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림의 관상
한림이 선녀를 만난 후로는 친구를 찾아보는 일도 없고, 손님을 맞는 일도 없이 조용히 화원에 있으면서, 밤이면 선녁사 옥시를 기다리며 스스로 감격하여 마지아니하니, 한림의 기다림이 점차 간절하여지니라.
하루는 두 사람이 화원 협문을 거쳐 들어오는데, 앞에 선 이는 정십삼이요, 뒤에 따르는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이더라, 정생이 뒤에 따르는 사람을 불러 한림에게 보이면 말하기를,
“선생은 태극궁의 두진인인데 상 보는 법과 점치는 술법이 이순풍(당대에 신선술을 익힌 사람)이나 원천강 같으므로, 이제 양형의 상을 보고자 하여 모시고 왔소이다.”
한림이 두진인은 두 손을 잡아 맞아들이며 이르기를,
“높으신 성화는 이미 듣던바, 이제 이렇게 뵈오니 천만뜻밖이로소이다. 선생이 필시 정형의 상을 보았을 터인데 어떠하더이까,”
장생이 대답하되,
“이 선생이 내 상을 보고 삼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고 또 장차 팔주자사가 되리라 하는데, 나에게는 넉넉히 맞을 것이니, 형도 시험 삼아 물어보오.”
한림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은 곧 복을 묻지 아니하고 다만 재앙을 물을 따름이오니, 오직 선생이 바른대로 말해보라.”
두진인이 한동안 자세히 본 뒤에 일러주기를,
“양한림의 두 눈썹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봉의 눈이 살쩍을 향했으니 벼슬이 삼정스에 이를 것이요, 얼굴 빛이 분을 바른 듯하고 둥근 구슬 같으니, 이름이 장차 천하에 들릴 것이요, 용행호를 만리 밖에 봉할 것이니 무슨 일이든 실패됨이 없겠으니, 한갓 오늘 이 마당에 횡액이 있으니, 만일 나를 만나지 않으셨다면 위태로울 뻔했소이다.”
한림이 말하기를,
“사람의 길흉과 화복이 스스로 따라가 구하지 아니하면 모두 생기는 법이나, 오직 병이라 하는 것만은 사람이 피하기 어려운 바인데 나에게 중병이 들릴 징조는 없느뇨?”
두진인이 이에 대답하되,
“이는 참으로 심상치 않은 재앙이렷다! 푸른 빛이 천정(天庭)을 뚫었고, 간사한 기운이 명당을 침모하였으니, 한림댁에 혹시 내력이 분명치 못한 노비가 있지 않소이까?”
한림은 속으로 벌써 장여랑인줄 깨달았으나 정이 앞을 가리므로,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 하지 않으며 대답하기를,
“그러한 일은 도시 없노라.”
두진인이 다시 묻기를,
“그러하오면 혹시 옛무덤을 지나치다가 마음이 흔들려 섬찟하였거나, 혹은 귀신과 함께 꿈 속에서 논 일이 있소이까?”
하림이 대답하되,
“역시 그런 일도 없노라.”
정생이 겻붙여 말하기를,
“두선생의 말씀에는 털끝만치도 틀림이 없으니, 양형은 자세히 생각해보오.”
한림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두진인이 다시 다짐하기를,
“사람은 양기(陽氣)요. 귀신은 음기(陰氣)인 고로 주야가 서로 바뀌고 인신(人神)이 서로 다름은 물과 불이 서로 받아들이지 못함과 같거늘, 이제 상공의 얼굴을 보매 귀신에게 홀리어 이미 몸에 어리었기로, 수일 후면 병이 골수에 박혀 목숨을 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노니 그 때에 이르러 상보는 자가 말하지 않았다고 원망치 마소이다.”
한림이 내심으로 두 선생의 말이 신기하나, 장여랑이 나와 더불어 즐거웁게 길이 지낼 것을 굳게 맹세하고, 서로 사랑하는 정이 날로 더한데 어찌 그가 나를 해칠 것이랴 하는 생각에서 말을 내쳐 두진인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장수와 단명은 날 때부터 정한 바이거늘, 내게 진실로 장상(將相)과 부귀(富貴)할 상이 보일진대 요사한 귀신이 어찌 감히 나를 범하리오?”
두진인이 대답하되,
“사생(死生)이 다 상공에서 있고 내게는 관계없는 일이 아니리오.”
하고 소매를 떨치며 가거늘, 한림도 또한 만류치 아니하더라.
정생이 위로하되,
“양형은 본디 길한 사람이라 신명이 필연 도우실 터인데 어찌 귀신을 두려워할 것이오? 술객들은 이따금 허튼 소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니 가증한 노릇이렸다.”
이에 술상이 나오자 종일토록 크게 취한 후 각기 헤어지니라.
한림이 이날 밤에 술이 깨어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여랑이 오기를 기다리나 끝내 종적이 없기에, 한림이 책상을 치고 이르기를,
“밝은 샛별은 빛나거늘 아직도 미인은 오지 않는구나.”
하고 촛불을 끄고 자려는데, 갑자기 창 밖에서 여랑이 울며 호소하기를,
“낭군이 요사한 도사의 부적을 머리위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첩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겠나이다. 첩이 비록 낭군의 뜻이 아님을 아오나, 이 역시 인연이 끝났고, 요사한 것들이 날뛰는 바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데 낭군은 몸을 돌보소서. 첨은 이제 이별을 고하나이다.”
한림이 크게 놀라며 문을 열고 본즉 벌써 온데 간데 없고 단지 한 조각 글 만이 위에 놓였기에 곧 떼어 보니 여랑이 지은 글이라 씌였되,
옛적 아름다운 기약을 찾아 색구름을 밟았고
다시 맑은 술잔을 거친 무덤에 부었더라
깊은 정성 본받지 못하고 은혜가 끊겼으니
낭군을 원망치 아니하고 정군을 원망하노라
한림이 한 번 읊고 서러워하나, 한편 생각하면 괴이쩍곧호 이상한 일인지라, 머리를 만져보니 무엇인가 상투에 있기에, 내어 보니 곧 귀신을 쫒는 부적이더라.
“요괴한 사람이 나의 일을 그르쳤도다!”
하고 분연히 꾸짖고는, 드디어 그 부적을 찢고 다시 연랑의 글을 잡아 읊어보다가 크게 깨달으며 이르기를,
“여랑이 몹시 정생을 원망하니 이는 정십삼랑의 장난이로다! 기실은 악한 일이 아니나, 좋은 일을 짖꿎게 훼방함이 두진인의 요술이 아니오, 정생이 한 것이니 내 반드시 욕을 보여주리라!”
하고, 여랑의 글을 차운하여 글 한 수를 지어 주머니 속에 감추고는 탄식하되,
“글은 비록 되었으나, 누구를 주어야 옳으리오?”
그 글을 읊었으되,
냉연히 바람을 몰아 신통한 구름에 올라가니
꽃다운 넋이 외로운 무덤에 붙임을 말하지 마라
동산에 백 가지 꽃이요, 꽃 밑에 달이거늘
고인이 어디선들 그대를 생각지 않으리오.
첫댓글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항상 좋은일 가득하시고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십시오.
久久自芬芳 오래도록 향기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