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을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왜인지 아시나요?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당신이 만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도 자기 자신을 구원했을 뿐입니다. 예수 역시 자기 자신만을 구원했을 뿐입니다. 예수는 뭇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재림하지 않습니다. 경허선사도 자기 자신만을 구원했을 뿐인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구원한 이들은 한결같이 복음(복된 소리)을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당신을 누구라서 그 속에서 당신을 빼 내어 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몸과 마음에 동일시 되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치 세상은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써 "내가 죽고 나서도 세상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당신이 죽고 나서도 세상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대체 누가 있어 중얼거릴 것입니까? 그 세상 자체가 사라졌는데 말입니다.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기 직전 거기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그 세상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동시적으로 세상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당신이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진리...라메쉬 발세카
완전하고 전적인 깨어있음의 상태에서 의식은 자신의 깨어있음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의식이 오옴(Aum)의 소리로 휘저어지면 꿈 -마야(Maya)의 창조가 시작된다.
이제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으며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에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내가-존재하고-있음의 사랑에 빠져 들어가 상대성의 세계에 스스로의 몸을 나툰다.
남성 -여성 두 측면의 결합을 통해서, 허공 공기, 불, 물, 흙의 다섯 가지 요소를 통해서, 빛(Sattva), 에너지(Rahas), 어두움(Tamas)의 세 구나(Guna)를 통해서 의식은 잠시 몸으로 나눈다. 꿈속의 시. 공간에서 그것은 현상으로 드러나고 수만 가지 현상을 지어내어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만물에 스며들어 곳곳에 편재(偏在)하는 의식 : 의식은 이러한 형상들을 통해서 기쁨과 사랑으로 반야(Prajna)의 빛을 비춘다. 그렇게 해서 지각력이 있는 존재, 단순한 형상이 잉태되니 이 얼마나 놀랍고도 놀라운 일인가!
스스로를 주관으로 파악하고 서로를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여 각 개체는 스스로를 독립되고 분리된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크나큰 환상. 자신의 판단, 자신의 취사선택이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본체적 절대로서의 자신의 무제한한 잠재력을 잊고서 보이는 제한된 모습만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단순한 형상이 반야의 기능을 떠맡아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를 기준 잡아 스스로를 환상의 속박에 매어 놓고서 삶의 고통과 즐거움을 겪는다. 그러면 그때 거룩한 빛과 은총으로 가득 찬 자비로운 구루가 나타나 그의 참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잉태된 정액(精液) 한 방울에 지나지 않으나 그 안에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내제되어 있어 이로써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이 생기게 된다. 라마, 크리쉬나, 이쉬바라, 브라흐만 등 수천가지 이름을 붙이어 놓아도 결국은 똑같은 내가 -존재하고-있음인 것.
거대한 환상, 마하마야 (Mahamaya)는 스스로의 본성을 혼미하게 하여 길을 잃어버리고 떠돌게 한다. 마침내 구루가 말하기를 잠깐, 너 자신을 보아라. 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진실로 영광을 받아야 할 너 자신을 보아라.
시간이 없던 본래의 상태, 절대적 본체로부터 순간적인 병, 몸 -마음이 생겨났으니 그것은 자발적인 것. 이제 이것이 아무런 이유나 명분도 없이 반야의 기능을 대신하여 자신에게 할당된 기간 동안 움직여 나간다. 마침내, 몸- 마음 역시 자발적으로 사라지게 되면 더 이상 의식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니 아무도 나지 않고, 죽은 이 아무도 없는 깨어있음으로 잠겨 들어간다.
이제 니사르가타 마하라지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용어로서 말한다. 당신이 몸을 얻기 전, 당신의 본래 모습은 무엇이었는가? 그 근원으로 돌아가서 고요함을 지키면,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바로 그 사람조차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때 온전한 “하나”속에, 상대가 없이 깨어있음 조차 알지 못한 채로 “나는 -존재 한다.”
직관으로 이해하기 쉽고 깊은 확신을 주지만 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 서는 것. 이성은 오로지 객관적 현상세계의 있고 없음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본모습”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니 : 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음이 있는 것도 아닌 것, 바로 그것이 “나의 본모습”일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