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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윗상’
미켈란젤로가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스승인 베르톨도(1491년에 사망)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메디치가에 소개해주었다. 메디치가에는 로마 시대의 조각을 많이 수장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궁에서 로마 조각을 마음껏 보았다.
그러나 메디치가는 2-3년 뒤에 몰락하고 피렌체에서 쫓겨났다. 가장 큰 원인은 재정 파산이었지만 도미티크 수도회의 사보나롤라가 종교 활동을 하면서 카톨릭의 부패를 강력하게 성토함으로 내부적으로 무너졌다. 메디치가가 떠난 피렌체를 사보나롤라가 통치했다. 공화정 체제이고, 폭력적이며, 엄격한 종교 원칙주의자인 사나보롤라의 정부에서는 예술은 피어날 수 없었다.
1496년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다. 이때를 로마 시대라고 말한다. 이때 바티칸의 피에타도 조각했다.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와 네 형제 간의 우애는 아주 돈독했다. 아버지의 간청으로 26세인 1501년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이때는 사나볼로라는 민중의 버림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사나볼로라가 사라지자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피렌체로 돌아왔다. 피렌체 정부도 공화국의 입지를 거대한 사업을 계획했다.
1504년에 피렌체 정부는 다윗상을 의뢰했다. 계약 내용은 미켈란젤로가 대성당의 부벽에 세울 거인 남자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다. 피렌체에 있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하나의 조각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레오나르드도 이 대리석으로 작품 만들기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레오나르드와 미켈란젤로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난 말이 아닐까 라고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미켈란젤로가 의뢰 받았던 작업 중에는 가장 특별한 것이어서 예비 스케치부터 철저하게 준비했다.
높이가 4m인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를 그 시대에 최고의 조각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상은 고대 그리스 조각을 모방하였으나 그리스도의 색채를 가미하여 만들므로 피렌체 공화국의 영광을 기렸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통상적인 승리자로 표현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긴 청년으로 표현했다. 다윗상은 분노와 슬픔을 절제하고 있듯이 보인다. 이것은 그리스 양식이지만 피렌체 조각 양식에도 적합하다고 보았다.
이 작품은 완벽하고 결함 없는 남성의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을 표현했다. 서양 미술사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남성의 누드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작품은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의 안에 있고, 똑 같이 본 뜬 모조품이 본래 서 있었던 시뇨리아 궁의 바깥에 서 있다. 눈동자가 있는 부분은 파내어서 회화와 거의 닮은 느낌을 준다. 시선에서도 강철같은 결의가 느껴진다.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하고 있어 꿈꾸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윗상은 많은 사람이 경탄을 금하지 못했지만 몇 몇 사람은 이 작품이 시뇨리아 광장으로 운반할 때 돌을 던지기도 했다. 다윗상을 의뢰한 피렌체 정부에, 엄격한 카톨릭 근본주의자들은 누드상으로 표현 한 것에 반감을 가졌으리라고 한다.
다비드 상은 피렌체 정부의 상징인 동시에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피렌체의 상징이기도 했다.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피렌체의 입지를 보여줄뿐더러 르네상스를 지배한 조각가로서 미켈란젤로의 입지를 세워준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