위로서의 예술 –현대 예술가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현대예술은 예술이 무언가 진리를 담고 있으리라는 우리의 기존 상식, 즉 헤겔이 주장하는 진리로서의 예술관을 철저히 파괴한다. 사용하던 변기를 갖다놓고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며,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모습으로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며 예술이라 주장한다. 미적 가상은 말 그대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이처럼 무모하게 진리를 담고 있다고 추겨세워지는 가상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다.
4. 아도르노의 예술론
1) 미적 가상의 이중적 의미를 해명
-미적 가상을 참된 진리라 보는 헤겔을 비판, 반면 미적 가상을 허위라 보는 현대예술가들을 비판
-예술의 진리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헤겔을 비판
(헤겔이 묘사하는 진리로서의 예술은 실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거친 자연의 모습 가운데 아름다운 부분을 인위적으로 발췌하고 재구성해 표현한 풍경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위의 모습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행복은 현실 속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도르노가 예술의 허위적 측면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분명 허위를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없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있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해설) 즉 완벽하게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며, 신데렐라의 행복 또한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헤겔 예술론의 문제점
-예술을 통한 진리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통한 진리 구현이 이미 완료되었다고 파악한 점에 있다.
2) 아도르노의 예술론 –비판정신을 동반한 예술론
헤겔이 묘사하는 예술은 세계를 긍정하고 세계와 타협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헤겔처럼 세계를 긍정하는 예술은 현실의 모습을 부질없이 미화할 뿐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실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서만 발견된다. 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음으로써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지 않고 현실의 극복을 주장한다.
5. 아도르노의 현대 예술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예술은 스스로 추해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보충한다면 그것은 기만이 된다. 이 세계는 지금 '동일성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예술은 사회의 타자로 남기 위해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끝없는 탈주.
그래서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미적 진보’에 참여하지 않고 과거의 형식 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미적으로만 퇴행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반동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매번 새로운 것을 평균적 코드로 규준화해서 대중에게 제공해버린다는 점에서, 계속 새롭다는게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결국 새로운 방식도 익숙한 형식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또한 예술이 끝없는 탈주를 하게 되면 남아있는 대중은 누가 위로하는가. 예술마저도 화해를 꿈꾸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을까.
여기서 아도르노는 화해의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진실하려면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화해적이고 적대적이며 분열된 파편들의 모습으로 드러내야 한다. 다른 한편 그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인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만 한다.] [예술은 현실의 단편을 받아들이고, 이 단편들을 별자리처럼 구성함으로써 거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예술 속에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탄핵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가 서로 결합된다. 단편들의 별자리가 폭발할 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꽃처럼 순간적, 찰나적으로 나타난다.]
II. 로그아웃
-악마가 되지 않는 길은 예술에 있다.
여기서 바로 예술은 단지 미적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된다.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비판이 필요하다. 사회적 비판 기능은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필수적이다.
아도르노는 이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실마리를 인문학과 예술에서 찾았다.
<세상을 바꾼 질문>의 저자 권재원은 아도르노의 생각을 이렇게 풀어놨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 곳곳에서 그 의미를 따져 묻고 다른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사실 인문학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인문학 지식은 실용적으로는, 즉 도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하는 과정에서 몸에 배기 마련인 의미를 따져 묻는 성찰과 탐구의 자세다. 이렇게 의미를 따져 묻고 성찰하는 자세가 이미 도구적 이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객관적 이성의 참모습인 것이다.
예술은 경험을 크게 확장시키고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길러 준다. 아우슈비츠에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사람은 가스실 안의 풍경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예술은 현재 보이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다. 예술적 소양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대한다. 모든 사람은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잔혹해지기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