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을 읽고...
교육학과 20043527
정현숙
좁은문이라는 이 책은 오랫동안 내 책상 한켠을 지키고 있었지만 한 번도 끝까지 읽어보지 못했었다. 책이 두꺼운것도 아니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벅찼었던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마음 단단히 먹고, 끝까지 읽어 보기로 했다.
이 책의 앞에 이런 성경 구절이 써있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
나도 카톨릭 신자라 이 성경구절은 자주 보았었다. 내가 처음 이 구절을 보았을 땐 생명으로 가는 길, 즉 진리에 다가서는 길은 아무래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아무나 이를 수 없으므로 그 길을 좁은문이라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참고 인내하는 것이 무엇 이냐하는 것은 알리사와 나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즐거움과 행복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살아가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런데 좁은문이라는 생명의 길에 다가가기 위해 이런 자신의 행복을 버려야 한다면 그런 좁은문은 더 이상 생명의 길이 아니라 생각한다. 즉,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지키는데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지, 생명의 길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버려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알리사는 제롬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물건을 없애 버리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그를 잊으려고 한다. 이 싸움은 결국 정신적인 피로 끝에 마침내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게 되고 만다. 임종시의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암시적이다. '나의 마음이 부인하는 이 덕은 과연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라고.
이 책의 제목처럼 좁은문이란 알리사가 그렇게 소중이 여겼던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까지 버려야 했던 그 덕을 지키는 길인 것일까? 하지만 알리사는 자신도 사랑하는 이도 버려야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을까?
아벨이 “그래서 알리사가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야. 자기 동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그녀는 자기 자리를 양보하려고 들었던거지”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또한 알리사가
“ 하지만 제롬, 이럴 수는 없어. 저 아이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도 않는걸! 오늘 아침에도 저애는 그렇게 말했어. 말려 줘, 제롬! 오오, 저애가 어떻게 되려고?
라고 한 구절을 보면 알리사는 줄리에뜨가 제롬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제롬을 줄리에뜨에게 양보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알리사는 자신의 행복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무조건 포기하는 것 또한 덕에 위배되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남의 행복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복은 쉽게 버리는 것 또한 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알리사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
“ 행복이 여기, 아주 가까이에 내밀어져 있다면...... 손만 뻗치면 잡을 수 있도록...... ”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사랑하는 그 순간이 모여 행복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알리사는 행복이라는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부족함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그 과정이 행복이다. 꼭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이 내 입술에 올려놓으신 말씀을 나는 몰래 배반하고 있었다. ... 제롬, 곁에 있으면 마음이 저려오고, 멀리 있으면 죽을 것만 같은 나의 애닯은 벗
이 구절만 보아도 알리사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에서 고통스러운 갈등을 하고 있다. 꼭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버려야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앙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가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 또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고, 성경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 사람 중에 한명이다.
자신의 신앙대로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신앙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야만 순결하고 독실하게 좁은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잣대는 알리사 스스로 만들어낸 하나의 기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알리사의 비인간적이 자기희생의 허무함을 비판한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좁은문에 들어가기 위한 일의 결과는 사랑하는 이도 지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마음 아픈일이다. 모든 사람에게 어떤 신앙이 절대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믿는 그 신앙은 그 사람에게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리사와 같은 희생은 신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알리사 또한 영원히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두게 되었다.
알리사에게 한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희생이라는 단어는 허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좁은문은 과연 어떤것인지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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