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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8
영광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수없이 기도를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제각각이기 쉽습니다.
1) 어떤 사람은 마치 하나님과 등진 사람처럼 기도가 단절 된지 오래거나,
2)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일방적인 응답만을 요구하는 기도로 일관하거나,
3)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처럼 양방향의 열린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식의 기도를 드렸으며, 또 앞으로 어떤 식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물론 지금까지 어떠하였든지 이제부터는 세 번째 사람처럼 기도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열려진 대화처럼 양방향의 열린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인지 오늘 말씀의 주인공 느헤미야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1. 근심하는 자 같으나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근심이나, 걱정이나, 염려가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에 분명히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를 위해 근심하는가 하는 가에 따라 그 근심과 염려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때로는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과오나, 실수 또는 과도한 욕심으로 인해 자초한 근심이나 걱정은 할수록 손해이며 또한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다른 사람의 문제나 신앙적인 문제로 인해 걱정과 염려를 한다면 그러한 근심은 도리어 유익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느헤미야가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였다고 하였습니까?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대제국의 황실에서 왕의 총애를 받는 술 관원으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염려나 근심거리가 없는 사람이었으나 고난당하는 동족과 무너진 조국의 회복을 위해 누구보다 많이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가만히 앉아서 한숨을 쉬거나 아니면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푸념을 하는 식의 염려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여러 달 동안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든지 아닥사스다 왕이 보기에도 얼굴이 수척할 정도로 생명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슨 문제로 그렇게 수척해질 정도로 고민하고 염려하는지 그 이유를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느 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물론 아닥사스다 왕은 누구보다 느헤미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한 질문은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그처럼 크게 두려워 한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다가 고레스 왕의 특별한 사면령으로 이미 1, 2 차에 걸쳐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과 성벽의 재건이 시도하였다가 아닥사스다 왕의 반대로 중단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스 4:21)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스 4: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당시에 왕의 내린 명령은 마치 신이 내린 말처럼 절대 무오하게 생각하였든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왕이 내린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번복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고민하고 염려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닥사스다 왕의 의사와 느헤미야의 생각은 상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해야 할 일입니까? 만일 느헤미야의 생각대로 라면 아닥사스다 왕이 자신이 내린 명령을 철회하는 절자가 없이는 회복될 수 없는 난제였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느헤미야가 자기가 고민하는 이유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라는 것을 사실대로 왕에게 이야기를 하였을 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진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얼굴이 수척할 정도로 기도하는 느헤미야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누구보다 근심이 많은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적을 대화를 나누는 행복한 자인 것입니다.
(고후 6: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종들의 기도를 오늘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해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 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는 느헤미야에게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묵도하고
아닥사스다 왕은 느헤미야가 얼굴에 근심과 염려가 역력한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느헤미야는 숨김없이 사실대로 고백을 하였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진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감동을 받고 느헤미야가 마음에 원하는 소원이 무엇인가를 되물어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는 느헤미야가 지금까지 얼마나 왕을 신실하게 받들었으며, 왕에게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당시 아닥사스다 왕의 권세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하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느헤미야가 무엇을 원하든지 다 들어 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신의 소원을 아뢰기 전에 먼저 역사를 주장하시는 만왕의 왕되신 여호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먼저 하였습니다.
(느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가 왜 왕에게 소원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먼저 하였을까요?
느헤미야가 근심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온 마음에 소원은 아닥사스다 왕의 정책과 상충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을 진노하게 할 수 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왕에게 소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매우 짧게 기도를 한 후에 사실대로 다 아뢰었을 때 뜻밖에도 왕은 이전에 중단시켰던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겠다는 느헤미야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었습니다.
(느 2: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느 2:6) 그 때에 왕후도 왕의 곁에 앉았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행할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즐겨하시기로”
느헤미야와 그의 동지들의 합심 기도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누구도 돌이키기 어려운 왕의 마음도 봇물을 돌리듯이 돌려 놓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미 고레스의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시고 또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스 6:22)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소원을 허락하여 주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울러 두 가지 청원을 하였습니다.
☛1)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여러 지역의 총독들에게 느헤미야가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조서를 내려 줄 것과
☛2)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성벽과 집을 재건하기 위해 필요한 재목을 공급해 주도록 조서를 내려 주실 요청하였습니다.
(느 2: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이와 같은 느헤미야의 요청은 이기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나님께 기도해온 기도제목들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닥사스다 왕은 한 가지도 거절하지 아니하고 느헤미야의 소원을 다 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기도의 응답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동안 금식하며 수개월 동안 기도의 동지들과 더불어 기도한 느헤미야의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다 응답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의 처지였다면 무엇을 먼저 하였을까요? 아마도 왕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그 후에 기도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정반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왕에게 소원을 아뢰는 일보다 먼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슨 일이 급해도 기도보다 더 급한 일은 없으며, 아무리 일이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잠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3.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심으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이 자신이 원하는 소원대로 다 들어 주었을때 그것이 자신의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하거나, 아닥사스다 왕의 너그러움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느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누가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며, 누가 기도가 열려있는 사람입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손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붙잡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을 볼 줄 아는 영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느헤미야와 같은 영적인 시각으로 나의 삶을 돌이켜 보고, 나의 일상 생활을 점검해보고, 나의 주변을 돌이켜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기도도 들어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은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만이 아니라 아무리 강퍅한 사람의 마음도 잡고 계시며 그 마음을 돌이키실 수 있는 선하신 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좋은 소식이나 감사한 일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오늘 우리도 보고 감사와 영광을 그 하나님께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전 9:1)“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아무리 선한 사람도 평생에 한 두 번의 실수와 허물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악한 사람도 어쩌다 한두 번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의 결과입니다.
느헤미야는 우상이 가득한 이방 땅에서 술 관원이라는 높은 신분을 누리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무슨 일이든지 먼저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이루어졌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언제 어디서나 계속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에 도착하여 삼일 동안을 시찰하고 보니 폐허가 된 그 성을 재건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그러한 마음을 먹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느 2:12)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게 하신 일을 내가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두어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보았을 때 무너진 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백성들의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으나 어느 방백들도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리 느헤미야의 의지가 강하고 의욕이 넘친다고 할지라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성벽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백성들의 마음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는 백성들에게 간증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을 듣고 나서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백성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모두 힘을 합해 성을 재건하자고 자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느 2:18)“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저희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그것만이 아닙니다. 호사다마라고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는 반드시 사단이 훼방하는 역사가 동반되어지는 법인데 느헤미야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한 북쪽 사마리아의 총독과 추종세력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이 상실당할 것을 우려하여 느헤미야를 비웃고 모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들이 과거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방해는 일에 성공했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느 2:19)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형통케 될 것을 믿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느 2:20)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가 어디서 그러한 용기가 생겼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기도를 들어주시고 함께 하신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를 훼방할 수 없다는 강한 확신이 그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 56: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시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의 말씀과 오늘 말씀과 공통점은 무엇이며,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민족이나 국가에도 하나님이 각기 주신 사명이 있으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소명감이며, 그 것을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해야겠다는 마음이 사명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와 다른 점이 바로 소명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분명한 소명감과 투철한 사명감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그에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 바로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상황에 따라 수일, 수 십일, 수 개월이 걸리는 기도만이 아니라 때로는 왕이 눈치를 챌 수 없도록 짧은 묵도까지 동원되는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모든 의욕을 상실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위해 협력하게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와 같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응답만을 계속적으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랑하는 연인간의 대화처럼 기도를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드리고 사람들 앞에서 그 하나님을 인정하므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만 이루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시며 또한 그것을 들어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랑의 대화인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구태여 우리 인간들이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고 영광에 목말라하시는 분이 아니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을 무척이나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할수록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기도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만으로 다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성경의 느헤미야처럼 우리도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