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루(萬歲樓)
선운사 만세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였는데, 2020년 6월1일 보물206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2021년부터 지정번호 폐지로 지금은 그냥 보물이라 한다.
만세루는 선운사의 강당(講堂)으로 강학과 의식공간이며, 정면9칸 측면2칸으로 ‘누(樓)’라 이름 하였으나 실제로는 낮은 단층 건물이며, 한 중앙의 문을 열면 대웅보전과 천왕문을 연결하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보전 쪽으로는 벽체를 두지 않고 개방하여 대웅보전 건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 같이 되어있다.
사찰에 있어 누각(樓閣)은 대체로 주불전(主佛殿) 앞에 대칭적으로 위치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의 불전이 애당초에는 불감(佛龕) 기능만 하였지 예배의 공간까지 포함하지 않았고 예배는 그 앞에 대칭적으로 누각 같은 것을 지어 행하게 된데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운사의 경우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에 6층 석탑이 있고 석탑 앞에 만세루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통과하면 만세루가 대웅보전을 가리고 안정감 있게 선운사 마당 한 가운데 위치해 있는 것이다.
선운사의 만세루는 고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몇 층으로 이은 기둥이며, 울퉁불퉁한 보, 구부러진 석가래 등 건축 목재로는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 드는 나무를 사용하였다. 그러면 왜 이런 목재들이 사용되었을까? 정유재란 때 일본군들이 사찰건물 전체에 불을 지르고, 탑도 무너뜨려버린 것을 광해군 때 다시 지으면서, 대웅보전부터 먼저 짓고, 목재가 남아 만세루를 짓다보니, 이번에는 목재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목재를 구해다 기둥도 잇고, 보도 껍질만 벗겨 원목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석가래도 구불구불 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여 지었다. 그러나 쇠못 하나 사용치 않고 정교하게 맞추어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힌 집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고건축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400여 년이 넘은 목조건물이지만 옛 선인들의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은 비단 우리뿐이 아니다.
고(故) 이기화(전 고창문화원장) 선생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당연한 귀결(歸結)이라고 설파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말을 인용하여 만세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한국미술의 가치관과 특질을 중국의 형태, 일본의 색, 한국의 선이 동양미술의 근간을 이루는데, 특히 한국 초가지붕의 선은 고만고만한 낮은 산등성이의 아릿다운 여성들의 젖무덤 같은 선과 함께, 자연 친화요, 자연에 순응하며 천명(天命)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만만 한 한국 민족성의 표출인 것이라고 찬양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에서 1970년 초까지 선운사 주지스님이었던 배운기(裵雲起) 화상이 상좌로 있을 때 안내를 받아 3일 동안이나 묵으면서, 매일 아침마다 만세루 전각을 3바퀴씩 돌면서, 혼잣말로 주문을 외우듯이 아홉 칸의 30개 기둥을 빠지지 않고 합장배례하면서, “부처님 고맙기도 하시지. 하! 이런 엄청남 이치를 깨우쳐 주심이여.” 상좌가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 전각이 예사건물이 아니요. 이 집은 헝겊 자투리를 주어모아 어떤 옷을 짓듯이 했어도 이렇게 훌륭한데, 아무리 좋은 재목을 마음대로 골라 써서 지어도 이 집처럼 근사할 수가 없어! 기둥들이 세 토막, 네 토막, 심한 것은 여섯 토막의 자투리 재목을 이어 받쳐 몇 백 년을 지탱해온 건축기법, 자연목 그대로 이어 받치거나 괴어놓거나 꿰어 매듭을 짓거나, 어는 것 하나 못 하나 걸치지 않은, 오직 나무 쐬악을 박거나 침묵으로 받쳐놓은 것을 보면, 이는 정녕 조물주의 조화만 같아, 그 토막토막 이어 맞춘 기둥의 보꾹, 그득히 한 치의 허튼 수작도 없이 꼼꼼히 얽어낸 것을 보면 이는 오직 여기밖에 없는 건축예술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 ‘만세루’를 보고 한국인들의 무한한가능성을 읽고 있는 겁니다.” 뒷날 상좌스님의 이 놀랄만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뿌듯한 무엇이 내 가슴을 차오르게 하였다고 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