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때(갈4:4-5)
2020.12.13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지난 주일에 우리교회 이(李)장로님께서 주중에 추도예배를 드려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깜짝 놀라서 “아니 추도예배 드린 지 얼마 안 되는데 무슨 추도예배를 또 드려요?”라고 했더니, “목사님 벌써 1년 지났습니다”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니 진짜 그랬다. 시간이 정말 화살같이 날아간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두 종류의 단어가 있다. 일반적인 시간과 기회의 시간이다. 일반적인 시간(크로노스, Χρόνος)이란 우리 생활 속에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을 말한다. 예를 들면 똑딱 거리면서 가고 있는 벽시계의 시간이나 캘린더에 찍혀있는 월별 시간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정확하고 확실하게 적용된다. 앞에서 언급한 추도예배 시간이 다시 찾아 온 것도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기회의 시간(카이로스, καιρός)은 일반적인 시간 이면에 숨어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흔히 말하는 기회나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뜻을 이루시는 때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또 똑같은 한 시간 이라도 노동자에게는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10분처럼 느껴지는 것도 다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오신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여기서 사도바울이 사용한 “때(시간)”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들이 사는 역사 속에 확실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팩트), 예수님의 오심과 대속의 죽음은 인류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지금부터 이 천여전인 로마제국시대에 오셨을까? 그것은 그 당시에 복음이 온 땅에 쉽게 전파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과 초대교회 시대에는 온 세계가 헬라어로 언어통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의사소통이 쉬웠다. 또한 그 당시에는 이미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이라는 구약성경이 있었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사도 바울 등이 복음이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로마제국 시대의 발달된 도로를 이용해서 복음이 신속하게 전 제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 유대사회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유대사회는 율법적인 신앙으로 타락해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는 메시야 가 속히 오셔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했다. 이 모든 상황들이 바로 그 시대에 메시야가 오실 때가 찬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시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 “그 때-그 곳(Then-There)”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여기(Now-Here)”에 있는 나를 위해(현재 믿고 있든지, 믿지 않고 있든지 상관없이) 오셨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 각 사람의 인생의 때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비록 지금은 나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차면‘ 마침내 그것을 드러내고, 우리 눈에 보여주시고, 우리를 사용하시고 높여 주신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보이시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때”는 언제쯤일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았을 때, 하나님의 기준에 통과했을 때 이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내 삶 속에서 보여지고 성취되기 시작한다.
잠언 24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2)
이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더 기울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의 그림은 마음의 저울이 변해가는 상태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C75495FD323CA2B)
이 과정에서 언제가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보여지고, 느껴지기 시작할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최소한 마음의 저울이 하나님 쪽으로 좀 더 기울기 시작하는 때부터 라고 볼 수 있다. 나의 자아나 욕심들을 주님 앞에 내려 놓을 때, 바로 이때가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때부터 주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가 진정한 인생의 전성기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내 안에 있는 “나”라는 저울추들(내 생각, 세상 가치관, 세상적인 습관, 반복적인 죄, 혈기, 못된 성질과 언행, 상처, 욕심, 중독 등)을 포기하고 하나씩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내려 놔야 한다. 그래서 완전히 나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때가 바로 온전히 때가 찬 상태이다(“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처럼 하나씩 하나씩 나를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철저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성화(聖化)한다.
그런데 이처럼 나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의 저울이 점점 더 기울어지게 만드는(=하나님의 때를 앞당기는) 영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계속적으로 내 속에는 나를 지배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면 된다. 성령님이 내 속에서 나를 온전히 지배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쪽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처럼 성령님께서 나를 온전히 지배하실 수 있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는 묵상과 기도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강조하셨던 이유나 다윗이나 우리들에게 묵상과 기도를 강조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포기되지 않은 자아와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혈기 같은 옛사람의 모습들은 여러분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때를 늦출 뿐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말씀을 묵상과 기도로 “나”라는 추를 주님 앞에 내려놓자. 믿음으로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가자. 그래서 성령님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내 마음의 중심을 내어 드리자. 다같이 히브리서 4장 14-16절을 함께 읽고, 주님 앞에 나 자신을 올려 드리자.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