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은 “당신의 가문에 대해서...”라고 질문을 받으면 자신의 본관은 ○○이며 파는 ○○公派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파들 중에 “부마공파”나 “○○위(尉)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조상이 조선국왕의 부마(駙馬) 즉 공주나 옹주의 남편이었다는 소리입니다. 이른바 국왕의 외손(外孫)이라는거죠.
그런데 우리는 고려황제의 부마 후손에 대해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있어도 진주의 강씨나 단양의 우씨 일부에서 고려 공양왕(恭讓王)의 부마였다는 이야기는 나옵니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기 이전 부마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려황제들은 딸이 없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려황제의 부마는 거의 이성(異姓)에게 딸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즉 종실(宗室)만을 사위로 삼은 거죠. 한마디로 동성동본(同姓同本)의 극치였죠.
고려의 부마들을 살펴본다면 태조 왕건의 공주는 모두 9명이 나옵니다. 그 중 장녀가 바로 낙랑공주로 신라에서 항복한 경순왕에게 준 딸이죠. 현재 대부분의 김씨들이 경순왕에게 나왔고 경순왕의 장남과 차남을 제외한 아들들은 이 낙랑공주의 후손들이죠. 즉 김씨들은 태조 왕건의 외손들임 셈입니다.
태조 왕건은 이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자식들끼리 결혼시킵니다. 즉 어머니가 다른 오누이가 결혼 했다는 거죠. 오빠나 여동생이자 남편과 아내라는 현재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요상한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래서인지 태조 왕건 이후 손자 대에서 후손이라고는 현종(顯宗)밖에 안 남습니다. 혈족결혼의 폐해가 바로 3대도 못가고 드러난 겁니다. 현종도 숙부와 조카며느리와의 이른바 희대의 사랑(?)에서 태어난 약간 미덥지 않은 자손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고려황실에 대해 기록할 때 이런 사실들을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감히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그 덕에 이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 유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눈을 빌려도 그야말로... 아마 귀여운 애완동물 이름 여럿 나옵니다.
이런 혈족결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많지만 생략하고, 살아남은 유일한 왕건의 손자 현종은 자손의 많이 두려고 종실에서 황후를 맞이하던 풍습을 피하고, 이성의 대신가문에서 왕비를 얻습니다. 이때 나타난 외척이 바로 안산 김씨(安山 金氏)입니다.
물론 왕비는 한 명은 아니었고 기록된 왕비의 수 만해도 12명나 되죠. 이들 모두 이성의 왕비들입니다. 그런 노력이라서인지 왕자가 무려 5명이나 태어나는데 어머니는 다 다르지만.
현종의 아들을 알려진 순서대로 적으면 덕종, 정종, 문종 그리고 4번째가 평양공(平壤公) 기(基)라는 황자가 있었는데 이 평양공은 무지 형님인 문종에서 당합니다. 즉 문종의 자식은 많은데 이 동생이 황위를 노릴까 의심 하는거죠. 어딜가나 골육상쟁...
그 덕에 평양공은 자식 셋 중 둘하고 목숨을 잃고 막내 낙랑후 영(樂浪侯 瑛)만 살아남습니다. 평양공 부자의 죽음 뒤에는 문종의 왕비 친정인 경원 이씨(慶源 李氏)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죠. 즉 문종의 사후 전통(兄弟世襲)대로라면 동생인 평양공이 계승할까 외손자들의 안전을 위해 평양공을 제거한 겁니다. 경원 이씨라면 고려역사에서 그 유명한(?) 이자겸 가문으로 당시는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이 권세를 누리고 있었죠.
이 평양공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이 평양공의 남자후손들이 고려황제의 주된 부마들의 공급처 가문(?)이었습니다. 낙랑후가 처음 문종의 공주인 보령궁주(保寧宮主)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얻고, 이어 장남인 승화후 정(承化侯 禎)이 숙종의 딸 흥수궁주(興壽宮主)에게 장가를 들어 이 이후 자손들은 대대로 황제의 부마가 되죠.
즉 세대에 한 명씩은 부마가 된다는 겁니다. 아마 평양공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문종의 후손들의 보상심리가 아니었는지...
이후 공주들은 사촌이나 육촌인 왕의 왕비가 되지 않으면 종실의 부인이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마는 그냥 종실이라고 생각해서 그다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 “종실=부마” 등식성립 > 이런 폐쇄적 전통이 깨어지게 되는 시기는 바로 ‘무신들의 난’ 이후입니다.
TV에서 모두가 신나게 보는 “武人時代”를 보면 무신들이 신분상승을 위해 얼마나 황실에 연줄을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의민이도 최충수도 그것 때문에 형한테 목숨 날리고... 그건 모두 너무나도 폐쇄적인 고려황실에 어떻게든 끼어들어서 한탕으로 신분상승효과를 올리고자 하는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죠...
위의 사례들은 대부분 딸을 태자에게 보내려고 하는 케이스고, 영리한 독재자 우봉가문의 최충헌(崔忠獻)은 동생의 사례에 비추어 딸을 보내기 보다는 공주를 얻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주는 제위계승과 무관하니 저항이 덜 할거라는 아주 고도의 계산을 구사하죠.
이런 계략으로 최충헌은 강종의 공주인 정화택주(靜化宅主)를 얻습니다. 최충헌이 봉해진 작호는 진강공(晋康公)입니다. 이어서 아들 최전(崔瑼)이 희종의 딸 덕창궁주(德昌宮主)에게 장가들어 영가후(永嘉侯)로 봉해집니다. 우봉의 최씨들이 드디어 철옹성의 관문 부마의 지위를 깨뜨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 빼고는 모두 종실들로 부마자리는 채워집니다. 물론 지위가 낮은 서녀(庶女) 몇 사람은 제외되지만 왕비가 낳은 자녀들은 대부분 최씨를 빼고는 종실에게 하가(下嫁)하는 전통은 계속 유지됩니다.
우리 고려의 공주가 원나라에 시집가는 케이스는 원 간섭기에 충혜왕과 왕비 덕령공주(쿠빌라이칸의 손자 관서무정왕 초팔의 딸)사이에서 태어난 장녕공주(長寧公主)가 원나라 황제의 조카였던 노왕(魯王)과의 결혼입니다.
이 국제결혼은 공민왕 때 노왕이 반란으로 피살되면서 공주가 귀국함으로 끝나지만, 우리 고려가 항상 몽골공주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 공주도 세계 최강의 원 황실의 황족(황제의 조카)에게도 시집갔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려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죠. 통혼을 이루는 것은 어느 정도 대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몽골의 복속국들은 거의 노예수준이었지만... 러시아제국의 직계조상격인 키예프공국은 몽골의 지방 세금관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 고려는 당시 부마국이었죠.
원 간섭기 이후는 폐쇄적 결혼풍습에서 벗어나 대부분의 공주들을 이성가문에 보내는데 이때 충선왕이 왕실과 통혼이 가능한 가문 몇 개를 지정해 줍니다. 이들에게 통혼을 허락하는거죠. 그러나 이후의 왕들은 자식들이 별로 없어서 부마들이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 왕 공양왕에게 3남5녀가 있는데 장녀인 숙령궁주가 종실 익천군 왕집(王緝)에게 하가 한 것을 제외하고는, 차녀 정신궁주는 단양우씨 우성범(禹成範)에게 삼녀 경화궁주는 진주강씨 강회계(姜淮季)에게 사녀는 순천박씨 박석명(朴錫命)에게 오녀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인 무안대군 이방번(李芳蕃)에게 하가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고려의 부마선택 관습이 변화를 일으킨 겁니다.
조선은 절대 이런 종실간의 혼인을 용납하지 않아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결혼제도를 정착시켜 나간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입니다. 가문, 즉 혈족을 지키기 위한 일을 보면 어쩌면 본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大界//
역시 알지못하는 역사책에도 나와있지 않은 자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