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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신씨 신염의 자손가에 금서로 전해온 천부경연구
Ⅰ. 몽고침략기에 드러난 민초들의 홍익신통력풍습.
영월신씨 30세 신재교(辛在敎)님은 필자의 백부인데, 조선왕조의 금서를 보관해 오신 분이시다. 백부께서는 당신이 소장하신 여러 금서들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하시는 분으로 평소에 필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고리비기』는 우리 신씨가의 ‘홍익신통력’(弘益神通力)풍습이 수록된 책인데, 조선 왕실에서 금하는 천부경(=홍익신통력)이 수록되었기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 고려 말 신돈이 국가산목조정(國家算木朝廷)과 군사산목군대(軍事算木軍隊)로 홍익신통력 정치를 하다가 실패했다.”라고 하셨다. 백부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천부경 기록이 있는 금서들은 모두 우리겨레의 근본과 관련된 역사자료가 분명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고려 말 수상을 역임한 신돈이 홍익신통력 정치를 하다가 실패한 사실과 조선 왕실이 신돈의 천부경정치를 반대한 이유가 우리겨레의 근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연구자들이 사적(史籍)에서 천부경이란 용어를 찾아보기 힘든데, 필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탐독하는 동안에 우리 신씨가에서 ‘홍익신통력’이라 칭하고 조선조정에서 ‘천부경’이라 칭하는 사료가 있음을 확인하고 논하여 보기로 하였다.
박서(朴犀)는 죽주(竹州) 사람으로 고종 18년(1231)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몽고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가 철주(鐵州)를 짓밟은 후 귀주(龜州)까지 진군하자 박서는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김경손(金慶孫) 및 정주(靜州)·삭주(朔州)·위주(渭州)·태주(泰州)의 수령(守令) 등과 함께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에 집결했다. 박서는 김중온의 부대로 하여금 성의 동쪽과 서쪽을, 김경손의 부대로 성의 남쪽을, 도호별초(都護別抄)와 위주·태주별초(別抄)를 2백5십여 명씩 나누어 세 방면을 수비하게 했다. 몽고군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서문·남문·북문을 공격하자 성 안의 군사들은 적을 기습 공격해 패주시켰다. 몽고 군사가 위주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생포한 후 성으로 들어가서 항복을 권유하게 하자 박서는 그를 처형해 버렸다. 또 몽고가 정예 기병 3백 명을 뽑아 북문을 공격해 오자 박서는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몽고가 누차(樓車)와 거대한 평상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겉을 싼 뒤, 그 속에 군사를 감추고 성 아래로 접근하여 굴을 뚫기 시작했다. 박서가 성벽에 구멍을 파 쇳물을 부어서 누차를 불태우자, 땅도 꺼져버려 몽고군 30여 명이 압사했고, 또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나무평상에 불을 지르자 몽고군이 우왕좌왕 놀라서 흩어졌다. 몽고가 다시 대포차(大砲車) 15문으로 성 남쪽을 공격해 상황이 급박해지자 박서는 다시 성 위에 언덕을 쌓아올리고 포차(砲車)로 돌을 날려서 적군을 물리쳤다. 몽고가 사람기름을 적신 섶을 잔뜩 쌓아놓고 불을 질러 성을 공격하니, 박서가 불을 끄고자 물을 뿌리니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박서가 진흙을 가져오게 하고 물로 반죽한 흙덩이를 던지게 하니 불이 꺼졌다. 몽고가 수레에 실은 마른풀 더미에 불을 질러 성루를 공격하니 박서가 준비해 두었던 물을 망루에서 뿌리니 치솟던 불꽃이 꺼져버렸다.
몽고는 30일 동안 성을 포위하고 온갖 방법으로 공격했으나 박서가 그때마다 잘 대응하며 성을 방어하자 몽고가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신(辛)씨의 조상인 고신(藁莘)가 고리고토 회복의 뜻을 품고 동쪽으로 와서 대대손손 대물림한 홍익신통력풍습에 의하면, 박서의 귀주전투처럼 공격이나 방어를 아군의 피해 없이 신속하게 처리하여 전쟁을 종료하도록 훈련된 군대를 “군사산목군대의 홍익신통력”이라 했다. 그래서 “군사산목군대의 홍익신통력”이 이루어지는 군대가 되자면, 산목림 산목문자 마을의 백성들로 징집된 군대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홍익신통력은 산목림 산목문자가 있는 마을의 가가호호 가족들이 평소에 식사는 도식(道食)으로, 농사는 어울이·품앗이·울력 등으로, 수렵은 선창(先槍)·재창(再槍)·삼창(三槍) 등의 창질을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생활풍습으로 익힌 믿음에서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서와 박서의 명을 따르는 당시의 군사들은 각자 고향마을의 산목문자가 된 듯이 일목동체(一木同體)의 수액심령으로 박서의 진신인 수액심령으로 동체(同體)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귀주전투 다음해인 고종 19년(1232) 임진년 12월에 치러진 김윤후(金允侯)의 처인성(處仁城) 전투는 진짜 ‘군사산목군대’라고 하여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지휘관인 김윤후(金允侯)는 승려의 신분으로 처인성전투의 지휘관으로 추대되어 처인부곡민과 김윤후가 일목동체의 수액심령으로 소통되어 몽고군을 물리친 홍익신통력의 ‘군사산목군대’라고 하여도 흠 잡힐 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고려사』 김윤후 전(傳)을 참고하여 논하여 보기로 하였다.
김윤후는 고종 때 사람으로 산목림 산목문자의 홍익신통력풍습을 하는 서민을 상대하는 승려의 신분이니, 처인부곡민들의 홍익신통력의 근본인 일목동체 수액심령 풍속에 김윤후도 함께 녹아들 수 있는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김윤후는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살았는데, 몽고군이 고종 19년(1232) 임진년 12월에 쳐들어오자 김윤후는 처인성으로 피난 갔다. 처인성에는 몽고군의 침입에 맞서고자 산목림 산목문자의 홍익신통력풍습을 하는 주민들이 일목동체의 방어군을 편성하면서 김윤후를 방어대장으로 추대했고, 김윤후는 주민들로 편성된 방어군으로 처인성을 공격해 오는 몽고 원수(元帥) 살리타이[撒禮塔]을 활로 쏘아 죽였다. 왕이 김윤후의 공을 가상히 여겨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김윤후는 자신을 방어대장으로 추대한 부곡민들에게 공을 양보하면서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 하고 끝까지 사양했다. 그러자 왕이 김윤후의 관직을 낮추어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처인부곡을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시켰다.
뒤에 김윤후가 충주산성방호별감(忠州山城防護別監)으로 있을 때인 고종 계축 40년(1253)년 10월에 몽고군이 쳐들어 와 충주성을 70여 일 동안 포위하자 비축해 둔 군량이 바닥이 나버렸다. 몽골군은 당시에 10세 이상 남자는 도륙하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는 사로잡아 사졸에게 나누어주면서 고려인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다. 이처럼 처참한 전쟁기간에 김윤후가 군사들에게 “만약 힘을 다해 싸워 준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작을 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믿으라.”고 설득한 뒤 관노(官奴)문서를 가져다 불살라 버리고 노획한 마소를 나누어 주었다. 아마도 김윤후는 처인성전투의 승리를 상기하면서 서민들의 산목림 산목문자의 홍익신통력으로 함께할 의지를 보이니, 서민들이 일목동체의 홍익신통력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로 돌진하여 몽고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김윤수는 12월 임술일 몽고군이 충주(忠州) 포위를 풀었다고 고려조정에 보고해 왔다.김윤후는 그 공으로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되었고, 기타 전투에 공이 있는 사람은 관노(官奴)·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김윤후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나가게 되었지만 당시 동북면은 이미 몽고에 함락되었으므로 부임하지 못했다. 수사공(守司空)·우복야(右僕射)까지 지내다 사직했다.
고종 갑인 41년(1254)년 7월 임술일. 쟈릴타이[車羅大]가 등이 군사 5천을 인솔해 압록강을 건너 침공했는데, 몽골군의 이번 침공으로 포로로 잡힌 남녀가 206,800여명이고, 살육된 자는 헤아릴 수 없었으며, 몽골군이 지나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Ⅱ. <충렬왕시대 서민들의 천부경풍습.>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의 이름은 왕거(王昛)이며, 원래 이름은 왕심(王諶) 또는 왕춘(王賰)이다. 원종(元宗)의 맏아들로 모친은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이며, 고종(高宗) 23년(1222) 병신년 2월 계축일에 태어났다. 고종 46년(1259) 6월에 고종이 죽었는데 당시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해 있었기 때문에 태손(太孫)인 충렬왕이 조부의 유언을 받고 임시로 국사를 맡아 처리했다. 원종 원년(1260) 8월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3년(1272)에 원나라에 갔다. 원종15년(1274)에 원 세조(元世祖)의 딸 쿠투루칼리미쉬[忽都魯揭里迷失]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6월 계해일에 원종이 죽자 갑자일에 백관들이 본궐에 모여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태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신씨가에 조선시대 금서로 전해온 『고리비기』에 조선사회에서 천부경으로 칭하는 용어를 신씨가에서는 홍익신통력이라 했는데, 신씨들의 고리고토(藁離故土) 고리국 국가산목조정(國家算木朝廷)의 중주왕의 관직을 태주(太柱)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 총서>에 고종이 동왕(同王) 46년(1259) 6월에 죽었는데, 당시 원종을 태자로, 충렬왕을 태손(太孫)으로 칭한 것은 동방으로 지칭되는 고리국의 풍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신씨가에서 ‘홍익신통력’으로 불리고, 조선시대에 ‘천부경’으로 지칭되는 산목문자풍속이 충렬왕시대 사료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1. <충렬왕 측위년(1274) 갑술년>
원종 15년(1274) 갑술년 봄 정월에 원나라에서 일본을 정벌하고자 총관(摠管) 차쿠[察忽]를 보내 전함 3백 척 건조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 기술자와 일꾼 및 일체 물품의 공급을 모두 고려에서 부담하게 했다. 고려에서 감당키 어려워서 별장(別將) 이인(李仁)이 2월 갑자일에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올린 글에 의하면, 전함건조 기술자와 일꾼 30,500명이 1일 1인당 3식으로 계산하여 34,312석 5두, 흔도[忻都] 군사 4천5백 명의 군량 1,570석(碩), 조선감독(造船監督) 홍총관(洪摠管)의 군사 500명의 군량 85석, 제주(濟州)에 주둔하는 관군과 고려군사 1천4백 명의 7개월 분 군량과 군마사료는 2,904석, 나주(羅州)에 있는 월로활단적(粤魯闊端赤)의 군량 8천석과 말사료 1,325석을 고려에서 지급하라고 했다. 또 중서성에서 봉주둔전군의 매달 부족 되는 양곡 2,047석과 소먹이 1,001석7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는데, 최근 고려의 사정은 도저히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면제해 달라는 내용이다.
원나라에서 만자(蠻子) 매빙사(媒聘使) 초욱(梢郁)을 보내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뽑아내라고 독촉하니, 고려에서 결혼도감(結昏都監)을 설치하고 촌가의 여자 140명을 찾아내 만자(蠻子)에게 주니, 만자들이 즉시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통곡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여름 4월에 원 나라에서 완안아해(完顔阿海)를 보내어 쌀 2만 석을 해상으로 수송해 와서 군량(軍糧)을 보조하게 했다. 지난해에 백성들이 굶주리는 사실을 들어 원나라에 곡식을 팔기를 요청했는데, 황제가 명하여 동경(東京(遼陽))의 쌀을 수송하여 구휼하라고 했는데 뱃길이 멀어 이때에 도착했다.
5월 기축일. 원나라에서 일본정벌군 1만 5천 명이 왔다.
6월 기유일. 원종의 병이 깊어지니,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불충과 불효죄만 빼놓고 사형죄까지도 다 용서했다. 6월 계해일에 원종이 제상궁(堤上宮)에서 죽었다.(9월 을유일에 소릉(昭陵)에 장사했다.)
7월 병술일. 김방경(金方慶)이 일본 정벌군의 선봉별초(先鋒別抄)를 거느리고 먼저 원정길에 올랐다[啓行)].
8월 기유일. 원나라가 일본정토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힌두[忽敦 : 忻都])를 보내 경군(京軍) 458인을 추가로 동원하라고 지시했다.
8월 무진일. 충렬왕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니 백관들이 마천정(馬川亭)까지 나와 영접했고, 같은 달 기사일에 충렬왕이 황제의 조서를 강안전(康安殿)에서 받고, 경령전(景靈殿)을 참배한 뒤에 강안전으로 돌아와 어좌에 올라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다.
겨울 10월 을사일. 도독사 김방경으로 하여금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박지량(朴之亮)ㆍ김흔(金忻)을 지병마사로, 임개(林愷)를 부사로 삼았고, 추밀원부사 김신을 좌군사로, 위득유(韋得儒)를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을 부사로 삼았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를 우군사로, 나유ㆍ박보(朴保)를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를 부사로 삼아 ‘삼익군(三翼軍)’이라 이름하였다. 원 나라의 도원수 홀돈,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몽군(蒙軍)ㆍ한군(漢軍) 2만 5천 명과 우리 군사 8천 명 및 사공ㆍ인해(引海)ㆍ수수(水手) 6천 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으로 합포를 떠났다. 11일이 지나 배가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 위에 진을 쳤다. 박지량ㆍ조변(趙抃)이 쫓으니 왜가 항복하기를 청하다가 다시 싸웠는데, 다구가 지량ㆍ변과 더불어 천여 명을 쳐 죽였다. 삼랑포(三郞浦)에서 배에서 내려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죽인 적병이 매우 많았다. 왜병이 돌격하여 와서 중군과 충돌하였는데, 방경이 효시(嚆矢)를 한 개 빼어 쏘며 성난 소리로 크게 호통을 치니 왜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지량ㆍ흔ㆍ변ㆍ이당공(李唐公)ㆍ김천록(金天祿)ㆍ신혁(申奕) 등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니, 왜병이 크게 패하여 쓰러진 시체가 삼대가 깔려 있는 듯하였으며, 홀돈이 말하기를, “몽고인이 잘 싸운다고 하지만 이 이상 더 잘할 수는 없다.”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종일토록 싸우다가 저물어서야 그쳤다. 방경이 홀돈ㆍ다구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비록 적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땅에 들어와 사람들 스스로 힘을 다하여 싸우니, 이것이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태우고회음후(淮陰侯)가 배수진을 친 격이다.” 하며 다시 결전하기를 청하였는데, 홀돈이 말하기를, “수가 적은 편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나가 싸우면 수가 많은 편에게 사로잡힌다 하였는데, 피로한 군사를 몰아 많은 적과 싸우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다.”고 하였다. 유복형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먼저 배로 올라갔기 때문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배로 돌아왔다. 마침 그날 밤에 크게 바람불고 비가 와 바위와 벼랑에 전함이 부딪쳐 많이 부서지고 김신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와 같은 원나라 일본정벌의 결과는 실패하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원종 15년(1274) 갑술년 11월 일본정벌을 갔던 군사가 합포(合浦)로 돌아왔는데, 이때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13,500여명이었다고 한다.
2. <충렬왕 원년(1275) 을해년.>
○ 봄 정월 병자일(1월 4일). 동정원수(東征元帥) 힌두[忻都 : 忽敦]·홍다구(洪茶丘)·유복형(劉復亨) 등이 북으로 돌아갔다.
○ 정월 경진일(1월 8일).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大將軍)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리게 했다.
“저희나라는 최근 들어 역적 소탕과 상국군대에 군량을 공급하는 일로 해마다 매 민호로부터 양식을 거두었습니다. 게다가 일본 정벌에 필요한 전함의 건조에 모든 장정들이 동원되는 바람에 노약자들만이 간신히 농사를 지었지만 가뭄과 홍수가 이어 닥쳐 곡식을 전혀 수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라에 필요한 양곡을 가난한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는데 한 말 한 되까지 싹싹 긁어 바쳐버리고 벌써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까지 생겼으니 백성들의 피폐함이 지금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익사해 돌아오지 못한 군사들이 많아 비록 남은 백성들이 있기는 하지만 한 달이나 일 년 내에 소생한다는 것을 기약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만일 또 다시 일본 정벌을 일으킨다면 저희나라로서는 그에 필요한 전함과 병사들의 양식을 더 이상 공급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라가 피폐하여 부지할 수 없게 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제께서 직접 보지 못하셨으니 당연히 어찌 그 지경까지 이르렀겠느냐고 하실 것이지만, 저희의 지극한 정성을 받아주시고 간절한 이 호소를 양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2월에 대부경 박유(朴楡)가 상소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높은이나 낮은이가 한 아내의 범절(止)이 있어서(於),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외국인이 와서 장가 드는 아내는 정한 숫자가 없습니다. 신(臣)은 인물이 모두 장차 북쪽으로 흘러나갈까 두렵습니다. 이를테면(令) 신료들에게 아름다운(娵) 여러 첩을 허락하되 관품에 따라 그 수효를 감하여 서인(庶人)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娵) 일처일첩(一妻一妾)을 마땅히 얻도록(得) 하며, 여러 아내(庶妻) 소생의 아들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모두 적자와 같이 하게 한다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남녀가 없어지고 인물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아 인구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박유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방은 나무가 구원하여 도와준다고(屬木) 하는데, 정수인의 산목(木)에서 나오는 촌수(生數)는 3촌이고, 지지십이지인(而)이 이루어지는 촌수(成數)는 8촌이다. 기수(奇數)의 촌수는 남자배필(陽)이고, 우수(偶數)의 촌수는 여자배필(陰)이니, 우리나라의 인물이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배필촌수의 이치(理數)가 그러한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이런 상소를 하니, 부녀자들이 듣고 모두 원망하며 두려워하였다. 이때 재상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어 그 의논을 중지시켜 실행하지 못하였다. (二月,大府卿朴楡,上疏曰,我國,男少女多,而尊卑,止於一妻,其無子者,亦不敢畜妾,異國人,來,娶妻,無定限,臣,恐人物皆將北流,令臣僚,許娵庶妻,隨品降殺其數,至於庶人,得娵一妻,一妾,其庶妻所生之子,得仕于朝,皆比適子,怨曠以消,人物不流,戶口日增矣,楡,嘗言,東方,屬木,木之生數,三,而成數,八,奇者,陽也,偶者,陰也,吾邦之人,男寡女衆理數然也,遂上此疏,婦女聞者,咸怨且懼,時,宰相,有畏其妻者,寢其議不行.)<『고려사절요』 충렬왕 원년(1275) 2월>
○ 10월 임자일. 처녀들을 원나라에 바치기 위해 국내의 모든 혼인을 금지시켰다.
○ 10월 임술일.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 원나라에서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하자 김광원(金光遠)을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로 임명해 전함을 건조하게 했다.
3. <충렬왕 2년(1276) 병자년>
○ 봄 정월 병자일(1월 10일) 황제가 전함 및 화살·화살촉의 제작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 2월 임인일(2월 7일). 유천우(兪千遇)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는데 황제가 이전에 바쳤던 처녀 중에서 최전(崔甸)과 최지수(崔之守)의 딸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다.
○ 2월 을사일(2월 10일). 충렬왕이 궁문에서 풍악의 기예를 심사했는데 동왕이 공주와 함께 관람하고 은과 베를 내려주었다.
○ 2월 정미일(2월 12일) 충렬왕이 공주와 함께 본궐에 행차했다.
아마도 신년 1월 10일 황제가 전함 및 화살·화살촉의 제작을 중지를 명했고, 2월 7일 황제가 이전에 바쳤던 공녀들 중에서 최전(崔甸)과 최지수(崔之守)의 딸만 남겨두고 모두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기분이 좋아진 충렬왕이 2월 10일 궁문에서 풍악대의 기예대회를 열어보니, 나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기분 좋게 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본궐에 행차하여 신료들에게 “봉은사(奉恩寺)에서 14일 저녁에 달맞이행사를 하고자 어가행차행사를 할 것이다.”라고 공표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근교에 백성들은 서울시내 일가친척을 찾아 어가행차행사를 구경하고자 찾아왔을 것이다.
○ 2월 기유일(2월 14일) 연등회(燃燈會) 참석차 충렬왕이 봉은사(奉恩寺)로 가자 거리를 메운 사대부와 부녀자들이,
“태평성대의 옛 의례를 오늘 다시 볼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며 서로 경하했다.(己酉 燃燈, 王如奉恩寺, 士女塡巷, 相慶曰, “豈謂今日, 復見昇平舊儀?”)
그런데 1년 전 기사인 충렬왕 원년 2월에 박유가 인구증가정책을 목적으로 일부다처제 법률을 제정코자 상소를 했다. 『고려사』 열전 박유 전(傳)에는 다음과 같이 충령왕 2년 2월 14일 어가행차와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있다.
연등회(燃燈會) 저녁에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종하는데 한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여러 아내를 두자고 청한 놈이 저기 늙은 거지다!”라고 고함쳤다. 옆에서 듣는 사람마다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길거리에 붉은 손가락들이 굴비두름을 엮은 듯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일부다처제 법은 이 당시 재상 가운데 자기 아내를 겁내는 담당자가 박유의 주장을 실제로 시행하지 못했다.
박유는 당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재상의 권력자를 길거리에서 성토할 정도로 민심을 뭉치게 한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부를 축적한 양반의 유자들은 일부다처의 법률을 찬성하였을 것이나, 초근목피로 연명하여 피똥을 배변하는 민초들은 일부다처의 법이 그림의 떡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마을마다 산목림(算木林)이 있어 산목문자천부경(算木文字天符經)의 이야기기가 전해졌으니, 유생문신인 박유처럼 천부경에서 일주동체(一柱同體) 혹은 일묘동체(一苗同體)로 촌수발생이 되는 근본을 몰라서 왜곡하는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산목림의 믿음으로 일부일처풍습을 해야 하는 이유를 다 알아서 믿고 따랐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고려시대에 박유의 「일부다처법」의 소문을 퍼뜨린 매스컴은 입소문뿐이었으므로 하루 이틀도, 몇 달도 아닌 1년 이상은 걸려서 반상(班常)을 총망라한 부녀자들의 울화통이 폭발직전에 이르렀을 시기인 충렬왕 2년 2월14일 어가행차가 있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고, 그 어가행차에 박유가 호종하여 따르다가 크게 봉변을 당하여 백주에 서울거리를 활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일부다처의 법률안을 발의한 재상이 수치를 당하였는데, 그 법률에 따라 첩실을 들이는 재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 열전 박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하고 있다.
박유(朴褕)는 충렬왕 때 대부경(大府卿)으로 있으면서 이런 이론을 세웠다.
“동방(東方)은 산목(木)에 속하니, 산목(木) 정수인의 생수(生數)는 3이고 십이지지인의 성수(成數)는 8이다. 그런데 남자배필의 홀수는 양(陽)이고 여자배필의 짝수는 음(陰)이니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그런 이치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건의를 올렸다.
“우리나라는 본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지금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처를 하나만 두고 있으며 자식이 없는 사람들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의 경우 처의 수가 정해진 한도가 없으니, 사람과 물산이 모조리 그들이 있는 북쪽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바라옵건대 대소 신료들에게 처를 여럿 둘 수 있게 하되 품계에 따라 숫자를 줄여서 평민은 1처 1첩1)을 둘 수 있도록 하며 본처 외의 여자가 낳은 아들도 적자와 같이 벼슬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홀어미와 홀아비[怨曠2)]가 줄어들고 따라서 인구가 증가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녀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면서 박유를 원망했다. 연등회(燃燈會)3) 저녁에 박유가 왕의 행차를 호종하는데 한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아내를 여럿 두자고 청한 놈이 바로 저 늙은 거지새끼다!”라고 했다. 듣는 사람마다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길거리에 붉은 손가락들이 두름을 엮어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재상 가운데 자기 아내를 겁내는 자가 있어 그 주장은 실제 시행되지 못했다.(朴褕, 忠烈朝, 拜大府卿. 嘗云, “東方屬木, 木之生數三而成數八, 奇者陽, 偶者陰也. 我國之人, 男寡女衆, 理數然也.” 遂上疏曰, “我國本男少女多, 今尊卑皆止一妻, 無子者亦不敢畜妾. 異國人之來者則, 娶無定限, 恐人物皆將北流, 請許大小臣僚娶庶妻, 隨品降殺, 以至庶人, 得娶一妻一妾, 其庶妻所生子, 亦得比適子從仕. 如是則怨曠以消, 戶口以增矣.” 婦女聞之, 莫不怨懼. 會燈夕, 褕扈駕行, 有一嫗指之曰, “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聞者傳相指之, 巷陌之閒, 紅指如束. 時宰相有畏其室者, 寢其議不行.)
위 박유전의 마지막에서 “당시 재상 가운데 자기 아내를 겁내는 자가 있어 그 주장은 실제 시행되지 못했다.”라고 기록했으나, 박유가 부녀자들의 성토를 당한 후부터 그가 백주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지경에 이르니 어떤 재상도 일부다처의 법률을 공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에 『고려사』 편찬하는 유생문신의 학자들은 고려시대 유생문신으로 출세한 박유 등의 체면을 지켜주고자 “고려시대 유생문신들이 박유의 봉변을 목격하고, 박유와 동일한 봉변을 피하고자 몸을 사리면서 일부다처의 법률은 실행되지 못했다.”라는 사초(史草)에 필삭(筆削)을 하여 아내를 겁내는 유생문신을 만들어서 일부다처의 법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초는 사관이 매일 일기처럼 쓰는 사초의 기사가 있다면, 애초에 사관이 아내를 겁내는 법률담당 재상의 이름을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 박유전>에서 그 재상의 이름을 기록할 수 없었으므로 아내를 겁낸 법률담당이라고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고려 충렬왕시대에 박유가 일부다처의 법률로 인구증가정책을 추진이 필요하였으나, 고려 방방곡곡 마을마다 산목림에서 산목문자천부경을 믿는 만백성의 풍습이 확고하여 고려조정이 인구증가정책을 추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