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행문_ 왕흥사지에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20041717
교육학과 김중범
답사(踏査)란 조사할 것이 있는 현장을 직접 발로 디디며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번 춘계정기답사는 최초의 답사라고 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경주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은 것이 전부였던 터라, 주제를 가지고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백제 유적을 ‘직접 발로 디디며’ 돌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일정을 시작했다.
물론 잘 모르는 역사학과 학우들이 대부분인 답사 일행 속에서 이방인이 될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처음이라는 설레임이 더 컸다.
출발하기 전 일기예보를 통해 예상을 하긴 했지만, 답사 둘째 날 새벽부터 내렸던 비는 답사 기간 동안 우리를 계속 괴롭혔고, 그 때문인지 둘째날과 셋째날 답사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답사 세 번째 날 일정으로 찾아갔던 왕흥사지는 몇 년 전, 백제금동대향로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사리함이 출토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던 기억이 있어, 답사 일정이 나왔을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기대했던 곳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왕흥사에서 출토된 사리함 및 음각된 명문>
왕흥사를 세웠다고 알려진 위덕왕(威德王)은 아버지 성왕(聖王)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은 맞은 이후, 위기에 직면한 백제에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해 무왕(武王)으로 이어지는 백제의 기틀을 재정립한 왕으로 알려져있다.
그 아버지의 치욕스러운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생각했던 위덕왕은 왕위에 오르길 거부하고 출가해 승려가 되고자 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도,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능사(陵寺)를 짓고 백제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금동대향로(金銅大香盧)를 만들기도 했던 그가, 집권후반기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왕권의 강화를 추구했던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왕흥사인 것이다.
나름대로 사전에 이런 공부를 해보면서 왕흥사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커졌었고, 첫날 다녀왔던 보원사지 발굴 현장이 너무 좋았기에 왕흥사지를 향하면서 위덕왕의 위엄과 의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설레었다.
하지만 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내렸던 비는 왕흥사지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치지 않아, 우산을 들고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아주 잠시 발굴 현장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당간지주나 탑이 남아있어 대략의 규모와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던 보원사지와는 달리, 구획별로 나누어져 있는 모습 뿐, 비 때문인지 발굴 현장을 덮어놓아 한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발굴 조사 도중이어서 그런지, 주변에는 이곳이 왕흥사지 발굴 현장이라는 안내문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 논밭이 펼쳐진 황량한 모습이었다.
교수님은 발굴현장을 보며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라 말씀하셨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이상하게도 먹먹해진 기분으로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왕흥사 발굴현장>
이것이 왕흥사인가.
위덕왕대에 세워져 백제가 패망할 때까지 100여년 간 백제의 중요한 왕실사찰이었다는 위상에 비해, 쓸쓸하다 못해 비애감(悲哀感)을 가지게 하는 이 모습이 왕흥사인가.
답사기간동안 키워왔던 기대감이 일순 실망감으로 바뀌었다가 숙추(淑湫)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사실 멸망한 왕조의 유적에서 느낄 수 있는 정취는 쓸쓸함일 것이다.
거기에 을씨년스럽게 비까지 내린다면 그 쓸쓸함을 말해 무엇하랴!
비때문에 발굴 인원조차 없는 이 모습이, 1300여년 전 멸망한 백제의 진짜 정취일 것이다.
발굴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와, 버스에 올라타기 전 강 건너편에 낙화암(落花岩)이 보였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의자왕의 궁녀들이 치욕을 당하지 않기위해 뛰어내렸다는 설화가 내려오는 낙화암이, 한때, 백제 어느 사찰보다 큰 영화를 누렸을 왕흥사 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계속된 비로 질퍽해진 땅을 밟고 내리는 비에 어깨를 적셔가며 낙화암을 바라보자, 지겹도록 외웠던 망국의 한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가 실지로 나라를 잃은 마음을 짐작도 할 수 없겠지만, 융성했던 백제와, 그 중흥의 기틀을 세우고자 했던 위덕왕을 기리며, 고려 유신(遺臣)이었던 길재의 시조로 마무리를 대신해본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왕흥사지에서 바라본 낙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