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오늘 문득 어느 법문을 듣다가 든 생각을 교수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頓을 진제로, 漸을 속제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오류가 있을지요?
답변입니다.
돈(頓, 단박에)과 점(漸, 점차적으로)은 깨달음에 이르는 속도, 다시 말해 '번뇌를 제거하는 속도'와 관계된 불교 전문용어이고,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이제(二諦)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전문용어입니다. 진제는 문자 그대로 '참된 진리'이고, 속제는 '세속의 분별에 근거한 진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억새가 가득한 들판의 동쪽 한 귀퉁이에 불이 붙어서 서쪽으로 이동을 할 때 "불길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은 속제입니다. 즉 '세속의 진리'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누구든지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그런데 보다 엄밀히 보면 억새밭 동쪽 한 귀퉁이에 붙은 불길은 절대로 서쪽으로 이동하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억새를 태우고 꺼집니다. 즉 바로 옆에 있는 억새에 불을 붙여서 다시 태우고 꺼지는 일이 계속 일어날 뿐입니다. 엄밀히 보면 불길은 매 순간 사라지고 있고 거꾸로 말하면 매 순간 새로운 불길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불길'이 억새밭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불길은 무상(無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매 찰나 명멸하는 불길에 실체(我)가 없어서 무아(無我)입니다. 불길의 정체에 대해, 이렇게 "불길은 무상하며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제, 즉 '참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불길' 한 가지만 예로 들어 진제와 속제를 설명했는데, 먼저 속제를 알고서 더 깊이 들어가 진제를 파악하는 일은, 비단 '억새밭의 불길'뿐만 아니라 '자아', '색수상행식의 오온' 등 다양한 소재에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자아가 윤회한다."고 아는 것은 속제이고, "무아이며,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다."라고 아는 것은 진제이며, 심신(心身)의 구성요소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으로 구분하는 가르침은 속제이고, 이런 오온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는 가르침은 진제입니다. (물론 아래 문답 가운데 'Re: 선과 악 그리고 유 무에 관하여....'에서 썼듯이, 진제에 고정된 내용이 있는 게 아닙니다. 진제를 다시 실체시 하면서 집착하면 이는 속제로 격하되면서 새로운 진제가 제시됩니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진제와 속제는 같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두 가지 표현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한 진리'가 진제이고 '세속적 분별에 순응하여 말한 진리'가 속제라고 풀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이제와 관련하여 <중론> 제24장 관사제품 제10게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10)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만일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10) vyavahāramanāśritya paramārtho na deśyate/ paramārthamanāgamya nirvānaṃ nādhigamyate//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의의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
지 않는다.
요컨대 이제 가운데 먼저 속제에 의거하여 진제를 체득하고, 진제를 체득해야 열반에 이른다는 가르침으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속제 → 진제 → 열반(깨달음)
질문에서 "頓을 진제로, 漸을 속제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오류가 있을지요?"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 보듯이 '속제 → 진제 → 열반(깨달음)'의 과정이 단박에 일어나면 돈오(頓悟, 단박에 깨달음)이고, 오랜 시일이 걸리면 점오(漸悟, 점차적으로 깨달음)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열반에 이르려면 인지적 번뇌(견혹, 見惑)와 감성적 번뇌(수혹, 修惑)가 모두 사라져야 하는데, 진속이제의 가르침을 통해서 '종교적 어리석음 등'과 같은 인지적 번뇌와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감성적 번뇌가 단박에 사라지면 돈오돈수(頓悟頓修)이고, 인지적 번뇌가 먼저 사라진(견도, 見道) 다음에 감성적 번뇌를 점차적으로 제거하여(수도, 修道) 열반에 이르면(아라한) 돈오점수(頓悟點修)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돈과 점 그 양상들이
어쩌면 진제와 속제와 연결될 수도 있지않을까 하는 설익은 생각에 여쭈어보았습니다
어떤 질문이던지 늘 성의있게 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