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감녕(甘寧)이라는 장수가 황조의 수하에 있다가 오나라에 귀순했다. 감녕은 자를 흥패(興霸)라 하고 원래 익주의 파군(巴郡) 임공(臨江) 현 사람이었다. 젊어서 기가 세고 힘이 있어 유협(遊俠) 행세하기를 좋아했으며 경박한 소년배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두목이 되었다. 여러 무리가 그를 따르며 활과 쇠뇌를 지니고 갑주를 깃털로 꾸미고 방울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백성들은 방울소리만 들어도 즉시 그것이 감녕인 줄을 알았다.
감녕은 사람들과 만날 때 성의 현장이나 관리들이라 할지라도 접대가 융숭하면 바로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즉시 수하 장수들을 풀어 그들의 재화를 약탈했다. 현장이나 관리들 중에는 관할 구역 내에서 도적들에게 해를 당하거나 빚을 진 자들도 있었다. 감녕은 이십여 년 간 이렇게 살다가 문득 개과천선하기로 결심하고 이후로 남을 공격하고 겁주는 일을 그만두었으며 제법 제자백가를 읽었다.
감녕은 익주에서 조위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형주로 도망쳤다. 감녕은 유표에게 의탁하고자 남양에 가서 거주했으나 그에게 임용되지는 못했다. 유학자인 유표가 도적 출신인 감녕을 기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감녕은 다시 황조에게 가 의탁했으나 황조 역시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만 대접했다. 감녕은 결국 오에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이 모두 그를 천거했다. 손권은 특별히 그에게 옛 부하와 동등한 대우를 해 주었다. 감녕이 손권을 만나 자신의 계책을 진술했다.
“지금 한나라는 날이 갈수록 운수가 쇠미해지고 조조는 더욱 교만해져 종국에는 제위를 찬탈하는 도적이 될 것입니다. 남쪽 형주 땅은 산세가 평탄하고 강과 하전의 흐름이 원활하니 진실로 국가 서쪽의 일대 세력입니다.
저 감녕이 이미 유표를 관찰해 보았는데 그 생각이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자식들 또한 열등해 그의 기업을 물려받아 계승할 능력이 없습니다. 지존(至尊)께서는 마땅히 급히 형주를 도모할 계책을 내되 조조보다 한 발 늦어서는 안 됩니다.
유표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의당 먼저 황조를 쳐야 합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해 정신이 이미 몹시 흐릿하고 혼미하며 재물과 식량이 다 부족합니다. 그의 측근들은 그를 속이고 농간을 부려 재화와 이익을 구하는 일에만 열심이고 수하 관리들과 병사들의 권익을 침탈하고 있어 병사들은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습니다. 선박이며 전쟁도구들이 망가져 못쓰게 되어도 수리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일에도 태만하며 군대에는 기율이 없습니다.
지존(至尊)께서 지금 원정을 가시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단번에 황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을 울리며 서쪽으로 행군해 초나라 관문을 점거하면 크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점차 파(巴), 촉(蜀)을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손권이 그의 의견을 매우 옳다고 받아들였다.
장소가 그 때 함께 자리를 했는데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오나라는 아직 할 일이 태산 같은데 만약 대군이 과감하게 출동했다가는 반드시 난이 일어날까 우려됩니다.”
감녕이 장소를 보고 말했다.
“국가에서는 그대에게 소하(蕭何)의 중임을 맡겼는데 그대는 남아서 지키면서 난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을 사모하며 배우기를 바라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까?”
손권이 술잔을 들어 감녕에게 주면서 말했다.
“흥패(興霸). 금년에 토벌하러 가는 일에 대해서는 이 술처럼 그대의 결정에 맡기겠소. 경은 단지 적을 토벌하는 방략을 짜는 일에만 몰두하여야 할 것이오. 황조를 격파한다면 이는 필히 다 경의 공이오. 어찌 장장사(張長史)의 말에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오.”
손권은 감녕의 말에 따라 서쪽으로 진군할 생각이었다. 손권이 이 문제에 대해 술사 오범에게 묻자 그가 대답했다.
“지금은 이익이 적게 나니 내년만 못합니다. 내년인 무자(戊子) 년에는 형주의 유표가 죽고 그의 국가 또한 망할 것입니다.”
손권은 오범의 말을 무시하고 건안12년(207년)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황조를 정벌하러 갔으나 결국은 이기지 못했다. 손권은 황조의 군대를 일부 격파하고 그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고 귀환했다.
오범(吳範)은 자를 문칙(文則)이라 하고 회계군 상우(上虞) 현 사람이었다. 그는 역법과 수리를 배워 풍수와 기상을 알았으므로 군내에 이름이 있었다. 유도(有道)로 천거되어 경도(京都)를 향했으나 세상에 난이 일어나 가지 못했다. 손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자 오범이 몸을 의탁해 그를 섬겼다. 매번 재난의 조짐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역수를 세어보고 그 상황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의 술법이 여러 번 효과가 있어 이름이 높아지게 되었다.
건안13년(208년) 봄, 손권이 세 번째로 황조를 정벌했다. 이번에는 거의 전력을 기울였다. 손권은 강하를 정벌하러 갈 때 장소와 여범을 오군에 남아 본거지를 수비하게 하고 주유, 정보 등을 위시한 모든 장수들을 총동원했다.
손권의 대군이 예장군 서쪽의 심양(尋陽)에 이르렀을 때 오범이 풍기(風氣)를 보고는 손권의 배로 찾아와 축하했다.
“병사들을 재촉해 급히 나아가면 도착하는 즉시 황조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그의 말대로 군대를 급히 진격시켰다. 손권의 대군이 강하에 이르자 황조가 도독 진취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출전해 반격을 가하도록 했다. 손권군의 선봉장은 여몽이었다. 여몽이 선봉대를 이끌고 돌격해 진취가 이끄는 강하의 수군들과 접전을 벌였다. 혼전 중에 여몽이 직접 진취가 타고 있는 대장선으로 몸을 날려 올라탄 후 단칼에 진취의 목을 베어버렸다. 대장이 죽자 강하의 수군은 크게 어지러워져 대패했다.
여몽이 진격하기에 앞서 능통이 척후로 나갔다. 그는 평소에 후대하던 건장한 용사 수십 명과 함께 배 한 척에 타고 당당하게 본진을 떠나 수십 리를 올라갔다. 강 우측으로 진입하면서 황조의 장수 장석(張碩)의 배를 만나 그를 베어버리고 그의 배에 타고 있던 선원 전부를 포로로 잡았다. 능통은 돌아와서 손권에게 적의 상황을 보고했다.
진취의 수군을 격파한 손권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손권은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나란히 진격시켜 한 장소에 집결시켰다. 바야흐로 황조의 성을 공략하려던 참이었다. 황조의 거성은 사선에 있었다.
황조는 손권의 수군이 면수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큰 몽충 두 척을 면구에 세워두고 종려나무로 만든 커다란 밧줄로 배 둘을 묶어 고정시켰다. 배 위에는 병사 천 명을 배치했다. 몽충 위의 황조 병사들이 일제히 활을 발사해 화살이 비 오듯 내렸으므로 배를 탄 손권의 병사들은 앞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동습이 능통과 함께 선봉대가 되어 각각 결사대 백 명씩을 선발한 후 모든 병사들에게 갑옷을 두 겹씩 껴입게 하고는 큰 배를 타고 몽충에 돌진했다. 동습이 몽충 위로 뛰어 올라 직접 큰 칼을 휘둘러 두 가닥의 밧줄을 잘라 버리자 몽충이 표류했다. 비로소 손권의 수군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야음을 틈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능통이 앞장서서 황조의 성을 향해 돌격했다. 동오의 전군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성을 함락시켰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도륙했다. 손권이 황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노칠까 봐 걱정하자 오범이 말했다.
“멀리 가지 못했으니 반드시 황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손권의 병사들이 즉시 황조를 잡으러 쫓아갔다. 오경(五更)에 이르기 전에 황조를 추격했던 기사(騎士) 풍칙(馮則)이 그를 잡았다. 즉시 황조의 목을 베어 효수했다. 강하의 남녀 백성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드디어 황조를 죽이자 손권은 매우 기뻐했다. 아울러 그의 위신도 크게 올라갔다. 선친 손견의 원수를 이제야 갚았다. 손책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손권이 이루어내었으니 강동정권에서의 그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강하를 토벌하고 나서 손권이 공을 세우 장수들을 크게 치하하며 말했다.
“이번 싸움의 승리는 먼저 진취를 잡은 일에서 비롯되었다.”
여몽의 공을 제일로 쳐 횡야중랑장에 임명하고 천만 전의 돈을 하사했다.
다음 날 손권은 또 다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손권은 술잔을 들어 동습에게 권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밧줄을 끊은 공로를 치하하는 자리이오.”
맨 선두에 서서 황조의 성을 공격한 능통은 승렬도위(承烈都尉)로 승진했다. 황조 토벌을 건의한 감녕에게는 병권을 주고 당구(當口)에 주둔하게 했다. 손권은 함께 종군한 주유를 전부도독(前部大督)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