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 반드시 결산의 때가 있기에
신명기 26:4~15, 시편 112:1~9
야고보 2:14~26, 마태복음 25:31~46
창조절 열둘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오늘은 창조절 열둘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창조절기의 마지막 주일을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다음 주부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들어갑니다. 창조절기와 대림절기의 연결지점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추수감사 절기를 맞이했습니다. 창조절기는 주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듣는 기간인데, 추수감사절이 오버랩 되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구약성경, 신명기 26장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렇게 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토지의 소산을 얻거든,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감사예배를 드리라, 그랬습니다. 너희가 이집트의 노예로 있을 때 얼마나 억압 받고 학대를 받았느냐, 그런 압제에서 너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원조입니다. 너희가 어디에 가든지, 어떻게 살든지, 거기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얻거든, 요즘말로 하면 월급을 타거든,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월급을 타거든, 토지의 열매를 얻거든, 그것이 너희들이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농경사회에서는 농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날씨가 갖춰져야 하고 비가 와야 하고 영양분이 올라와줘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도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농사를 다 짓고 결산을 할 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예배하는 자세, 그것은 생명을 키우는 문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의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열매를 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거름을 주고 북돋을 뿐이지 그것을 키우는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 생명에 대한 바른 의식에서부터 우리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되었든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은 신앙인이 가지는 가장 기초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둘째는 이집트의 노예로 있을 당시 소수민족으로 너무 큰 학대와 억압과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특별히 그런 어려운 사람들을 챙겨라, 그런 말입니다.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객을 불러서 함께 예배하고 그들이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랬습니다. 레위인은 토지를 주지 않고 종교를 전담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들도 고아나 과부나 객처럼 챙겨야 했습니다.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떠도는 객은 생산수단이 전혀 없습니다. 저들이 챙기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연대하는 일이 바로 추수감사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과제입니다. 저들 끼리만의 교회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런 이웃들을 외면하고 우리끼리만 감사예배를 드리고 만다면, 그것은 참된 추수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야고보서를 보면,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믿음으로 자기를 구원한다는 것이 가능하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 하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러면서 그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기생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자들을 피신시켜 줬습니다. 영혼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천사와 함께 오셔서 모든 민족을 모으고 심판을 하십니다.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놓고, 양의 편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이 때 의인들이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하면서 반문합니다. 의인들의 특징은 스스로 예수님께 했다는 자의식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자의식과 자기 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어려운 이웃을 보고 외면할 수 없어, 돌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자기들의 판단과 의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이 보시는 관점에서 그렇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랬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작은 자를 동일시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창세기 말씀에 의하면, 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삼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작은 자를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을 추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의 논리에 따르면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고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배와 이웃 섬기기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것,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객을 섬기는 것, 이 땅에서 억압받고 학대받고 감옥에 가고 헐벗고 병들고 주릴 때 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시대(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시대에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평소에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우리 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혼돈과 흑암의 시대에 행함과 결단이 필요할 때, 그 때는 우리를 돕지 않는 사람, 반대편에 서서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저 침묵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작은 자가 곧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인 주님이 지금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혀 있습니다. 굶주려 죽어 가고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배입니다. 침몰하는 배입니다. 청와대 대통령과 행정부, 보건복지부, 교과부 등 모든 공직에 비선실세가 작동돼 나라 전체가 침몰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이 다 죽어 가는데, 마치 세월호처럼 죽어가고 있는데, 선장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국민을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에 침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도움을 줬으니 곧 나를 도운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을 말합니다. 기독인의 사명입니다. 기독인은 지극히 작은 자의 삶이 곧 주님의 삶임을 깨닫고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방향을 맞추는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았느냐? 언제 주님이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이웃을 섬기지 않은 것,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데서 그치라는 뜻은 아닙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상황은 현대사회가 분석하기를 이미 사회구조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사회구조의 문제로 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욱 심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지극히 작은 자의 아픔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인 것은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구조적인 측면을 관심하고 기도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려운 이웃을 위한 희생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처럼 때로는 기존의 체제와 갈등관계를 낳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그냥 어려운 이웃만 구제했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위의 권세에 순종하라”는 성경구절을 대고 권력과 야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헌법이 말하는 것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실제 권세는 국민입니다. 공무원은 그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인데, 그 행사가 불법이거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것이라면 오히려 지극히 작은 자의 아픔을 최소화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구제와 봉사와 개혁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중세 가톨릭의 부패에 맞서 개혁을 했던 프로테스탄트는 저항정신이 기본입니다. 그리고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개혁해가는 교회가 모토입니다. 종교권력의 부패, 정치권력의 부패, 경제 권력의 부패는 필연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의 삶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력들이 부패하면 지극히 작은 자의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그런 작은 자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놔두고 무조건 구제만 한다면, 그것만큼 위선이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되,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인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지원과 연대가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심판 날에 우리 모두가 생명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요청되는 준엄한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되, 더욱더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연대하여, 모든 조직을 선하게 만들어서, 그 나라가 생명의 나라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좌우의 두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비상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두 날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 조화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이웃 사랑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입니다. 창조절기에, 추수감사 절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늘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