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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6년 12월 12일, 총회 주최 '신사참배반대운동70, 재건교회60' 학술대회에서 발표 한 내용이다. 위원회에서 책자로 만들기 위한 수정기간을 거쳐 이 곳에 올려 놓았다. 각주는 이곳에 올리는 과정에서 누락되었다. 진리에 목숨걸고 (서울: 세한기획사, 2007)를 참고하기 바란다. 특별히 이 행사를 통해서 재건교회 내외 적으로 많은 홍보와 격려가 됨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싶다. 그리고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총회 행사준비위원회 회원들께 깊은 감사드린다. 보다 감사한 것은 이번 행사를 통해서 '재건교회역사연구소'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뜻있는 분들의 후원이 이루어지면서, 서울노회 서울성경아카데미 부설기관으로 발족되어 창간호 역사와 현장 (3-4월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기관이 이번 행사의 조그만 열매로서, 재건교회의 발전과 신앙전수를 위해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을 바라면서 재건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재건교회의 신앙전통: 언약신앙
김영호 목사
Ⅰ. 서 론
요즘 일본 정치인들의 신사참배와 군국주의 부활,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교과서 왜곡으로 인해 극동 아시아 국가들에게 긴장감을 조성시키고 있다. 이에 맛 물려 중국의 동북공정 정책으로 인한 한반도 정체성 흔들기와 북한의 핵실험이 더욱 우리의 앞날을 어지럽게 하는 듯하다. 특별히 기독교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가는 가운데 침체 일로에 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재건운동 당시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앙 지킨 순교자들과 신앙의 승리자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우리의 어려운 현실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유산은 결코 일회용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구원역사 안에서 계속 전수 될 수 있는 신앙전통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힘을 얻는다.
우상숭배와 기타 여러 가지 신앙핍박으로 인한 위기의 환경과 성경 중심에 흐르고 있는 신앙사상이 어울려지면서 순교신앙 전통이 성경 안에서와 세계 교회 역사 안에서 맥을 이어간다. 또한 이 신앙 전통이 오늘날 까지 계속 전수 되고 있다. 구약시대 초창기에 아벨의 희생을 시작으로 이 전통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안에서 계속 펼쳐진다. 로마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그 절정을 이룬다. 이 후 사도행전 시대와 초대교회의 십대 박해 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의 교회 박해는 유럽 전체에 다발 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의 위클리프(Wycliffe)와 틴델(Tyndale), 보헤미아(체코)의 후스(Hus)와 제롬(Jerome), 독일의 수많은 종교개혁에 참여한 자들, 그리고 화란, 벨기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지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공산주의 치하에서 신앙 투쟁한 지하교인들의 희생은 말할 수 없이 많다. 이외에 많은 국가들에서 종교적-사상적-정치적 핍박으로 순교한 성도들은 다 헤아릴 수 없고, 특히 일제 치하에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희생된 성도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많다. 앞으로 이러한 순교의 전통은 주님 오실 그날 까지 계속 될 것이다.1)
앞으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질문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재건교회 신앙운동들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재건교회 배아기)과2) 재건운동(재건교회 태동기)3) 저변에 깔려있는 신앙전통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이 신앙전통은 성경적-역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있다면, 이 신앙이 세계교회사 안에서 특히 장로교회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Ⅱ. 언약신앙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순교신앙 전통을 만들어내는 진리와 환경 요소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순교할 수 없다. 진정한 순교는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순교가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산상보훈, 팔복(마5:1-12)에서 잘 나타난다.
재건교회 신학자였던 김 문제 목사는 신사참배반대 운동 당시 만주에서 만들어진 장로교인의 언약서(1940)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643-1723)와의 관계 속에서 같은 신앙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부선 선교사의 말을 빌려서 강조하고 있다. “이 언약서는 스코틀랜드 언약자들의 본을 따라 성경을 중심하여 신사참배의 죄 됨과 이에 절하거나 동조하는 자들과는 동참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을 문서화해서 이에 동의하는 신자들은 서명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4) 그리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 당시 “성도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소위 언약서를 작성하여 결속한데 있다”고 갈파했다.5)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신사참배강요를 피해서 만주로 이주하여 신앙 지키던 자들이 장로교인의 언약서를 만든 후 그들은 감옥에서 순교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언약신앙 중심으로 순교의 신앙으로 불사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중심에 흐르고 있는 언약신앙은 이 두 장로교 인들이 종교핍박에서 순교하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 시대의 모든 개혁자들, 특히 청교도들에게는 이러한 언약신앙이 그들 심중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6) 이러한 신앙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약신앙의 성경적 개념들을 살펴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1. 언약 신앙이란 무엇인가?
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인 언약은, 순교신앙전통의 중요한 진리 요소로서, 성경 역사 안에서 중심사상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계 교회사 안에서도 뿌리신앙으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약신앙이란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언약’ (베리트 -תירב)이다. 이 특별한 용어는 구약 성경 전체에 깔려있다.7) 특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개념은 하나님의 구속의 의도가 어리어 있다. 단어 자체의 의미(계약, 협정 등)와 하나님의 구속 의지가 융합 되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의미는 그 당시 이스라엘 근동지방에서 사용하던 쌍방 간의 정치적인 협약 개념과 차이가 있고, 생각보다는 신앙적이고, 포괄적이며, 또한 복합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언약이라는 개념을 신학자들 마다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
언약의 내적 개념 안에서는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도 하고8), 창조언약과9) 구속언약10)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혹은 언약이라는 용어대신 약속의 개념으로 구원과 축복의 범위를 넓혀서 강조하기도 한다.11) 이러한 견해들을 크게 구속 역사적 관점과12) 하나님 나라의 관점의13) 해석방법들에 의해서 각각 분류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에서 잠깐 예를 들어보면, 가장 문제되는 것이 ‘아담언약’과 ‘시내산(십계명) 언약’에 대한 이해이다. 이들의 언약이 행위언약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은혜언약으로 인정하느냐는 문제이다. 이러한 정의에 따라 언약의 요소들인 은혜와 행위 그리고 언약의 당사자 간의 관계, 즉 일방적 관계냐 아니면 쌍방의 계약적 관계냐의 강조 여부에 따라 다르게 정의 될 수 있다. 그리고 언약들에 대한 분석이 본문 자체에서 보느냐 아니면 전체 구조와 모두 연결해서 보느냐에 따라서도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법적 개념과 구속적 개념의 관계를 타락이전과 이 후로 분류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언약에 대한 견해들을 재건교회 신학자였던 김 문제 목사의 언약개념을 살펴보면서 필자의 입장을 다음 장에서 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차이는 신학적 다양성의 표현이지 잘못된 신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신학적 다양성에서 서로의 보편성을 하나로 묶어서 통일성 있게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언약 사상은 보다 균형 잡힌 개념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한 면에만 치우쳐서 자기들의 유익에 따라 사용할 때는 균형이 깨지고 언약개념이 변질되어 다른 전통을 만들 수도 있다. 언약신앙과 율법주의 혹은 언약신앙과 은혜남용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대응관계가 성경시대와 초대교회 그리고 중세 교회들안에서도 서로 상이한 전통들로 대립되었다. 특히 카톨릭의 형식주의 전통과 개혁주의의 하나님 중심 전통 간의 대립으로 유럽대륙이 어려움을 겪었다. 이뿐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도 이 두 사상이 대립되면서 신앙투쟁 혹은 배교라는 대립 구조로 나타났다. 이러한 대응전통이 고난의 시대에는 참 교회와 거짓교회의 대조된 모습의 특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아담언약과 십계명언약에 대한 논쟁
구약성경에 나타난 언약들 중 특별히 아담 언약과 십계명 언약 대한 이해는 재건교회 신앙운동들인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재건신앙운동을 바로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이 언약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언약과 십계명 언약의 신학적 중요성과 개념에 대한 이해가 참 교회 신앙 정체성과 장로교의 정통성을 규명하고 정립하는데 중요한 표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 두 언약 사상이 중심 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4)
이런 점에서 이 두 언약들은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배교한 한국장로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파기한 거짓교회임을 증명해 준다. 특히 시내산(십계명) 언약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잘못되면 교회나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이는 이에 상응하는 잣대가 없어서 참 교회와 거짓교회, 참 성도와 거짓성도를 구별하는 표준이 애매해 지기 때문이다. 십계명 곧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정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죄를 판정할 수 없다. 또한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로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 대해서 알 수 없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구원에 대해서 말하기 전(3:19-6:23)에 죄와 심판에 대해서 먼저 설명(1:18-3:18)하고난 후 율법의 기능을 로마서 7장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을 보통 십계명언약 내지는 율법언약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는 행위를 강조한 언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문제 목사는 그의 책 십자가와 십계명 제1권 ‘계약으로서의 십계명’을 다루면서 서두에 이렇게 말한다. “개혁교회까지도 종전에는 시내산 계약은 율법언약 또는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으로 생각하였고 신약시대의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은 그와 반대로 보아 왔다”고 비평하고 있다.15) 그는 클라인 교수의 구속언약 입장에서 시내산 언약을 은혜언약만으로 본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완전한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죄가 충분히 강조 되여 있지 않았으므로 갈보리 산에서의 구속의 언약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내선 언약을 추가 할 것이고 (갈3:19; 롬5:20) 율법 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의 개입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자(dispensationalists)들의 주장과 같이 율법의 지위를 악화시키거나 그리스도 오신 후 다 페기된 것으로 보는 태도는 부당한 것이다. 우리는 계명을 이행하기 전에 십계명도 은혜의 언약이 다름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은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의 율법언약과 갈보리 산에서의 구속언약은 언약의 양면 또는 안팎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구속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완성이요 목적 달성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기본적 언약(fundamental covenant)이고 십자가 언약은 종국적 언약(final covenant)이요 율법의 언약은 이 두 언약의 중간 언약(medium covenant)이라고 할 수 있다.16)
이와 같이 김 문제 목사가 시내산 언약을 은혜언약으로만 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언약이라는 단어 베리트(תירב)를 신약의 디아데케(διαδεκη)와 연결해서 생각하면서 ‘계약’이나 ‘협정’이라는 단어의 뜻으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일방적 개념으로 이해하려하기 때문이다.17) 그의 이러한 견해는 다른 언약들과의 연관 관계를 설명 하는 가운데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직접적인 언약체결을 하고 있는 창세기 15장과 17장(할례언약)에서 찾지 않고 그저 약속만 기록되어 있는 12장 1-3절 관점에서만 보고 있다.18) 이는 아브라함이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려운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 그는 시내산 언약을 너무 율법적 기능 에서만 강조하려한다. 둘째, 그의 저술 시리즈 ‘십계명과 십자가’라는 틀 안에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주입시키려 한다. 셋째, 재건교회가 신학적으로 율법적이지 않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은혜주의에 너무 집착했다. 그렇다고 은혜남용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그의 치우친 견해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해야 한다. 시내산 언약을 행위언약으로만 보는 것을 반대하는 점에서는 동의 하지만, 은혜언약만으로 보려는 관점에는 일치할 수 없다. 필자는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으로 양자택일로 부르지 않고, 두 언약을 함께 부르기 위해서 모세 언약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모세 언약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과 계약적인 면이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며, 또한 은혜와 행위개념이 함께 맞물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분리 할 수 없는 존재(being)와 실천(doing) 개념이 그 언약에 함께 어울려져 있다는 뜻이다.19)
더 나아가서 시내산 언약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 질문에는 김 문제 목사가 대답하기 곤란한 점이 분명히 있었다고 추측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그는 개혁교회가 시내산 언약을 행위언약으로 여기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를 행위언약으로 부르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행위언약으로 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언약개념과 대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에 대한 금지규정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쌍방 간의 체결로 보기 보다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 시내산 언약을 은혜언약으로 보기 때문에 아담언약도 은혜언약으로 보려하는 것이다. 스코틀랜드 자유 장로교회 출신 존 머레이 교수는 이런 점을 “아담의 관리체제”(The Adamic Administration)로 보고 행위언약으로 여기지 않는다.20) 그의 입장은 하나님과 아담 관계는 다른 언약개념과 다르며 또한 언약이라는 단어도 쓸 수 없다고 한다.21) 이는 그들의 관계가 아담이 죄 짓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서로의 협약에 의해서 체결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머레이 교수의 입장을 다 인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언약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금지명령 안에는 시내산 언약에 나타난 언약의 양면의 요소들이 여전히 담겨져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창조된 아담에게는 순종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곧 금기명령은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관리체제에 따른 창조자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담의 관리체제”에서도 언약의 실제적인 양면, 은혜와 행함 요소가 함께 어울려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성경적 언약개념 안에는 은혜와 행함이 함께 어울려져 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하늘 성도는 마치 빛과 소금 같아서, 소금이 소금으로서의 맞을 내야 소금이고, 빛이 비춰야 참 빛이 되듯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구약 성경의 언약관계들도 이러한 언약의 양면을 삶의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과 택한 자와의 관계를 왕과 백성, 부부, 그리고 부자간의 관계로 규정 짖고, 법적, 계약적, 그리고 은혜와 사랑 관계와 요소가 함께 어울려진 양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균형잡힌 언약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며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하나님 나라 건설이 그 언약의 객체를 이루고 있다.
3.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나타난 언약사상
종교개혁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장로교회로서 성경, 신앙고백, 그리고 헌법에 바탕을 둔 언약신앙을 지켜나가기를 노력하였다. 그래서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 걸고 언약을 준수하기를 원했고 또한 새롭게 언약 체결하여 동맹하거나 평화를 이루어갔다. 이러한 언약 요소들을 순교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오랫동안 이 언약요소들을 개인적-사회적-정치적 활용과 적용을 그들의 순교신앙 안에서 사용해 왔다. 특히 그들은 최초의 장로교회로서 언약신앙을 주창해 왔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00여 년 동안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에 대해서 서 요한 목사가 그의 논문에서 잘 정리해 주고 있다. 그가 요약한 다섯 가지 언약사상은 다음과 같다.22)
1)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이 관계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체결관계를 말하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기본적인 언약사상이 된다. 곧 은혜언약과 행위언약의 양면의 요소를 포함한 신앙관이다. 이 사상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역사 1643년-1672년까지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2)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592년에 총회원들이 개인적 죄를 고백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함으로 국가적 개혁을 위한 기본 틀에서 나타난다.
3)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책임 완수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1596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가 자신들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채결한 언약관계이다. 이 후에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난 교회언약이다.
4) 정치적-사회적 중요성과 함께 사용되었다. 개혁교회 신앙 보호를 위해서 귀족들과 더불어 언약체결을 했다. 이에 대한 예는 1638년의 스코틀랜드 국민계약 (Scotland National Covenant)과 1643년의 엄숙동맹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등이다. 이는 곧 감독교회의 큰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계약이다.
5) 스코틀랜드 국민의 불안과 두려움을 방어하기 위해서 왕들에 의해서 체결된 언약적 사용이다.
이 다섯 가지 언약 요소들은 스코틀랜드를 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장로교회의 정체성과 정통성 확립에도 중요한 신앙사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언약사상이 교회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당연한 일이다.
III. 재건교회 배아기와 태동기에 나타난 언약신앙
이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우리는 재건교회 배아기와 태동기에 나타난 언약신앙의 요소들을 그 당시 자료들을 통해서 직접 찾아보려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사용했던 다섯 개의 요소 중 마지막 요소는 신사참배 강요 당시의 사정과 전혀 다른 환경이므로 제외하고, 나머지 네 가지 언약요소만을 가지고 당시에 생성된 언약서, 교회 공회 결의서, 설교, 그리고 찬양가사 등에서 언약사상을 발굴해 내려한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재건교회의 정체성이 보다 확립될 것이며, 또한 장로교회로서의 정통성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 강요라는 어려운 박해를 능히 이길 수 있게 하는데 언약신앙이 큰 원동력과 버팀목이 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1. 재건교회와 언약신앙
신사참배 강요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은 애국심 가지고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 이는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신문화 충돌을 극복 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참 교회 성도들의 강인한 신앙 밖에는 없다. 이는 그들이 언약신앙이라는 진리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순교를 불사하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 사랑을 행함으로 보답하는 실천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신앙모토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22:37)에 기본을 두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을 박해 속에서 지키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종교개혁 당시의 모든 개혁자들의 신앙사상은 언약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고, 청교도들과 언약주의자들에게는 더 더욱 이러한 신앙사상이 개인의 삶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 나라 건설에 가장 기본적인 신앙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23)
우리가 언급하려하는 첫 번째 언약요소는 이남재건교회의 재건운동의 3대 주의와 5대 주장 중 3대 주의 신앙모토이다. 언약신앙 4가지 요소 중 무려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완벽한 언약신앙의 결과이다.24)
3대주의
1. 여호와께만 충성하자.
2.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자.
3.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이 문서 중 “여호와께만 충성하자”는 주의는 종교개혁 당시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인 ‘하나님 중심’과 같은 신앙관이다. 제 2주의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자”는 언약의 두 번째 요소는 성도의 경건한 삶과 신앙향상을 강조하고 있다. 회개를 통하여 회복을 부르짖고 보다 낳은 신앙성장을 위한 선지자적 외침이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회개를 통한 보다 낳은 은혜와 긍휼을 체험하게 하는 개인 신앙 회복을 강조하는 언약요소이다. 제 3주의 “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는 언약의 세 번째 요소로서 참 교회와 거짓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릴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이와 같이 3대주의의 사상은 언약신앙이 듬뿍 담겨있는 성경적 바른 신앙 주장들이다. 우선 첫 번째 언약 요소부터 살펴보자.
“여호와께만 충성하자”는 실재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신앙투쟁의 승전적 모토이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명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의식뿐 아니라 지켜 승리했다는 양면적 확신의 외침이다. 이러한 신앙은 순교신앙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기초적 언약 신앙이다. 또한 어떠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신앙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해방 이후 경건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하다. 이 신앙 모토에는 언약신앙의 양면인 은혜와 행함을 함께 실천하고자 하는 균형잡힌 언약신앙을 함양하고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48)에 “이러한 언약 이해를 고조, 강화, 고무시켰다.”25)
이북 재건교회의 배아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 언약서의 명칭은 장로교인의 언약(1940)이다. 장로교 27차 총회(1938년 9월) 이후 신사참배 반대운동 당시 이북에서 신앙 생활하던 성도들이 만주로 피신 가서 그 곳에 있던 신앙인들과 함께 금식기도와 성경을 연구하면서 만든 신앙 언약서이다. 이 언약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26)
장로교인 언약서(1940)
언약 (言約)
서론: 현 한국교회의 형편을 보건대, 배교와 권징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상숭배를 피하고자 하는 신자는 기성교파와 동참하지 않고 나와야 할 것을 확신하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우리는 다음 것들이 우리가 피해야 할 우상숭배 죄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으로 믿는다.
1. 신자 (행11:26, 요15:8, 요8:31, 눅14:26-27)
1) 죽은 자를 매장 한다 (행8:2, 요19:40-42).
2) 그들을 위해 애곡한다(행9:39, 요11:35, 롬12:15. 행8:2)
3) 그러나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한다(사45:9, 롬9:20).
4) 또는 그의 심판과 우리를 고민케 할 때에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문치 않는다(시119:75, 욥 1:21-22, 렘10:6)
5) 또 소망 없는 자 같이 슬퍼하지도 않는다(살전4:13, 삼하12:23)
2. 죽은 사람의 과거 덕행에 불구하고
1) 산자는 죽은 자에게 묻지 않는다(삼상28:3-19, 신18:11)
2) 죽은 자를 찾지도 않는다(시8:19).
3) 묻기 위하여 불러올리지 않는다(삼상28:8-11,13)
4) 또 이런 비슷한 어떤 것에도 묻지 않는다(살전5:22)
3. 그러나 신인 예수 그리스도는 제외 된다(요1:1-14, 딤전2:5, 빌2:9-11)
1) 신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겔28:2-10, 행12:13-15)
2) 또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어떤 사람에게도 돌릴 수 없다(행14:13-15)
3) 또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다(시146:3, 사2:22)
4) 또 하나님께만 있는 생사권을 사람에게 돌릴 수 없다(요19:10-11)
4.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고전 8:4-6, 시44:6)
1) 그리고 신자는 다른 신을 둘 수 없다(출20:3)
2) 섬길 수 없고(왕하 17:35, 마4:10),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고(왕하17:33-40), 경배할 수 없고(마4:10), 두려워할 수 없고(왕하17:35), 교통할 수 없고(신 18:10-11), 절할 수 없고(왕하178:35), 기도할 수 없고(사45:20, 44:11,17), 제사 드릴 수 없고(왕하17:35, 출22:20), 위하여 제물이나 세상을 차릴 수 없고(겔 8:8:13-14), 또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위해서도(고전8:5), 마귀를 위해서도(고전 8:5) 울 수 없다.
또 어느 우상이라도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고(렘10:3-5), 그를 위 해서 이것을 해 달라고 물을 수도 없고(출32:1,7), 이들을 하라고 명하는 자들에게 순종할 수 없고(신13:1,3, 6-8, 18:20-22, 행5:29, 갈1:8-9, 갈3:5) 이들의 일에 동참할 수 없고(고전 10:20-21), 이들에[게서 피해야 하며(살전5:22), 또 형제로 하여금 실족케 말 것이다(고전8:13).
5. 신자는 해나 달이나 별이나 하늘의 천사들을 경배하거나 섬길 수 없고(신4:19) 목석 의 우상에게도(렘3:9), 그것이 금이나 은이나 녹이나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거나 우상 이나 형상에게도(계9:20, 겔8:9-10),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에도(사2:8-9), 또는 피조물 어느 것에도 경배하거나 섬길 수 없다(롬1:25,32, 계18
:21). 단 사람이 사람에게 절하는 것은 예외이다(창49:9) 또 이러한 어떤 비슷한 모양 에도 경배하거나 섬기지 못한다(살전5:22)
6. 신자는 하나님 외에 경배하기 위한 전이나, 높은 곳을 지을 수 없다(렙32:35). 또 어 떤 신당도 갖고 다니지 못한다(암5:26). 또 이들 장소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다(왕하 16:3-4, 왕하 17:9-11), 경배 할 수도 없고(렘1:16), 또 어떤 비슷한 모양에도 그렇 게 할 수 없다(살전5:22).
7. 우리는 위에 인용한 여러 성경구절에 있는 죄를 범한 자들은 불신자 우상숭배 행위 로서 하나님께 특히 가중한 것임을 믿는다. 형제라고 불리는 자가 이런 일을 행하거 나 가르치거나, 그런 교훈을 믿고 있으면 신자는 먼저 그에게 가서 그의 잘못을 가르 쳐주고, 그 형제를 얻고자 노력할 것이나 듣지 않을 때에는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권 면도 듣지 않으면 그 신자는 그와 절교할 것이요(고전5:13), 나와서 그들과 절교하고 또 이를 행하는 자나 교훈을 믿는 자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계2:14,15, 신8:4-7).
결론: 이렇게 새로 언약에 통합한 우리는 결코 장로교신조나 그 정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요, 현실 교회가 그 신조와 정치(치리)에서 떠났으므로, 그 총회의 치리 하에 있을 수 없음을 확인하는 바이다. 여기 서명한 우리는 이에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모든 진리와 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을 믿고 받아 드림을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 진리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종교요, 사람에게 구원을 줄 수 있고 또 구원하는 오직 참 종교임을 믿는 바이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람이 만든 완전한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들 신조에 나타난 교리를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대로요, 우리의 신앙을 표시한 것으로 기쁨으로 받아드리는 바이다. 우리는 여기 우리들이 자진 발기하며, 이들 신조를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된 우리의 특수 집단의 표준으로 동의하는 자들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지키고, 전하고 수호하기로 받고 믿고 언약하는 바이다.27)
이 언약서에도 우리가 논하려는 언약요소들이 풍성하게 담겨져 있다. 우선 첫 번째 언약요소인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관계를 살펴보자. 이 언약서의 기본 원리는 성경에서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이다. 이 언약서 서론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우상숭배 죄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이 언약서의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우상숭배 배격이 이 언약서의 주요 목적이다. 최 덕성 교수는 이 장로교인의 언약과 독일의 바르멘 신학선언을 ‘우상숭배에 대한 저항’ 이라는 주제로 서로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신학적 기초와 이해를 문서로 표현한 장로교인 언약은 직접적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한 고백문이다. 교회의 고유한 직무는 수행하지 않고, 천조대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했다. 바르멘 신학선언과 장로교인 언약은 정치권력과 야합한 교회가 저지른 우상숭배를 거부했다.....신학과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거부한 것이다.”28)
그들의 신학은 “하나님께만 충성하자”는 언약신앙이었고 그들의 성경적 근거는 시내산 언약으로 주신 십계명의 중심 부분들이다. 장로교인 언약서의 중심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장로교인 언약 주제4) “신자는 다른 신을 둘 수 없다.”(4-1) “하나님과 함께 섬길 수 없다.”(4-2) “절할 수 없다.“(4-2) ”피조물 어느 것에도 경배하거나 섬길 수 없다,“(주제5) ”신자는 하나님 외에 경배하기 위한 전이나, 높은 곳을 지을 수 없다.”(주제6)
이 문서를 작성한 김윤섭 전도사와 협조한 한부선 선교사와 박의훔 전도사, 그리고 이 언약서에 동의한 성도들은 분명히 균형 잡힌 언약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는 결코 우상숭배 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의 의지의 발로였다. 언약의 양면인 은혜와 행함을 바로 실천한 참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범해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은혜남용주의’에 빠진 자들과 전혀 다르다. 만일 그 당시 성도들이 바른 언약사상에 있지 않고 은혜남용주의 사상에 빠졌다면 결코 신사참배강요를 이길 수 없었다. 잘못된 언약사상을 가진 자들은 언약의 양면의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자로서 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하지 않고 값싼 은혜만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거의 다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더 나아가서 신도침례와 동방요배 등의 온갖 죄를 저질렀다. 이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맺어진 언약 관계에 대한 잘못된 신앙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잘못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잘못해도 회개하면 그 뿐이라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은 쉽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밖에서 수고한 자들로 자칭하면서 기득권을 누렸다.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는 균형 잡힌 언약신앙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호세아는 여러보암 2세 시대에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우상을 섬긴 것에 대해서 언약위반이며 다시 돌아 올 것을 누누이 주장하였다 (호1:9; 2:15; 7:16; 8:13; 9:3,6; 11:5; 11:11; 12:9,10; 13:4). 그들의 언약파기의 죄악을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 낳은 자녀 세 명의 이름 안에서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이즈르엘(לאערזי)-멸할것, 로루하마(המחר אל)-다시는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 로암미(ימע אל)-나의 백성이 아님. 그뿐 아니라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배교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소송”(ביר)을 제기하였다.29)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언약 파기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하는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언약관계를 상기시킨다. 애굽(죽음)에서 건저내신 여호와의 은혜를 여러 번 강조하면서(2:15; 11:11; 12:9; 13:4) 언약신앙의 극치인 회개를 유도하였다.30) 이와 같이 하나님과 근본적인 언약관계를 맺은 성도들은 언약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로 말하든지 아니면 언약파기로 인한 징계를 달게 받고 회계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성경적인 참된 회개의 의미이다.
다음으로는 순교자 이창환전도사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 ‘신앙 우승가’에서도 기본적 언약신앙 요소를 잘 찾아 볼 수 있다. 이 우승가는 재건교인들이 초창기 재건운동 당시에 많이 불렸고, 이 창환 전도사가 공산주의 치하에서 순교 당한 후 그의 장례식에서 불러지기도 하였다.
신앙 우승가 작사/작곡 이 창환 전도사
1절 소리 높여서 기쁜 노래 부르자, 승리의 면류관을 받겠네
재건의 용사 우리 친구들은, 십자 깃발 밑에 정병이로다.
후렴) 나가세 주의 용사들아, 보아라! 원수 강하다. 죄악의 진과 마귀 진을
끝까지 싸워 이기자, 세상과 마귀승리하자, 앞서 가신 주님 부른다.
주님 자취 따르는 군사, 개선가 높이 부르자.
2절 생명 다 바쳐 지리 제단 세우자, 승리의 기세 꺾이지 말고,
좌우에 날선 진리의 이 한검, 이기는 날까지 꽂지 말아라,
3절 승리의 찬송 하늘에서 들린다. 환란 핍박 이긴 성도의 반열,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사람, 거룩하게 불러 영광 돌리세.31)
환란과 핍박 속에서 신앙 투쟁하여 승리한 기쁨은 언약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이여 면류관이다. 신앙 투쟁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얼마나 이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머금으며 감격하였는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바울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신앙경주(고전9:24; 빌2:16등)와 영적 전쟁 (엡6:11-17등)을 자주 강조하였다. 이것은 언약 백성의 값진 보상과 승리는 신앙생활의 극치임을 잘 보여준다. 언약의 행함 요소인- 하라, 하지 말라-는 할라카(הכלח-법) 신앙의 정상적인 결과는 승리와 보상이다. 행하지 않고 어떻게 보상이 있겠는가? 싸우지 않고 어떻게 승리를 바라겠는가? 보상과 승리는 바로 언약 신앙의 결과요 열매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에서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주시지만 불순종할 때는 저주가 있다는 것은 구약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당연한 적용이요 신앙원리임을 우리는 믿는다. 이와 같이 승리와 보상은 언약신앙의 중요한 축복 요소이다.
이창환전도사의 설교에서도 하나님과의 언약은 불변하다는 언약신앙의 핵심요소를 읽을 수 있다. 곧 언약의 영원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관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다는 구속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설교들 중 ‘변할 수 없는 언약’(갈3:15-18)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약조는 사람의 약조라도 변할 수 없음. 둘째, 그리스도를 허락하심(메시아 약속) 셋째,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약속하신 언약. 넷째, 기업의 언약(언약의 영원성). 이러한 네 대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언약개념은 구속적인 의미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첫 번째 대지의 내용에서는 인간과의 약속도 어기면 안 되는데 어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 버릴 수 있을까?라는 철저한 언약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대지의 네 번째 소지에서 율법은 어디에 쓰게 되게 되나? 라는 질문을 하면서 율법 페기론을 주장하지 않고 율법의 몽학선생 기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언약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언약신앙으로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의 역경에도 신앙을 지켰으나, 애석하게도 언약신앙의 절개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잡혀가 감옥에서 결국 2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고 말았다.32)
이와 같이 하나님과 택한 백성 간의 언약의 근본을 지키기 위해서 우상숭배와 무신론 사상과 싸운 언약신앙 요소를 재건교회 배아기와 태동기에 나타난 자료들 중 몇 가지 안에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다음은 계속해서 성도들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언약의 요소들을 관찰해 보자.
2. 언약 백성으로서의 경건생활
성도 개인의 경건과 도덕적인 삶의 성장을 목적으로 사용된 언약개념을 재건교회 배아기에 나타난 신사참배 반대운동 기간과 해방 후 재건교회신앙운동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총대들이 국가 개혁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죄를 버리기로 언약하였고 이미 살펴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언약 체결의 환경이 조금 다르지만 신사참배 강요당시나 그 이후의 일어난 신앙운동 안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도피하거나 감옥에 잡혀가는 방법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 국기배례 등의 여러 가지 죄악을 범한 후 회개하는 회개운동에서 확실하게 그 사상이 나타난다.
김 린희 전도사는 이북재건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다. 해방 전과 후에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든 분이다. 1946년 1월 평북 차령관 교회에서 사경회를 마친 후 재건교회 교역자 대회를 갖고 다음과 같은 신앙지침과 행동강령을 만들게 되었다.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신앙생활의 4대성별은 다음과 같다.
4대성별
1. 신앙성별 2.성전성별 3. 혼인성별 4. 주일성별
이 네 가지 성별은 단지 일본사람의 신앙핍박에서 실패한 것을 회개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행동강령의 의미만은 아니다. 신앙 지킨 성도들도 거룩한 삶을 계속 유지하자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도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니라”(레11:45)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신 은혜를 잊지 말 것과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당부하는 것이며, 또한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죄 사함 받는 가운데서 언약의 양면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언약관계의 신앙표현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로마서 12:1절에서 ‘그러므로’ 라는 결과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앞에서 강조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행함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것은 언약의 행함 요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면을 뒤 받침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4대 성별은 언약의 실천 요소들임을 잘 보여준다.
첫 번째 거룩한 삶의 언약 요소는 ‘신앙성별’이다. 성도 개개인의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상에 관한 모든 것을 배격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 당시 신앙 지킨 성도들은 이 언약요소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하였다.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해외나 만주지방, 아니면 산이나 들로 도피하였고, 또한 가정에서 숨어서 가족끼리 가정 제단으로 신앙을 지켰다. 이러한 삶들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경건한 삶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다. 신앙성별은 이와 같은 성도들의 신앙투쟁의 몸부림이다. 해방 후 재건운동에 참여한 성도들은 대부분 이러한 언약성도들이었다.
신앙성별을 위한 투쟁에서 가장 잘 찾아 볼 수 있는 자료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장로교인의 언약(1940)이다. 이 언약서 전반에 걸쳐 균형 잡힌 언약신앙을 가진 성도가 신앙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성경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언약서 서론에는 “우상숭배를 피하고자 하는 신자는 기성교파와 동참하지 않고 나와야 할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이 언약서를 만들고, 동의한 사람들 70명 중 김 윤섭 전도사와 박 의훔 전도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신도였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주의 개념인 라틴어 "코람대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으로 죄를 미워하고 죄를 더 이상 범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신앙열사들이었다.33) 이들 평신도들은 1938년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목사, 장로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참 성도와 거짓성도의 분명한 구분을 보여주었다. 언약을 지키려는 평신도와 언약을 파기한 총회원들의 극적인 신앙성별 관계를 보여준다.
요즘 신사참배 당시와 같은 종교핍박이 없고 자유로운 사회에 살다보니, 한국교회가 너무 안일한 것 같다. 신앙으로 살려는 몸부림을 율법주의로 몰아친다. 언약신앙에서 벗어나 은혜남용주의에 빠져 온갖 죄를 다 저질러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시대정신에 빠져있다. 그 당시 생명 바쳐 신앙 지킨 신앙의 선배들을 보기에 너무나 부끄럽다. 교회가 쇠퇴하고 사회에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는 분명한 이유들임에 틀림없다.
‘혼인성별’은 언약성도들에게는 중요한 신앙사상이다. 결혼은 구약의 중요한 언약 요소로서 자주 강조되었다. 구약 저자들은 하나님과 그의 택한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결혼관계로 종종 강조하였다. 특별히 결혼 언약에 관해서는 구약선지자들 중 호세아가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호세아 1장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 신을 섬긴 이스라엘을 창기라고 하였다. 2장에서는 “그녀”(이스라엘)는 “나의”(하나님) 아내가 아니라고 하였다. 남편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신(바알)을 사랑한 것은 창녀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배신당한 아픔을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해서 느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자기를 배반하고 신의를 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 이유는 언약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인자하심 때문이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부정한 아내를 설득하여 집에 데려오기를 싫증내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용서하는 신실한 남편에 비유하였다. 신약에서 예수께서도 자신이 신랑이요 성도들은 신부라는 언약 요소를 비유로 말씀하심을 통해서 결혼관계는 언약의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는다.34) 이런 점에서 혼인성별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언약신앙을 고취시켜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재건운동 당시에 우상숭배한 사람들 곧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동신학대학대학원 교수인 오덕교 교수는 재건교회 “교인들 가족이 하나 되지 못하면 이혼하라고 가르쳤다”고 그의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35) 오덕교 교수는 혼인성별에 대한 이해를 신앙전통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도전적인 죄악들을 강요당하던 시대에 신앙 지킨 성도들이 의미 있게 혼인성별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반적인 환경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신사 참배한 장로교 총회를 정통교회로 보고 재건교회와 고신교회를 오히려 분리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이해 할 수 없는 사상이다. 그의 입장이 옳다면 교회 안에서 친일파 전통으로 계속해서 교권과 부를 누린 사람과 교회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언약신앙으로 순교하거나 고난당한 사람들은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다. 재건교회가 신앙선배들이 강조한 혼인성별의 언약적 개념을 바탕으로 믿음대로 혼인해서 살라고 강조하는 점을 총체적으로 바로 직시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보고 비평하는 점에서는 고쳐져야 한다.
결혼 언약은 그 ‘불변성’과 ‘확보성’으로 인해 서로에 대해 불성실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실함으로 드러나는 충실함이 결혼 언약의 특징이다. 충실로써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일 것이다.36) 또한 언약백성의 축복의 전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만 섬기며 믿음이 있는 자들과 결혼하여 계속해서 언약신앙을 전수하라는 강조와 교육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아름다운 신앙전통이다. 이런 점에서는 청교도들의 신앙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한다.37) 주님 오실 날을 신부된 입장에서 고대하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신앙전수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 신앙을 전수하는 방법을 언약신앙의 전통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바른 사람이 그 사랑을 배우자에게 잘 드러내는 법이다. 이것이 결혼 언약의 기초이며 목적이다. 배우자와 자신의 관계를 자신과 하나님의 언약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대로 이뤄 가시는 가정이 될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시대는 결혼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희박해 졌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도 시대정신에 빠져서 사상들이 엉망이 되었다. 동성연애와 계약결혼 같은 잘못된 사상이 난무한 시대다. 이혼율도 세계적인 비율을 가지고 있다. 결혼 전 ‘처녀’의 모습을 우습게 생각하거나 바보같이 취급한다. 이런 시대에 결혼성별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지나쳐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 성도들이 앞장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혼을 하도록 강요해야 한다. 이것은 결혼성별 강조가 언약 신앙 전통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요소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주일성별’도 언약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요즈음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세 종류의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주일개념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지킴의 의미로 나타나는 경우다. 둘째, 주일개념이 예수께서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날로 믿고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며 축제분위기로 예배한다. 셋째, 율법개념의 반작용으로 현대 삶의 거슬리는 모든 제도를 개혁하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러한 주일 개념들은 언약신앙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안식일 개념이 주일 개념으로 바뀌는 과정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자.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후에 마지막 날에 쉬셨고, 축복하셨고,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 하셨다(창1장; 출애굽기20장; 신명기5장). 이 날은 하나님만을 위해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을 위해서도 만드신 날이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날이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 날을 자연스럽게 창조의 안식일과 연결시켜서 기억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세겜 언약인 신명기 5장에 나타난 십계명에서는 창조의 안식일과 연결해서 표현되지 않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것과 그곳에서 능력으로 건저내신 것을 연결해서 지킬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 날을 세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안식년, 그리고 희년과 연결해서 지키게 하셨다. 이러한 구약의 안식일 개념은 인간의 타락으로 구속하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시는 과정 곧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안식 후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리하심을 기념하면서 오늘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일은 구약의 원시복음(창3:15)이 이루어진 날 곧 사탄으로 부터의 승리한 날로, 그리고 엣 언약이 이루어진 날로, 그리고 공동체의 새로운 출발로 믿고 지켰다.38) 구속의 은총을 감사하며 주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자들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신앙을 지켰고, 또한 오늘날도 이날을 믿음으로 기억하며 지킴으로, 보다 경건의 삶과 신앙향상을 더욱 이룩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안식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징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약성도들은 이것을 준비하는 자의 모습으로 주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 말은 토요일을 지키라는 것도 아니요 구약의 율법 내용대로 거룩하게 보내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살아있어야 한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요즘 교인들이 주일 예배 후에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신앙에 위배 된다. 요즘 기독교 국가들이 일요일을 쉬게 하고 일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보다 국가적으로 신앙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이다. 만일 우리 기독인이 신앙의 기본정신을 깨트리고 주일날 장사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일하게 하고 돈 벌어 세금 내게 한다면, 이것은 신앙의 기본정신은 고사하고 국가정책에도 위반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우습게 생각한다. 미리 준비해서 예배 후에 전도할 사람을 집으로 초청하거나 교회식구들을 불러서 사랑의 교제를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안식일이 주일로 바꿨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다보니 신앙이 약해지고 이것을 보고 이단들이 틈을 노려서 토요일이 진정한 안식일이라고 요즈음 성도들을 유혹한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언약신앙의 전통인 “주일성별”을 강조하고 복음적으로 지키도록 노력해야 될 것이다.39)
이 언약의 두 번째 요소가운데 더욱 중요한 요소는 회개이다. 스코틀랜드 총대들은 국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먼저 회개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과 신앙향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맹세이다. 이남재건교회의 3대 주의에서 두 번째 요소인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자”는 재건운동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옥중에서 나와서 재건운동을 한 모든 지도자들은 다 같이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한 상동 목사나 이기선 목사는 재건교회 지도자들과 회개의 조건이 달랐다. 이들 중 이북 복구파의 지도자인 이기선 목사는 “동방요배, 국기배례, 국민서사, 황국 군인의 무운을 비는 묵도는 죄가 아니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살아있는 황제에게 절하는 동방요배를 정죄함은 황도를 부인하고 군신지례를 모르는 행위”라고 하면서 오히려 재건교회를 “의법 타락자”라고 말하였다.40), 고신교단의 지도자 한 상동 목사는 이러한 것들은 개인 “양심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수양원을 설립하여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신앙 양심을 더럽힌 교직자들을 수양시켜 새 출발을 하게 할 것”을 옥중에서 재건운동의 방안을 구상하였다.41) 그러나 이북재건교회 지도자들은 이남재건교회 지도자들의 회개의 개념과 같이 철저하게 회개하자고 외쳤다. 회개의 철저한 강조와 인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받기 위한 중요한 언약적인 면이다. 당연히 죄를 범하였으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별히 재건교회의 최초의 교회인 선천 미곡창고 교회에서 김 린희 전도사와 함께 재건운동을 한 고 흥봉 목사의 경우는 자신이 옥중에서 수없는 고난을 당하면서 동방요배는 했다는 죄책감으로 목사로서의 역할 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성도들의 신발장 관리만 하였다고 그 당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였던 김 정태 목사는 증언한다. 독일 교회들은 나치당과 규합하여 신앙 지키려는 목사들을 핍박한 것에 대한 자신들의 잘못을 깊히 깨닫고, 전쟁 후에 그들의 모든 교회의 지도적 그리고 행정적인 면들을 겸손하게 포기하였다.42)
회개하는 것만큼 힘든 것이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의지로 되지만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주셔야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도 언약의 요소로서 신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의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균형 잡힌 언약신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크신 은혜와 축복으로 내려주신다.
3. 언약 공동체로서의 재건교회
한국 장로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총회적으로 가결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한국장로교회는 그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만주로 피신해서 참 교회 공동체를 만들었다. 23교회의 800여명이 서로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적인 차원에서 언약서를 만들었다. 참 교회들의 공동 언약체결이다. 특이한 것은 신사참배를 가결한 교회를 “배교”의 집단이라고 선언하였고, 그들의 신조와 헌법에 따른 “권징의 권위도 상실” 했다고 언약서 서론과 결론에 못 박아서 강조하고 있다.43)
또한 그 언약조항들을 지키지 않으면 세례도 베풀지 않고 예배를 인도할 수 없게 하였다고 한부선 선교사는 말한다. 사실상 이 새로운 공동체는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참여하는 “현실교회”44)와 교인을 이단적 사상을 가진 자 같이 취급하였다. 그들의 특별한 용어 “절교”45)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 언약서 7장에는 바울사도가 이단에 빠진 자들에게 두 번 정도 충고한 후에 더 이상 교회의 권면을 듣지 않으면 절교하라는 내용이 언약서 결론 부분에 기록되어있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인의 언약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배교한 한국 장로교회는 더 이상 정통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배교한 장로교회의 신조나 헌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렇지만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은 아무리 한국장로교회가 배교했다 해도 변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같은 고백이라도 신앙 지키는 교회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지만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인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들은 성경, 올바른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헌법은 시대가 변하고 교회가 변질 된다 할지라도 ‘진리의 횃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신앙이다.46) 이것은 언약신앙전통의 아주 중요한 강조점이기도하다. 곧 ‘환경은 변해도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참 교회를 진리의 교회라고 불렀고, 또한 참 성도를 수진 성도라고 불렀다. 또한 이 교회는 계속해서 참 신앙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계속 전수할 수밖에 없다고 장로교인의 언약서 결말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47)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대소요리문답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람이 만든 완전한 것으로 믿는다. 우리는 이들 신조에 나타난 교리를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 대로요, 우리의 신앙을 표시한 것으로 기쁨으로 받아드리는 바이다. 우리는 여기 우리들이 자진 발기하며, 이들 신조를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된 우리의 특수 집단의 표준으로 동의하는 자들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지키고, 전하고 수호하기로 받고 믿고 언약하는 바이다.48)
이러한 언약조항으로 우리는 참된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상처받고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맹세하면서 위임받거나 또한 시무장로가 되면서 말씀과 신조와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으면 어려워도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앞에서의 언약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신뢰 안에서 조약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장로교회는 총회적으로 신앙을 배신하였다.49) 하나님을 저버리고 일본 태양신을 섬기겠다고 신앙의 절개를 초개같이 버렸다. 박윤선 목사는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지 교회들이 우상숭배를 앞장서는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교회언약을 파기한 자라고 다음과 같이 비난하고 있다.
목사와 장로로서 일찍이 장로교 신조와 헌법을 준수키로 서약하고서 일제 시에 비 장로교적인 교정에 무언 순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의 조약위반이다.(시편 15:4)50)
요즈음 장로교회들이 여러 가지로 수모를 겪고 있다. 하나의 장로교회에서 수많은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이것을 분석한 신학자들은 신사참배가결 이후에 일어난 분리현상은 대부분 정치와 이권문제라고 한다. 진리 문제가 아니라면 존 칼빈이 언급한대로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고 어떠하든 하나님과 교회 앞에 언약한 약속과 질서를 지키며 신앙을 고수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된다.51) 교회의 헌법은 성경정신에 바탕으로 두었다. 이에 따른 법 준수로 인해서 이단의 무리들을 막을 수 있고, 또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잘못들에 대해서 권징을 통한 교회질서를 확립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들은 총회의 법 근간을 흔들어놓는 경우가 있다.52) 이러한 일을 개혁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당하게 법 절차를 밟고 질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교회 언약이 무너지면 교회 안에서 어려움을 가져 올 수 있고, 이로 인 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장로교인의 언약은 우리에게 여러 방면에서 역사적 교훈을 준다.
다음은 이북재건교회가 채택한 교회의 3대 권위이다. 이 신앙 강령은 개혁주의 신앙의 요소인 교회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한 언약이다.
3대 권위
1. 음부의 권세로 부터 승리(마16:18).
2.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요4:24).
3.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신사참배로 인해 위와 같은 교회의 권세가 깨졌다. 참교회의 상징들이 오히려 마귀에게 눌려, 예배는 죽고 하나님의 진리는 땅에 떨어지고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언약백성들은 끝까지 투쟁한 것이다. 해방 후에 이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 재건운동을 펼치며 교회 회복을 주도하였다. 다음의 찬양가사를 통해서 이들이 왜 교회의 권위를 망가트린 기성교회를 ‘마귀당’이라고 했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다.
재건운동가 작사/작곡 이창환 전도사
1. 아아 재건운동은 일어났구나, 아아 재건교회가 일어났구나
현대의 생명 없는 마귀당들아, 허위에 날뛰는 마귀당들이
말라진 교리만 붙잡고 있고, 생명의 진리는 내 버렸구나
2. 아아 재건운동은 일어났구나, 아아 재건교회가 일어났구나
속죄의 피를 밟고 제단 헐었다, 가중한 우상 섬겨 제단 헐었다.
생명의 신앙은 파손당하고, 신사에 절한 교회 마귀당 됬네
3. 아아 주님의 재림은 가까웠구나, 아아 진리세계는 전개 되었네
사망의 마귀당 벗어나서, 광명한 재건교회 밟아나가
환난과 핍박에 승리하고, 늘 기도하면서 힘써 싸우자.
4. 아아 우리는 땅에 있잖고, 아아 우리나라는 하늘에 있다.
영원히 솟는 샘물 구주예수니 생명수 마실 자는 용맹 더하여
재건재단의 헌신 자들아, 늘 기도하면서 힘써 외치자 아멘
재건교회 태동기에 불렀던 재건 운동가이다. 이 가사에서 “마귀당”이라고 단어가 4번 반복된다(1절에 두 번, 2,3절에는 각각 한 번). 우리는 이러한 “마귀당”이라는 반복된 용어에서 교회의 언약신앙을 엿 볼 수 있다. 그 당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한강에 가서 사빠 차고 미소기 바라이(신도침례)를 한 목사들이 교회에서 설교하고 세례주고 성찬을 하였다. 목사와 신도들은 교회에는 가미다나(귀신담긴 박스)을 들려놓고 절했다. 교회를 전쟁터에 쓰일 군수물자를 사용하는 창고로 사용했다.53) 이러한 몸 쓸 짖을 한 것을 본 성도들이 어찌 곱게 넘어갔겠는가? 감옥에서 토굴에서 숨어 살며 승리한 수진 종들과 순교한 성도들의 후손들이 어찌 이러한 배교한 교회를 정상적인 예배당으로 보았겠는가? 경남 함안에 있는 강명교회는 평양감옥에서 수탄고난을 당하다 출옥하여 귀향한 최 덕지 전도사(그 당시 이남재건교회 지도자)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던 중 부흥회 셋째 날 최 덕지 전도사와 조 용덕 영수와 함께 우상 숭배한 교회로 생각한 강명교회를 불태웠다.54) 그리고 이북재건교회 중에서 평북 전천에 있는 교회를 김 성득 전도사와 청년들이 구 예배당을 헐어버렸다고 최훈 목사는 말하고 있다.55) 이것은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녹스가 종교개혁 당시 메리여왕과 싸우면서 카톨릭 교회를 불태운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56) 재건운동시절에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도 언약신앙의 다른 한 면을 보여준다. 신사참배를 우상으로 여기고 고난을 불사한 신앙과 반대로 죄를 짓고 후회하며 회개하는 이 두 면이 모두 언약신앙의 요소라면, 재건운동(“정화운동”57) 또는 “쇄신운동”58))과 함께 교회를 새로 지어 바치자는 열심이나 마귀당을 불태운 득심이나 교회언약 관계에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동일한 교회언약요소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한다.
기득권 장로교단들이 그 당시 신사참배에 동참한 교회들을 “마귀당”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오히려 잘못된 신앙사상으로 몰아치는 것은 한국장로교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사참배를 총회적으로 가결하였고, 또한 이에 반대하는 주의 종들을 고발하여 옥고를 치르거나 죽게였고, 또한 재명이나 면직하였다.59) 이러한 결과로 한국 장로교회가 사분오열되었다는 것을 한국장로교회는 분명히 자각해야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재건교회의 “마귀당” 구호를 재건신앙운동 관점에서 인정해 주어야 한다.60)
재건 운동가에 또 하나의 교회언약요소가 있다. 재건 운동가 3절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아 주님의 재림은 가까 웠구나,” 이것은 재건교인들이 종말의 때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주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으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다는 뜻이다. 청교도들이나 언약주의 자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많은 박해 수난자들이 이 신앙으로 신앙을 지켰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고대하며 살았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환란에도 인내하고 죄를 이길 것을 다짐하는 신앙이다. 마지막 날에 영광과 축복이 장차 올 것을 기대하면서 보다 강인한 신앙으로 살아가겠다는 강한 의지요 인내하고 승리하자는 언약신앙의 표출이다. 이것은 마치 청교도들이 종말론적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겨 나간 것과 흡사하다.61)
4. 언약공동체의, 무신론 사상과 사회와의 신앙투쟁
네 번째 언약요소에는 정치적-사회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재건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겪은 후 가정과 사회에서 우상들과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이러한 요소를 바르멘 신학 선언에 기록된 문서에서 공통적으로 잘 찾아 볼 수 있다. 독일 기독교가 나치당과 결합하여 정치권력과 야합한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것을 반대한 고백교회 등의 의식 있는 신학자들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 내용과 비교해서 살펴보자. 다음은 바르멘 신학 선언에 나타난 요소들 중 관계되는 것들 몇 가지만 추려서 정리 한다:62)
- 교회가 자신의 메시지를 망각하고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이나 정치적 확신으로 인 하여 변질되어 버린 일.
- 교회의 고유의 직책은 수행치 않고 권세로 군림하는 특수 지도자를 따르는 일.
- 국가가 교회의 과업에 관여하는 일.
재건교인들이 해방 후 또 다른 혼란된 사회와 국가 안에서 보다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은 공산주의 사상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일제강점기는 신앙과의 투쟁이지만, 해방 후 공산주의와의 투쟁이 기독인들에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공산주의 안에서 박해는 일제 박해 보다 더 무서웠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 주의 자였고 사상이 그들과 맞지 않으면 부모 형제도 용서하지 않았다. 사상이 다르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서 사살하든지 아니면 노역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당한 지역은 대체적으로 이북 지역 이였다. 남쪽은 미국 기독교 사상으로 인해서 오히려 예수 믿기가 용이하였지만 지역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지역이 그래도 여러 곳이 있었다. 손 양원 목사는 일제치하에도 고난을 겪었고, 공산주의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이북 재건교회 지도자들 중 김 린희 전도사, 이 창환 전도사 등 많은 주의 종들과 평신도들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언약신앙은 끝까지 지켰다.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 신도들에게 기독교 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기독교 연맹은 공산정권의 어용기관이다. 강 양욱 목사가 앞잡이가 되어서 강제로 가입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앙 지킨 성도들이 이들에게 굴복할 리가 없었다. 이들의 언약사상을 이 창환 전도사가 강 양욱 목사의 요구에 반대를 표명하는 대화에서 잘 찾아 볼 수 있다.
“강 양욱 선생 당신은 김일성 수령의 비서이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목사이니, 목사의 양심으로 돌아가서 생각하여 보시요. 일제기에는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니, 온 교인은 신사참배를 하라고 미혹시켜 신자들의 신앙을 타락케 한 것을 회개하시고,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 주의 공산집단을 위하여 활동하는 일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이요, 마귀의 앞잡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시오.”63)
이러한 도전은 교회가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에 교회의 본질이 변질되게 된 사실을 그가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교회의 고유의 직책은 수행치 않고 권세로 군림하는 특수 지도자를 따르는 일“은 죄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를 언약신앙으로 극복 했던 많은 성도들과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사상과 또한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재건교회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인 김 린희 전도사와 이 창환 전도사 같은 분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순교당하는 크나큰 아픔을 맞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 사상에도 저항했던 신앙인들의 저변에는 언약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혼란하였다. 어느 정도 안정한 듯 했지만 군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독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요소 중 다음과 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 다름 아닌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강조하지만 이것은 일본 군국주의와 신도이즘의 영향에서 온 것이다. 언약신앙을 소유한 가정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가 아이들 교육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사실 청교도들도 그 당시 문화와의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국기에 대한 경례는 어느 민족이나 거의 강요하지 않는다. 요즘 일본 군국주의와 신사참배 부활로 일본이 학교에서 국기배례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가운데 역으로 대한민국은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는 사라져 가고 있다. 이것은 재건교인들이나 그 외에 다른 교단의 균형잡힌 언약신앙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들의 투쟁의 승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잘못하는 점은 정당하게 교회가 앞장서서 고쳐나가야 한다.
IV. 결 론
이와 같이 우리는 재건교회 배아기와 태동기에 일어났던 신앙운동들을 중심으로 그 당시 자료들에 나타난 언약신앙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자들과 순교한 성도들의 신앙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분명히 있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 가운데 그들의 개인의 삶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였다. 더 이상 그 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언약신앙은 위대하고 값진 신앙유산임에 틀림없다.
오늘도 이러한 균형 잡힌 언약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경건과 신앙향상을 향해서 몸부림치며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즉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자. 교회와 사회 안에서도 이러한 신앙으로 보다 법질서를 지키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기도하면서 고쳐 나갈 것을 힘써 노력하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청교도들의 삶을 거울삼아 교회와 사회의 정화와 개혁을 위해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평범한 일상적인 일들을 중요시하자. 한국 장로교회의 장자교단으로서의 명분만을 자랑하지 말고 장자교단에 걸맞게 언약신앙 지키며 살아가자.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은혜 중심과 실천 중심의 균현 잡힌 신앙에서 언제든지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들이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언제라도 우리에게 잘못된 신앙 전통에 빠지도록 그들의 최선의 작전을 펼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만일 우리가 언약신앙의 균형을 잃게 되면 한편으로 율법주의 사상에 쉽게 빠질 수가 있다. 특히 훌륭한 업적을 가진 사람이나 공동체일수록 이러한 위험에 젖어들기 쉽다. 이는 항상 자신의 행위의 잣대로 기준을 삼으려는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한 너무 자신의 업적에 자신의 신앙이 가리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 할 수 있다. 자신이 범한 실수는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은 크게 보이고, 지적하기 좋아한다. 자신이 죄를 짓고도 의로운 체하게 된다. 이는 모든 기준이 자신의 의에 가리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사상에 빠지면 형식주의에 치우쳐 우리의 예배와 삶이 외식적일 수 있고, 또한 이 기간이 길어지면 위험한 병든 전통에 걸릴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언약신앙이 다른 면에서 균형을 잃게 되면 은혜남용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은혜를 받으면 다 되었다 생각한다. 십자가 지고 가는 것을 율법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한다고 믿는다. 인간이 하나님께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생각으로 값진 하나님의 은혜를 값 싼 사상으로 바꾸려 한다. 은혜를 보답하는 효도의 신앙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열성적인 삶이 없다. 결국 이렇게 생각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잘못을 해도 당연히 용서해 줄 것이다”라고. 이러한 사상도 고치지 않으면 친일파 전통과 같은 종교다원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언제라도 제2, 제3의 신사참배 가결과 같은 배교의 결정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쉽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물량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들어 교회를 타락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현재 재건교회는 어떠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가? 많은 상처를 안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자포자기 상태인가? 아니면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열매 없는 신앙전통에서 해매고 있는가? 아니면 고귀한 언약신앙 전통을 변함없이 아름답게 이어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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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공유합니다.
이들이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거나, 더 널리 보지 못한면이 있었다면 사랑으로 감싸며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그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혹독한 탄압을 이겨낸 출옥성도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더 사랑과 희망을 안고 이들에 대해 사실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