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참의 전상구의 묘표(贈參議全尙耉의 墓表)
공의 휘는 상구(尙耉)니 자(字)는 유장(幼長)이오 성은 全씨이다.
백제 개국원훈(開國元勳) 환성군(歡城君) 휘 섭(攝)을 시조로 하고 고려조 휘 방숙(邦淑)이 있었으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을 봉하였는데 이분을 분관조(分貫祖)로 하며 오전(五傳)하여 휘 원발(元發)주1)은 현량과에 급제하여 중국에 들어가서 벼슬이 병부상서(兵部尙書)겸 집현전 태학사에 이르고 문장과 필법이 중국과 우리 동국에 중히 여겨졌다. 공민왕이 조공(朝貢)을 탕감한 공훈으로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을 봉하였고 만년에 용궁현 서쪽 성화천(省火川)변에 청원정(淸遠亭)을 얽고 거기에서 살았는데 호를 국파(菊坡)라 하고 소천서원(蘇川書院)에 향사한다.
여러대를 전(傳)하여 휘 인(仁)은 선릉참봉(宣陵參奉)으로 호는 기계주인(箕溪主人)이오 휘 몽규(夢奎)는 승의랑(承議郞)으로 괴산훈도(槐山訓導)하였고 호는 매국헌(梅菊軒)이라 한다. 휘 행(倖)은 부호군(副護軍)으로 증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하였고
휘 이성(以性)주2)은 문과 종부시정(宗簿寺正)이더니 역전오읍(歷典五邑)을 하였고 합천(陜川)고성(固城)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이괄(李适)의 난에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녹공(錄功)되어 증도승지(贈都承旨)를 하였으니 호를 운계(雲溪)라 하고 한강(寒岡) 우복(愚伏) 문인인데 고조 증조 조와 고(考)이시다.
비(妣)에 숙부인(淑夫人) 창원 황씨는 찬성(贊成) 사우(士祐)의 손녀요 별제(別提) 윤규(潤奎)의 따님이다. 선조(宣祖) 정미(1607) 12월 17일에 공이 가야리제(佳野里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숙성하고 미간(眉間)이 수연(粹然)하고 사기(辭氣)가 온온하며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여 여력(餘力)으로 사화(詞華)와 필 이 또한 조성(早成)하고 성난 말씀과 급한 얼굴빛은 밖으로 나타내지 아니하며 시국과 정치의 득실(得失)은 듣지못한 듯이 하였다. 병술(1646)년에 외간상을 당하고 이듬해에 거듭 내간상을 당하여 피눈물로 상을 마쳤다. 효종 정유(1657) 6월 10일에 정침에서 고종하시니 향년 51세이라 문경 갈평 대미산(黛眉山)에 장사하였다. 배(配) 증숙부인(贈淑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매오(梅塢) 영후(榮後)의 따님이니 기(忌)는 5월 27일이오 무육(無育) 하였고 묘는 지보면 용장산(龍庄山)에 모셨다. 배에 문소김씨(聞韶金氏)는 운천(雲川)용(涌)의 손녀요 개호(開湖) 시주(是柱)의 따님이다. 부도(婦道)가 있었으며 병오(1606)년에 나서 백세향수(百歲享壽)하시어 을유(1705)년 2월에 우로은(優老恩)으로 숙부인(淑夫人)을 봉하고 공은 음직으로 통사랑(通仕郞) 이러니 특히 증통정대부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하고 4월에 사당에 분황 고유(焚黃告由) 하더니 6월17일 돌아가심을 보게되었다. 만년(晩年) 은악(恩渥) 하심에 젖었으니 슬픔과 영광이 극하였도다. 장사는 공과 더불어 동원이광(同原異壙)으로 하였다. 5남2녀를 두셨는데 남에
오상(五常)은 재행(才行)이 있었는데 조세(早世)하시고
오륜(五倫)은 진사(進士)이니 효행으로 천제(薦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하고 증대사헌(贈大司憲)하였고
오복(五福)은 출계하였으며 진사에 희릉참봉(禧陵參奉)하였고
오행(五行)은 출계하였고
오현(五賢)은 진사하였다.
여서(女壻)는 남금망(南金望)과 조계조(趙繼祖)다.
오상은 근취(近取)로 뒤를 이었고 오륜의 남에 근삼(近三)은 생원(生員)이고 근취(近取)는 출계하였고 근광(近光)이오 근열(近說)이며 근사(近思)주3)는 문과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올랐다. 직산(稷山)고성(固城) 양읍(兩邑)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오현의 남은 제운(第雲)이다.
여러대를 전하여 홍교(洪敎)주4)에 이르러 문과 장령(掌令)하였다.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그 세대(世代)를 떠난지 343년이라 자손(慈孫) 재도(爭)가 장차 공(公)과 숙부인 및 용장 정씨의 묘를 옮겨 장승포(長升浦)에 합장(合葬)하려고 재로(在魯)가 찬술(撰述)한 유사(遺事)로써 동쪽으로 200리를 달려와 나에게 표묘(表墓)하는 말을 청하거늘 그 자취를 살피건데 공과 나의 선조 추만공(秋巒公)으로 더불어 이종간(姨從間)이 돼서 나의 선조보다 24년 뒤에 나서 우리 할아버지 보다 4년 먼저 작고(作故)하였으니 천연(天然)스럽게도 어찌 옛일로만 여기고 양가후손(兩家後孫)이 돌아보건데 마땅히 추모(追慕)하지는 아니하고 세의(世誼)로만 지낼것인가?
이제 이 일은 늙고 글 못한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그 가져온 기록에 의하여 대략 그 사정을 이와같은 말로 명(銘)을 하여 가로되 용궁의 고벌(古閥)이요 대대로 충효로다.
고을에는 삼물(三物) 있고 어가(御家)함에 사교(四敎)로다. 공의 자취 시종(始終)에는 수진(守眞)하고 천실(踐實)이라. 백년동안 풍수설(風水說)에 원흉하고 근길이라. 장승포의 동원에서 만나고 맞이하네유명(幽明)인들 다를손가? 순리에 강한 정을 명명 백백 봉(封)한 증직(贈職) 태평서세 은영(恩榮)일세.
世家後生 完山 李震宰 謹撰
주1)전원발[ 全元發 ]
본관은 용궁(龍宮)이고, 호는 국파(菊坡)이다. 민부전서(民部典書) 진(珒)의 아들이다. 1315년(충숙왕 2) 원나라에서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魁科)에 장원급제하여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자주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歲貢)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여 세공으로 인한 고려의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도,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가 소원을 묻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김득배(金得培)·이제현(李齊賢)·김구용(金九容)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유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의 글씨가 남아 있다.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두산백과)
주2)전이성[ 全以性 ]
본관은 용궁(龍宮)이며 자는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이다. 조선 초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진 원발(元發)의 후손으로 처사 위(緯)의 아들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에는 부친의 성명이 행(緈)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한강 정구(鄭逑), 우복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606년(선조39)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여 제조랑을 거쳐 다섯 군현의 현감을 지냈으며 그 중 고성과 합천에서는 그의 선정을 기리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광해군 때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에 올라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면서 《광해군 일기》편찬에 참가하였다.
이괄의 난(1624)이 일어나자 황해도 아사(亞使)로서 난을 진압시키는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등록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경시 산양면 과곡리에 묻혔다.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용궁면 금남리 훤평서원(喧坪書院)과 용궁면 가야리 가야사우(佳野祠宇)에 제향되었다.
시문집 《운계집(雲溪集)》 4권 2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1907년에 9세손 학영(學永)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또 관북지방의 민심과 생활상, 풍속 등에 대해 적은 글을 모은〈해휴록 解携錄〉과 부안에 이배되어 있을 때 친지, 그 지방 선비들과 학문, 시사, 정치, 예절 등에 관하여 논한〈심화록 尋話錄〉이 전한다.
지역 > 아시아 > 한국 > 경상북도
[네이버 지식백과] 전이성 [全以性] (두산백과)
주3)전근사(全近思)
[문과] 숙종(肅宗) 41년(1715) 을미(乙未)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2[亞元]위(2/35) 관직:예조좌랑(禮曹佐郞)
주4)전홍교(全洪敎)
[문과] 고종(高宗) 7년(187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28/33) 관직:감찰(監察).지평(持平),장령(掌令)
[ 原文 ]
公諱尙耉字幼長姓全氏百濟開國元勳歡城君諱攝爲肇祖麗朝有諱邦淑門下侍郞平章事封龍城府院君是爲分貫之祖而五傳至諱元發以賢良貢擧膺入中朝仕至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文章筆法重於璜恭愍王以觸貢勳封竺山府院君晩居縣西省火川邊構淸遠亭號菊坡享蘇川院累傳諱仁宣陵參奉號箕溪主人諱夢奎承議郞槐山訓導號梅菊軒諱倖副護軍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諱以性文宗簿寺正歷典五邑陜川固城有去思碑适亂錄振武原從勳贈都承旨號雲溪遊寒岡愚伏門高曾祖若考也枇淑夫人昌原黃氏贊成士祐孫別提潤奎女以宣廟丁未十二月十七日生公于佳野里第自幼俊疑眉宇粹然辭氣溫溫孝友和睦餘力詞華筆法又早成疾言遽色不形於外時政得失若無聞焉丙戌遭外艱翌年存遭內艱泣血終制孝廟丁酉六月十日考終于寢享年五十一葬聞慶黛美山配贈淑夫人東萊鄭氏梅塢榮後女忌五月二十七日無育墓在龍庄配聞韶金氏雲川涌孫開湖是柱女有婦道生丙午享百歲之乙酉二月以優老恩封淑夫人公蔭通仕郞特贈通政大夫戶曹參議四月焚黃告廟六月十七日觀化晩霑恩渥衰榮極兮葬與公同原異壙有五男二女男五常有才行早世五倫進士以孝行薦除僉樞贈大司憲五福出進士禧陵參奉五行出五賢進士女南金望趙繼祖五常嗣近取五倫男近三生員近取出近光近說近思文科兵曹佐郞陞禮曹正郞歷稷山固城兩邑五賢男第雲累傳至洪敎文掌令餘不盡錄今去其世三百四十三年慈孫爭將遷公與淑夫人及龍庄鄭氏墓合芼于長升之浦以在魯所述遺事東馳二百里請余以表隧之辭按其蹟公與我先祖秋巒公爲中表而後我祖二十四年生先我祖四年卒天寧故事兩家後孫顧不當追慕而世講之耶今於是役也不敢以耉廢無文而遜謝依其來錄而略陳情事如此云銘曰竺山古閥奕世忠孝有鄕三物御家四敎蹟公始終守眞踐實百年堪輿遠凶近吉長升之浦同原逢迎幽明何殊健順之情顯顯封贈晟際恩榮
世家後生 完山 李震宰 謹撰
출처: 전상구(全尙耉) 본(本) 용성(龍城) 자(字) 유장(幼長) 증(贈)참의(參議)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 문경읍 갈평리(대미산)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