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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자의 서원」 중에서 「공양분」을 함께 읽습니다
~~~부처님의 무량복덕이 우리 생명에 흘러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마음의 장벽들이 모두 다 무너지도록 청정한 마음으로 공양하겠습니다. 부처님께 공양하겠습니다. 부모님과 형제와 모든 이웃에게 공양하겠습니다. 부처님께 공양하듯 차별없이 정성 다 바쳐서 공양하겠습니다. ~~~
<법문내용>
존경하고 사랑하는 불광법회 불광사 법등가족 형제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또한 오늘 법회를 함께 하고 계시는 전국의 사부대중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형제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 위신력이 항상 함께 해서 집안이 편안하고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축원해 마지않습니다. 며칠 동안 황사 때문에 전국이 컴컴했는데 이제 황사가 조금 걷히니 새로운 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온 산천이 연초록으로 물드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연초록의 마음과 같이 항상 밝고 희망찬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깊은 반야바라밀에 머문 보살은 침몰하지 않는다’로 정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저는 이 ‘행복한’ 이란 말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행복된 삶인가 행복한 삶인가입니다. 보통 우리는 행복한 삶이라 합니다. 정토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행복된 삶이라 말합니다. 가끔 법문을 하시는 여여법사나 한탑스님 말씀을 들어보면 항상 행복한 보다는 행복된 삶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정토사상에서는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행복된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던져준 성격이기 때문에 ‘행복된’ 삶이라 말합니다. 일본사람들이 ‘아리가또’라고 인사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고맙다는 말인데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일이 참 희유한 일이라 감사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복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두고는 어떤 사람도 정확하게 의미를 말하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조사스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말이 ‘일일시호일’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인데 새해가 되면 조사스님 말씀을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을 말씀하신 스님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모르는 말 중에 아주 중요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호사불여무(好事不如無), 아무리 좋은 일도 없는 일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어찌보면 너무 소극적이라 그건 아니라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스님께서는 호사불여무라 썼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무엇인가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도 사실 우리 생활 가운데 아무 일도 없는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고 그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돈도 벌고 권력도 잡기 위해 온갖 중상모략도 하고 부지런히 운동하러 산에도 다니는데 정작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정확한 답을 말하지 못합니다.
불교에서는 열반을 얻으면 행복한 삶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열반을 얻을 때만 행복한 삶이 온다고 말합니다. 지난 달에 열반시현일을 앞두고 부처님 말씀을 전하면서 열반이란 바로 상락아정을 얻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열반의 상태는 없어지지 않고 항상한 상태(常)가 있고, 항상 기껍고 즐거운 상태(樂)의 마음자세가 있고, 그 다음에 아(我)로 진실한 법이 있다고 말씀드리면서 설명을 적게 드렸습니다. 아란 자기의 주체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주체적인 생각을 잘못하는 것 같아요. 물론 정치하는 사람은 말이 심하기도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주체성이 없어서 남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휩쓸려서 자기 주관을 무엇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출가 입산해서 스님들과 더불어 산 지가 50년이 지났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대중공사를 해서 스님들과 의논을 할 때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면 그냥 침묵을 지킵니다. 지금의 불광 문제에 대해서도 저는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사형사제들에게 가장 섭섭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주장을 말하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지정화상의 문제에 대해 말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이래서 뭐가 잘못되면 말한 사람의 책임이 됩니다. 저는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1982년에 불광으로 올라와서 은사스님 모시고 법회를 하면서 불광사 준공할 때도 어쩔 수 없이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서열로는 다섯 번째 상좌였지만 주관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다른 사람은 말을 안 하니까 사실은 제가 많은 것에 대해 판단을 잘못해서 오늘날의 불광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습니다.
상락아정의 아란 진실된 법으로서의 내가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진리 자체의 내가 있다 하는 자체입니다. 이렇게 상락아정의 상태를 증득하는 것이 바로 참된 행복의 상태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열반을 얻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죠. 사람들의 마음에는 항상 온갖 갈등과 욕망이 우글거려서 내려놓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0~50년을 수행했다는 스님들도 옆에서 보면 저 사람이 과연 50년 수행한 사람인가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내려놓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출가한 스님도 선방에서 평생을 지내기가 힘들어서 다른 짓거리를 하기도 하죠. 자기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는데 하여튼 열반을 증득하면 제일 행복한 상태라 말합니다.
우리가 열반 상태를 증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불광법회에서는 우리의 모든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임을 광덕대선사께서는 대전제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들었기 때문에 불광법회의 초대 법주이신 광덕대선사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정말 세상이 깜짝 놀랄 말입니다. 우리의 각자 생명이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것에서 모든 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처님의 공덕, 위덕, 힘, 이 모든 것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는 선언 속에서 불광법회는 출발합니다. 모든 해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 말은 내 생명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좀 쉽게 풀이를 하자면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이 자체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을 잘 안 하고 이런 말이 있다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내 생명이 마하반야바라밀, 내 생명이 부처님 한량없는 공덕 생명이란 생각으로 살면 불행이 오려야 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다만 우리는 말만 그리 하고 그 상태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진행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깊은 반야바라밀에 머문 보살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경문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합장하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대품반야경』 「도공품 제65」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무슨 인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마음이 침몰하지 않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있는 바가 없기(無所有) 때문에 침몰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은 여읨(離)인 까닭에 침몰하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은 적멸(寂滅)이기 때문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인연 때문에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마음이 침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침몰하는 이를 얻지 못하고 침몰하는 일을 얻지 못하며 침몰하는 곳도 얻지 못하니 이 온갖 법은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런 법을 듣고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침몰하는 이, 침몰하는 일, 침몰하는 곳, 이런 법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모든 하늘 및 석제환인천, 범천왕천 및 세계의 주인인 하늘이 전부 예배합니다.”
반야바라밀에 있어서 깊은 반야바라밀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반야심경에도 깊은 반야바라밀이 나오는데 큰스님께서는 육바라밀을 다 포함하는 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중국의 현수 법장스님은 아공과 법공을 다 통과하는 반야가 깊은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25년 전엔가 ‘반야불교 신행론’이란 책을 냈는데 『대품반야경』을 다 번역하고 대품반야경에 입각하여 낸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을 낼 때는 일본 갈 때도 그랬고 반야바라밀 사상으로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책을 번역하고 책을 내고 나니 마가 끼었습니다. 송암사태가 일어나서 우리 형제들이 뿔뿔이 헤어져서 법회 나오는 식구들이 반으로 줄었고 그 뒤에도 자꾸 문제가 생겨서 이 책으로 강의를 못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대품반야경에서 반야바라밀을 마땅히 배워야 하는 이유로 73가지가 있는데 43번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해서 보시를 할 때 능히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을 원만히 갖추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배워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6바라밀을 말할 때 여섯 가지 즉 보시에서 지혜바라밀까지를 다 말하지만 이 반야경에서는 여섯 가지 가운데서 반야바라밀이 사실은 보시에서 지혜까지를 다 포함하는 이치를 배우기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은 반야바라밀이란 말 자체가 6바라밀 전체를 포함한 것으로 이것을 깊은 반야바라밀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반야심경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침몰이란 배를 탄 것으로 대승불교에서 대승은 큰 수레인데 큰 수레에는 배도 있습니다. 그 배를 타고 가다 태풍이 불면 배가 침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면 침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침몰하지 않는 이유로 침몰하는 이, 침몰하는 일, 침몰하는 곳도 얻을 수 없어서 불가득,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가득을 법정스님께서는 무소유란 말을 써서 세상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법정스님의 깔끔한 글씨힘도 있지만 무소유로 살라는 그 말씀이 굉장한 울림을 주고 무소유란 책을 내어서 불교를 새롭게 보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무소득이란 얻을 바가 없다, 가진 바가 없다는 뜻인데 단어자체로는 해석이 안 됩니다. 소득이란 내게 없는데 일을 해서 어떤 사람이 보상을 주었을 때 소득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무소득이란 아무도 내게 주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경에서 말하는 무소득이란 내가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광덕대선사의 표현대로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구태여 받을 필요도 없고 부처님께 구걸해서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이 무소득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이란 실질적으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상태라서 세상에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난 겁니다. 옛날에는 태어나는 사람이 자기 먹을 복은 갖고 나온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노력만 하면 요즘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 것을 뺏으려는 건 도둑의 마음입니다.
제가 둘러보니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은 먹고 살기에 충분합니다. 벌레나 식물, 동물도 다 먹을 수 있는데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못 먹기도 하지만 자연적으로 두면 모두 먹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속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굶는 일도 생기고 전쟁도 합니다.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전쟁하는 것처럼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려는 것은 아수라판이 되는 것이고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됩니다.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 깊은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무소유이고 여읨입니다. 여읨이란 모든 탐욕과 성냄과 시기심을 여의어서 반야바라밀인데 내 본래 마음은 시기심도 질투심도 없어서 본래 태어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소득으로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어서 모자람이 없으므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입니다. 다만 이것을 얼마나 내 것으로 해서 내어 쓰느냐는 문제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이것을 내어 쓰지 않고 공짜로 달라고 하니까 소득이 안 생기는 겁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확실히 100% 믿으면 저절로 자기 삶 가운데 생산됩니다. 생산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법등모임도 갖고 일과를 지키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 불광 형제들이 법등, 일과를 지켜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얼마나 염송하는가를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염송하지 않고 안 풀린다고 하는 것은 내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겁니다. 노력해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얼마나 느끼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집니다. 기도의 가장 근본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음이 느껴져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입니다. '그렉 브레이든'이라는 사람이 1700년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이란 책에서 핵심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것을 느낄 때 그것은 성취된다는 겁니다. 티벳스님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기도비법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런 감이 느껴질 때까지 하는 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하면서 얻어졌다는 느낌이 와야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염송하면 된다는 건 잘못된 겁니다.
일단은 무소득이라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하는 이것이 한탑스님이 자주 말씀했던 덕택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덕택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덕택으로 사는 것이 자기에게 오게 됩니다. 그 다음에 반야바라밀은 적멸이기 때문입니다. 적멸이란 편한 겁니다. 저는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 삼법인의 제행무상, 제법무아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는데 적멸위락이란 말은 이해가 참 안 되었습니다. 적멸이 뭔데 위락일까 하고 해석이 잘 안 되었습니다. 뒤에 보니까 적멸 자체를 얻으면 위락이 된다는 말입니다. 최고의 즐거움은 적멸을 얻을 때입니다. 열반을 얻으면 그때 최고의 즐거움이 오는 겁니다. 우리는 열반이라는 경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해서 아프지 않으면 즐거움이라 생각합니다만 핵심적인 것은 적멸의 즐거움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혹자는 너무 소극적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이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일일시호일을 쓴 스님께서는 호사불여무라고 한 겁니다. 가장 좋은 일은 아무 일도 없는 것인데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TV나 책도 안 보면 바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그것, 탐욕심도 분노도 없이 사는 것이 최고의 삶입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생명은 그렇게 삽니다. 사람은 자꾸 따지고 뭔가 얻으면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보름달이 뜰 때 밖에 나가 보십시오. 산중에서 가만히 앉아 달빛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산길을 따라 걸어보면서 내가 얼마나 편안한가 생각해보면 이것이 적멸의 상태입니다. 운문스님이 말씀하신 호사불여무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이것이 가장 좋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스럽게도 뭣인가 자꾸 일이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침몰하지 않으려면 먼저는 무소득으로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해야 합니다. 다음은 여읨으로 탐욕과 성냄을 벗어버리고 셋째는 적멸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마하반야바라밀을 하루에 30분이라도 염송해서 내 속에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을 확인해야 됩니다. 실질적으로 봐야 부처님 감사합니다란 말이 나오고 그래서 감사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만족이 나옵니다. 살면서 자식이 좋은 대학 가고 남편이 좋은 짂장 다녀야 만족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노력 여하에 따라서 끊임없이 만족할 일이 벌어집니다. 그 속에서 행복이 오고 그럴 때 삶에서 결코 침몰하지 않는 순간이 되고 그런 순간에 우리는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서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우리 불광형제들이 되길 바라며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불광인의 선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우리는 불광법등입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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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당 오르내리며 사진 찍으신 지일심 보살님, 시위사진까지 챙겨주심에 감사합니다. ....()()()....
바라밀 님 오늘도 법회일지 작성하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나와 인연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했다고 전해 달라'라고 하시던 한탑 스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불광 법회 모든 분들은 '깊은 반야 바라밀다에 머문 보살로서 감사하고 행복된 삶'을 살아 가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