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공정 2000년 10월 중국이 고구려 문제에 대한 공식입장을 발표한 후 이 공식입장을 관철할 일환으로 1년 4개월이 지난 2002년 2월 동북공정을 정식 가동시켰다. 동북공정의 공식명칭은 ‘동북변방 역사와 현황 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研究工程)’이다. 구체 내용에는 동북지방사, 동북민족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중조관계사, 동북과 러시아 원동간의 관계, 동북지역사회안정전략 등 6가지에 대한 연구이다. 5년을 기한으로 하고 1500만 원(약 한화27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고구려 문제는 동북공정의 한 개 내용에 속한다. 중공중앙정치국위원·중국사회과학원장 이철영(李鐡映)과 재정부장 항회성(項懷誠)을 고문으로 하고, 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낙림(王洛林)을 총책임자로 하였다. 그리고 중국변방사지(史地)연구중심 연구원 마대정(馬大正)을 주임으로 하는 18인 전문가위원회를 조성하였다. 다음은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삼성사회과학원의 연구원 및 대학교수 등으로 방대한 연구팀을 조성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출범시킨 이유를 아래와 같이 규정지었다: ‘한국은 경제성장을 이룩한 1970년대부터 민족정서가 고양되었다. 일부 소장파학자들은 한국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를 민족 자부심을 과시하는 버팀목으로 사용하려 한다. 1990년대 말 중국학자들은 한국학술계의 이런 동태를 파악한 후 역사에 대한 과오를 시정할 절박성을 느껴 동북공정을 출범시켜 고구려 문제에 착안하게 되었다.’ 동북공정에 6가지 내용이 있으며 고구려문제는 그 중 한 가지의 1/3에 불과하다고(기계적으로 말하면 고구려 문제는 동북공정의 1/18―필자 주) 중국학자들은 강조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마치 동북공정=고구려문제로 왜곡하며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고구려 문제가 동북공정의 주요 핵심내용이므로 본문에서 이하 ‘고구려공정’으로 부르련다. 한국학자들도 앞으로 ‘고구려공정’으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구리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제하는 정인갑 교수 ©편집부 | | 2003년 6월 24일 <광명일보(光明日报)>에 <고구려역사연구의 몇 가지 문제를 논함(試論高句麗歷史研究的幾個問題)>이란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필명 변중(邊衆)을 저자로 한 이 문장에서 ‘고구려정권의 성격을 마땅히 중국 중원왕조의 제약을 받으며 지방정권이 관할한 중국고대변방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장이 발표되자마자 한국의 학계와 매체의* 큰 파문과 강렬한 정치적 반발을 유발하였다. 한국은 고구려공정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으며 이른바 고구려역사 ‘보위전’이 발동되었다. 한양대학 교수 신용하(慎镛厦)는 고구려공정을 ‘역사제국주의 작업’이라 점찍었고, 한국외교부차관 이수혁(李秀赫)은 “한국정부는 강경태도로 중국의 고구려역사왜곡에 대응할 것이며 모든 대가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미국과 대만 카드의 사용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2003년 12월 9일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근대사학회 등 17개 학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연합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중국은 마땅히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의 행위를 즉각 정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2004년 9월 17일 중국 측의 제의로 한중 두 나라의 학자가 서울에서 고구려역사의 귀속에 관한 학술포럼이 개최되었다. 고구려공정의 창시자인 손진기는 ‘고구려의 주체가 중국에서 발생했고, 원 고구려의 2/3영토가 중국에 있으며, 3/4의 인구가 중국에 귀순했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내놓으며 고구려가 중국지방정권임을 역설하였다. 또 당나라가 고구려를 합병했고 신라가 백제를 합병했으므로 고구려가 통일신라에 포함되지 않으니 당연 한국사에 넣을 수 없다’라며 한국사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한국사학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가 한국사에 속하여야 한다는 많은 이유를 제시했다. 이번 회의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은 또한 대중 선전수단을 총동원하여 중국의 고구려공정에 반격을 가하였다. 이를테면 역사극 <주몽>,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및 <대조영> 등을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그중 <주몽>은 2006년 5월에 개봉한 후 연속 25주간 시청률 최고이며 2006년 시청률이 가장 높은 역사극이었다. 그 해에 상영한 인기극 <궁>과 2년 전에 상영한 <대장금>의 시청률을 초월하였다. 이 문제에서 북한도 한국과 입장을 같이 하였다. 북한 학술잡지 <역사과학>은 2008년 첫 기에 문장을 발표하여‘고구려는 조선민족의 국가였다. 우리나라 인민은 시종일관하게 고구려를 조선역사체계 중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어떤 대국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하였지 ‘중국’국명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중국학자들의 고구려 공정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국가에서 언론을 통제하므로 이런 부류 학자들의 문장이 신문, 학술지 등 출판물에 게재할 수 없었지만 사석에서 그들은 많은 반대의견을 토로하였다. 그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a,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넣을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고구려를 응당 조선·한국역사로 보아야 바람직하다.b,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서 얻는 것은 별로 없다. 이 문제로 국제 무대에서 조선, 한국과 등지면 중국이 보는 손해가 엄청나게 클 것이다.c,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급부상에 주변 국가 및 세계 많은 나라들이 위구심을 가지는데 이렇게 처사하면 그들은 앞으로 단합하여 중국을 경계하거나 심지어 중국을 반대하고 고립시키는 세력으로 뭉칠 것이다. 항간에서는 이런 말이 떠돌았다. ‘고구려공정에 관한 보고서에 중국 국가주석 호금도(胡錦濤)가 사인하였으므로 별 수 없다. 호금도의 임기가 만료된 후인 2013 년경에 가서야 고구려 문제의 해결을 볼 듯하다.’ 그러나 국외, 국내의 반발이 심하므로 2013년까지 끌지 못하였다. 고구려공정 이후 출판된 고구려에 관한 모 책자에 발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2006년 이후에 편집한 중국 소학·중학의 교과서에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마치 동북아역사에 고구려라는 나라가 없는 것처럼 됐다. 중국 외교부가 고구려 문제에 관한 진화에 나섰다. 2007년 당시 외교부장인 이조성(李肇星)은 고구려공정의 해결을 위하여 고구려공정의 관련학자들을 집결시켜 좌담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서로 대립되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 해결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까지는 고구려 중국역사 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김육보의 제자 대여섯 정도이던 것이 지금은 엄청 많이 불어난 상황이다. 중국정부는 잠시 각자 자기의 견해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고구려에 관한 중한 양국 학자의 토론회를 소집할 수는 있으나 상대방에게 질의하거나 상대방의 견해를 반박하는 내용을 삼가 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내렸다. 금년 7월 한중 양국 학자들이 집안에 모여 고구려 문제의 포럼을 진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상기 규정을 지켰지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현재 고구려 문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태도는 한국과 동상이몽(同床異夢)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 처사에 대해 한국은 당연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