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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선교 스크랩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
초대짱 추천 0 조회 7 12.09.29 14: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

 

들어가는 말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것이 유대교가 되었던지, 기독교가 되었던지 언제나 외부적으로 물리적인 총칼의 박해와 내부적으로 이단의 거짓진리에 맞서야 했다. 그래서 성경 66권에는 물리적인 박해와 거짓진리로 인해서 성도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권면하는 내용과, 박해자들과 이단자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고 바른 신앙을 변호하는 내용이 참으로 많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면서 요구됐던 예배와 신앙교육, 조직과 제도정비 또는 치리와 징계를 위한 내용도 많이 담겨 있다. 특히 신약성경은 이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 가혹한 박해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몸의 부활을 부인했던 이단자들의 강한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선교 역사 200년이 넘는 천주교가 되었든지, 선교 역사 100년밖에 안 되는 개신교가 되었든지,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도 여러 차례 총칼의 박해와 거짓진리에 맞서야 했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역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가혹한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켜냈던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은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에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세속의 온갖 유혹들이 널려 있는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이웃에게 복음과 사랑을 증거 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 박해세력


신앙을 탄압하는 박해세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의 나라에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점령국이 박해세력이 되는 경우가 있고, 둘째는 자국의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박해세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제국 시대에 셀류키드(seleucid) 왕조가 유대교를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자신을 신이라고 불렀던 안디옥쿠스 4세는 예루살렘성전을 약탈한 후 제우스에게 제사를 바치게 하였고, 유대교의 모든 종교의식을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이 박해 때에 유대인들의 정치 또는 종교집단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이 생겨났고, 유대인 마카비가 게릴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만 삼년만에 예루살렘성전을 탈환하기도 했다.(1 그리고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자국의 왕인 아합과 그의 부인 페니키아 사람 이세벨로부터 바알신 숭배를 강요당하며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때에 설상가상으로 삼년 육개월간 가뭄이 지속되어 광야 굴에 숨어서 바알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끝까지 야훼신앙을 지켰던 칠 천명의 신앙인들과 엘리야는 가장 참기 어렵다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어야 했다.(2


신약시대에는 국적을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이 대제국 로마로부터 대략 300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서 큰 박해를 받았다.(3 이 때에 기독교인들은 황제와 로마신들을 섬기도록 강요당하였고, 이를 피하여 지하무덤 카타콤에 숨어 신앙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당하기도 하였다.(4


우리 나라의 기독교에도 박해세력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났다. 첫째는 일본제국이 황제와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이를 반대했던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다. 이 때에는 주로 개신교 교인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는 조선왕조가 103년 동안 천주교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오랜 박해의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천주교는 일제치하 때에 조상들의 그 질긴 순교영성을 잇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 대신에 개신교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순교영성을 이어갔다.

 

2. 한국 기독교의 순교역사


한국 기독교의 순교역사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다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때로부터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03년에 이르는 이 기간에 천주교인 1만 여명이 순교하였다. 둘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1910년 8월 22일 강제병합,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40년간 받았던 일제의 탄압과 해방이후 공산군의 남침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개신교에 속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였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과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던 1938년 이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참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에 보고된 장로교회의 3·1만세 사건의 피해상황만 보더라도, 체포된 사람이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가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서 수감된 사람이 202명, 사살된 사람이 41명, 보고된 날짜에 수감 중인 사람이 1,642명, 매 맞고 죽은 사람이 6명, 그리고 소실된 교회가 12개였다.(5 감리교회의 경우 만세 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1919년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군경 한 때를 인솔하여 현재 삼일운동순국유적비가 세워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나타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인 주민들을 그 곳 감리교 예배당에 다 모이게 한 뒤, 군경들로 하여금 출입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게 한 뒤 집중사격을 가하게 했다. 그들은 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만행으로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교회 밖으로 뛰쳐나와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그들은 어린아이까지도 칼로 찔러 죽었다. 그들은 이와 비슷한 만행을 현재 삼일운동순국기념비가 세워진 인근 수촌리 부근의 기독교인들이 사는 동네 열 다섯 군데에서도 저질렀다.(6


그런데 1919년에 있었던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는 신앙보다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앙으로 인한 박해는 독립만세사건이 있고 난 뒤, 더욱 강화된 신사참배에서 비롯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평양신학교가 폐쇄 당했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죽임을 당했다.(7 이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당한 박해는 초대교회가 황제숭배로 인해서 로마제국에 당한 박해와 같은 것이다.


6·25때, 공산군의 만행으로 인한 기독교의 피해는 초기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와 성격이 같은 것이었다. 조선당국이 기독교 자체를 이단시하여 박멸하려고 했던 것인 만큼,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를 마약으로 간주했던 공산군들이 유물론 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사살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우리 민족의 기독교 순교역사를 보면, 대제국 로마로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받았던 그 무서운 박해에 못잖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경이 그 시대의 고난 당하는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한국 기독교의 선교역사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 이상 먼저 복음의 씨를 뿌렸다.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 1885년인데,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교회를 시작한 것이 1784년이다. 하나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에 끌러간 조선인들 가운데 천주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후 일본을 지배한 도꾸가와(德川家康)가 기독교를 탄압할 때에 순교자의 명단에 이름을 남긴 조선인 신도가 21명이나 되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던 조선인이 25명에 이른다.(8


이 땅에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개신교가 태동한 직후인 1534년에 스페인에서는 이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예수회를 조직하여 세계로 선교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가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하여 일본의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기독교를 전하였고,(9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 일행이 중국 광동성에 도착하여 검정색의 신부 옷을 벗고, 삭발을 하고, 회색의 승려복으로 갈아입고 부두에 내린 것이 1583년 9월이었다. 중국에 내린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중국 경전의 연구였다. 중국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함이었다. 교리가 한 나라의 전통사상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고 또 그들의 논리에 부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럽의 과학적 학문까지 중국에 전달하였는데,(10 중국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던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중국을 통해서 서학과 천주교를 받아드린 것은 매우 자연스런 결과였다.(11 그로부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100년이 넘게 받았던 탄압은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4. 한국 기독교의 자랑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자랑할만한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서 세 가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한국교회(천주교회)가 복음을 접하고 교회를 세운 것이 선교사가 아닌 조선선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따른 것이란 점이다. 둘째는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선혈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셋째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래가 드문 빠른 성장을 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천주교 순교자 일만 여명과 개신교 순교자 수 천명이 흘린 피를 먹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5. 한국 천주교의 수난


가. 수난의 원인


1885년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까지 대략 103년 동안 '사학죄인'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천주교인이 무려 1만여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기록에 남은 숫자가 5천여 명이고, 무명의 순교자도 5천여 명에 달해서 일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았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남인 시파와 벽파의 정치싸움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정치집단인 남인 시파(時派)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사도세자를 동정했던 사람들로써,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또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했던 정조와 영의정 채제공 시대에는 벽파( 派)인 홍낙안의 공격으로부터 그럭저럭 보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떠나고, 정조마저 1800년에 죽자 반대파인 순조의 섭정 정순왕후와 홍낙안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12


정순왕후와 홍낙안은 교회를 박멸하고자한 이유를 기독교의 비인간성과 비국민성, 그리고 체제도전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임금의 명령이나 국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제사를 배척함으로 유교적 질서를 거부하고, 비밀집회를 통해서 나라안전을 위협하며,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며, 인륜과 충의를 저버린 짐승의 무리라 하여 그 씨까지도 남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정순대비와 벽파의 무리들은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는 기존의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기독교인 적발에 이용하였고, 체포된 기독교인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한 다음 처형하였다.(13

 

 나. 처형장소


조선이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던 장소는 주로 강변이나 군사훈련장에 위치하는 곳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한강 당산철교 북쪽 끝 지점에 있는 절두산(14과 용산의 새남터였다. 새남터는 노들(또는 사남기)이라고도 불리던 조선의 군사훈련장이었으며 중죄인을 처형하던 곳이다.(15 그리고 전주에서는 전주천변의 초록바위와 서천교 밑이 처형장소였다. 그밖에 서울에서는 조선시대 도성 안의 시체를 밖으로 내갈 수 있는 출구였던 서소문 밖 네거리(16와 당고개(17가 기독교인을 처형했던 장소였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전주감영의 군사훈련장이었던 숲정이와 해미읍성, 공주감영, 보령 갈매못, 여산동헌, 원주감영 등이 천주교인들을 많이 처형했던 곳들이다.

 

 다. 처형방법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36-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이 받았던 악형들에 대해서 설명해 놓고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조롱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칼에 맞아 죽고, 양과 염소가죽을 입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견디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맹수에 찢기고, 곤장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도 하였다.


조선 기독교인들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잔학한 박해를 당하였다. 그들이 당한 고통이 어떠했는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18


첫째, 배고픔이다.

신자들은 체포되면 갖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한 후에 멀리 외딴 곳으로 귀양을 가거나 처형당했는데, 살아남은 신자 또한 집과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또 박해 가운데 신자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이 배고픔이요, 목마름이었다. 다른 형벌은 잘 이기고도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진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에 두 번씩 주먹만한 조밥 한 공기밖에 먹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자기들이 누워 자는 더러운 볏짚 자리를 뜯어먹고, 심지어는 옥안에 기어다니는 이를 잡아먹기까지 하였다.(19 홍성에서 순교한 박취득은 8일 동안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해 기절하기도 했다.(20 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에 있는 대아리 저수지에 있었던 속칭 고산 널바위에 살았던 김성철은 아들을 포함한 가족 6명과 마을사람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여산으로 끌려와 신문을 받고 나이 62세 때에 교수형을 받았다. 구전에 의하면, 이들은 얼마나 혹형과 굶주림에 시달렸던지, 옷 솜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풀밭인 처형지로 끌러 나오자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었다고 한다.(21


둘째, 귀양살이다.

다산 정약용과 그 형제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심지어 배교한 교인들까지도 귀양을 보냈다. 또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자녀와 처는 노비로 삼으며, 시집가기로 약속된 여자는 친정으로 보냈고, 그 밖의 식솔들은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했다. 예를 들면, 전주에서 육시형을 받았던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은 동생 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항검의 처 신희는 함경도 경원부로, 여섯 살 난 아들 일석은 흑석도로, 세 살 난 일문은 강진 신지도로, 그리고 아홉 살 난 딸 섬이는 거제도로, 며느리 이순이는 평안도 벽동으로, 조카 중성은 함경도 회령으로, 유관검의 처 이육희는 평안도 위안으로 각각 보내져 노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22


셋째, 고문이다.

교인들이 체포되면 제일 먼저 당하는 것이 매질이었다. 해미에서는 교인들의 머리채를 묶어 나무(회화나무)에 매달아 매질하고, 활을 쏘았고, 커다란 돌다리 위에서 머리채를 잡고 팔다리를 들어 돌에 메치어 가슴이 터지도록 머리가 부서지도록 자리갯질을 했다.(23


원주감영에서 순교한 최해성은 어찌나 맞았던지, 다리뼈가 부서져 뼛조각 두 개가 땅에 떨어졌고, 등과 배에 구멍이 나서 창자가 빠져 나왔다.(24


13년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옥중수기를 낸 신태보는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였다. 주리란 두 팔은 둥 뒤로 묶고, 등과 팔 사이에 긴 막대기를 끼운 다음 그 막대기의 다른 절반에 양 무릎과 발목을 묶은 다음, 두 개의 굵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두 정강이 사이에 끼워 넣고서 두 사람이 몽둥이 끝을 타고 앉는 무서운 형벌을 말한다. 결국 신태보는 다리뼈가 으스러지고 손발을 쓸 수 없게되어 음식을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25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하상은 1839년 기해년 박해 때에 체포되어 그가 재상에게 써 바친 한국 최초의 기독교 변증서(상재상서)를 트집잡는 관헌들에게 몽둥이 끝으로 찔리고 톱질을 당한 끝에 뼈가 드러나는 고문을 당하였다.(26


합덕 사람 손자선은 공주감영에서 거꾸로 매달려 매를 맞고 얼굴에 인분까지 덮어쓰는 고문을 당했다. 그때마다 그는 늘 웃는 얼굴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포졸들이 때리다가 지쳐 "무엇이 고마우냐?"고 물으면, 그 때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나와 같은 큰 죄인을 위하여 피를 많이 흘리시고 목이 말라 가래침을 잡수시며 돌아가셨거늘, 나를 이 모양으로 대접하여 주니, 이제야말로 내 죄를 보속하게 되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네 이빨로 네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고 놓아주겠다"라는 꼬임에도 "만 번을 죽어도 배교는 못하겠다!"면서 양팔을 한 입씩 물어뜯어 기절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27


넷째, 죽음이다.

순교자들 가운데는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교수형으로 죽거나 화살에 맞아 죽거나 옥사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자들은 우물에 빠뜨려 죽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다른 많은 방법들이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 동원되었는데,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리면서 백지를 여러 차례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방법으로 처형된 사람들이 있었다.(28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터에서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홍낙민의 손자 홍봉주의 아들이 15세 때에 수장되었다.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는 전라감사로부터 "너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기니 배교하라"는 권고를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천지의 대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9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유항검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육시형을 당했다. 육시형이란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는 최대 극형으로서, 죄인을 일단 처형한 후에 그 시신을 머리,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여섯 토막을 내어 전국 각지로 보내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형벌이다.(30


해미 여숫골에서는 많은 신앙인들이 한꺼번에 생매장당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해가 하나같이 선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열살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목격했던 이주필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옛날 우리 신앙선조들은 처형이 늦으면 혹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포졸들이 밀어 넣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구덩이에 뛰어들었다고 한다.(31


홍주관아에서 원시장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한 후에 결박된 채로 물세례를 흠뻑 받고 성밖에 내버려져 얼어죽었다.(32


충청북도 연풍에서는 돌구멍에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기독교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혀 죽게 하였다. 이 돌의 크기는 지름이 1미터, 둘레가 5미터이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뚫린 구멍의 크기는 앞의 것이 지름 20센티미터, 뒤의 것이 6세티미터로 원추형이다.(33

 

 라. 피난생활


히브리서 11장 38절을 보면, 성서시대에 신앙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다고 하였다. 이밖에도 로마에서는 성도들이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숨어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깊고 험한 산 속으로 피난하여 강원도, 전라북도, 충청도 일대 깊은 산골에 수많은 교인마을들을 형성하였다. 피난처의 특징은 도경계 지역 또는 군 경계지역의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알려진 수리치골은 산 하나만 넘으면 충청남도 청양군과 예산군에 닿을 수 있는 공주시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고,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성지 역시 경기도 용인군에 가까운 안성군 경계에 위치하고 있고, 배론성지 역시 강원도 영월군에 가까운 제천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속 군청의 군사들이 교인들을 잡으러 오면 쉽게 다른 군으로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교인들이 숨어있는 관청에 체포령이 떨어지면 군사들은 먼길을 걸어서 잡으러 오기 때문에 군사들의 움직임은 교인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교인들은 급히 산을 넘어 피신했던 것이다.


교인들은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옹기를 만들어 구어 내다 팔면서 교인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바깥세상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망을 보다가 수상한 사람이 지나면 불을 지피는 척 할 때, 다른 사람들은 굴속에서 안심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또 옹기를 등에 지고 길을 나서면 아무 집에라도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가족을 찾거나 흩어진 교우들을 만나고 교회 소식을 전하기에도 편리했다. 진천 근교 명암리에 있었던 교우촌 사기장골에서는 엉겨 붙은 옹이 그릇들이 발견되었는데, 옹기를 굽다 말고 포졸들에게 잡혀갔거나 도망갔을 절박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34

 

6.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


이제 마지막으로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에 관해서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다.

상주시 청리면 삼괴2리에 있는 재실 마을에 1890년 중반에 세워진 신앙고백비가 있다. 이 신앙고백비는 높이 1.27미터, 폭 39센티미터, 두께 22센티미터의 크기로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신앙고백비의 특징은 조선사람의 모습인 모자, 얼굴, 그리고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별되어 있다는데 있다. 얼굴 부분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조선인의 갓을 씌웠다. 김삼록이란 신앙인이 세운 이 신앙고백비는 얼굴 부분인 십자가 중앙에 '천주'(天主)라고 크게 쓰고, 몸통 부분 상단에 '천주성교회 성호십자가'라 쓰고, 그 아래에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고, 둘째, 셋째, 넷째는 성직자들을 직위별로 차례로 위하고, 마지막 다섯째는 교우를 위한다고 적고 있다. 오직 하나님과 교회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이다.(35


둘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교인들은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황일광이란 백정출신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보냈다. 그런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교인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대우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농담조로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다.(36 또 윤권명이란 사람은 예수를 믿고, 종들을 모두 풀어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기도 했다.(37


셋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팔, 다리, 머리를 잘라 전국 각지에 보내는 육시형을 1801년에 당한 전주 지방의 순교자 유항검의 처 신희는 배교하고 목숨을 건지라는 관리에게 "기독교는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남편이 그로 인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 있으면서 섬기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빨리 죽기를 원할 뿐이다."라고 했고,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의 처 이육희는 "국법이 비록 엄하지만 기독교도 소중하다. 살기를 꾀하여 배교하기보다 순교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유항검의 조카 유중성 역시 "죽기를 원할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38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과 이순이 부부도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이순이는 유중철과 결혼하였으나 4년간을 부부생활 없이 정결하게 지내다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녀는 망나니 앞에서 매우 침착한 자세로 웃옷을 벗었고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머리를 도끼 밑에 놓았다고 한다.(39


1866년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를 당했던 프랑스 신부 다블뤼 주교의 증언에 의하면, 젖먹이가 딸린 여인들이며 노인과 처녀들이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그만 선물을 손에 들고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던 충남 합덕에서 가까운 신리교회로 3일, 6일 또는 8일씩 걸어서 찾아갔다. 그들은 잡히면 죽게될 죽음을 무릅쓰고, 머나 먼 산길을 발이 붓고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는 것과 혹심한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찾아갔다. 가서는 밤이 맞도록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결코 그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40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기독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국가정책은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했던 믿음의 조상들은 단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수백리 산길을 남몰래 걸었던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나 시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표현이었다.(41

 

나오는 말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시대와 마찬가지로 수 차례 총칼의 위협과 거짓진리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 때 우리 조상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입증해 보였다. 따라서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역사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될 뿐 아니라, 가혹한 고문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켜냈던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영성은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에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세속의 온갖 유혹들이 널려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혹을 이겨내고 시련을 극복하며, 이웃과 사회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R. H. Pfeiffer, 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with an Introduction to the Apocrypha, 류형기 역(한국기독교문화원, 1977), 14-19쪽.
2) 열왕기상 18장 이하.
3) James B. North, From Pentecost to the Present(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 1983), pp. 22-71.
4) J. D. Douglas,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4), s.v. "catacombs."
5)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313쪽.
6) 상게서, 312쪽; {학원대백과사전} 26권(학원출판공사, 1994), s.v. "제암리학살사건."
7) {한국기독교회사} 435쪽.
8) 상게서, 48쪽.
9) 상게서, 40-45쪽.
10)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이수웅 옮김(분도출판사, 1984), 5쪽.
11)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분도출판사, 1979), 25-49쪽.
12) {한국기독교회사} 69쪽.
13) 상게서, 69-71쪽.
14) 천주교인 수천 명의 목이 잘린 한국 천주교 최대의 성지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당시의 실권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강토를 서학(西學)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프랑스 함대가 들어왔던 양화진 나루터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자르게 하였다. 이곳에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재판도, 누구라는 기록도 없이 무더기로 처형되어 강물에 던져졌고, 처형장이던 암벽 봉우리는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15) 1801년 이후 중국인 주문모, 프랑스인 앵베르, 김대건 등 사제만 11명이 순교한 곳이다.
16) 이승훈 일가(一家) 4대가 순교한 곳으로 천주교 성인(聖人)만 44명이 나온 처형장이다.
17) 용산전자상가 부근으로 김대건에 이어 한국인으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부친 등 9명의 천주교 성인(聖人)을 낸 처형장이다.
18) 이어지는 글의 내용은 이충우, {신앙유산답사기: 발로 쓴 한국천주교회사}(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6)을 전권 참고하였다.
19) {신앙유산답사기} 46-47쪽.
20) {신앙유산답사기} 89쪽.
21) {신앙유산답사기} 198쪽.
22) {신앙유산답사기} 178쪽.
23) {신앙유산답사기} 73-76쪽.
24) {신앙유산답사기} 236쪽.
25) {신앙유산답사기} 166-167쪽.
26) {신앙유산답사기} 220-221쪽.
27) {신앙유산답사기} 132-134쪽.
28) {신앙유산답사기} 195-196쪽.
29) {신앙유산답사기} 161-162쪽.
30) {신앙유산답사기} 161쪽.
31) {신앙유산답사기} 76-77쪽.
32) {신앙유산답사기} 90쪽.
33) {신앙유산답사기} 287-289쪽.
34) {신앙유산답사기} 251-253쪽.
35) {신앙유산답사기} 301-305쪽.
36) {신앙유산답사기} 138쪽.
37) {신앙유산답사기} 139쪽.
38) {신앙유산답사기} 178-179쪽.
39) {신앙유산답사기} 168쪽.
40) {신앙유산답사기} 46쪽.
41) {신앙유산답사기} 194쪽.

참고서적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원리} 분도출판사, 1979.
이충우. {신앙유산답사기: 발로 쓴 한국천주교회사} 도서출판 사람과 사람, 1996.
{학원대백과사전} 26권. 학원출판공사, 1994.
달레, C. C. {조선교회사서설} 정기수 역. 탐구당, 1966.
드 동쿠르, A.S. {순교자의 꽃} 김영환 편역. 춘추사, 1993.
리치, 마테오. {천주실의} 이수웅 옮김. 분도출판사, 1984.
Pfeiffer, R. H. {신약시대역사와 외경개론}(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with an Introduction to the Apocrypha). 류형기 역. 한국기독교문화원, 1977.
Douglas, J. D. Ed.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74.
North, James B. From Pentecost to the Present. Joplin, Missouri: College Press Publishing Co.,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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