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창군 연혁(淳昌郡 沿革)
o 삼한(三韓)시대 : 마한(馬韓)에 속했으며 오산(烏山)과 옥천(玉川)이라 칭했고
o 3국(三國)시대 : 백제(백제)의 땅으로 도실(道實)이라 하였다.
o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 : 순화(淳化)라고 하였으며
o 고려(高麗)시대 : 순창현(淳昌縣)으로 남원부(南原府)에 속했고
_ 1175년(명종(明宗)5년) : 감무(監務)를 배치하였으며
_ 1314년 (충숙왕(忠肅王)1년) : 순창군(淳昌郡)으로 승격(昇格)하였다.
o 조선(조선)시대 : 초기(初期)에는 18방(坊)으로 나누어 관할하였고
_ 1897(고종(高宗)34년) : 방(坊)을 면(面)으로 바꿔 부르고 집강(執綱)을 두어 18면을 관할하였으며
o 일본 통치시대 : 1914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인화면(仁化面)과 호계면(虎溪面)을 인계면(仁溪面)으로 통합하였으며
- 풍실면(豊實面)과 오산면(鰲山面)을 풍산면(豊山面)으로
- 팔등면(八等面)과 덕진면(德進面을 팔덕면(八德面)으로
- 상치면(上置面)과 하치면(下置面)을 쌍치면(雙置面)으로 통합하였고
- 남원부(南原府)에 속해있는 영계면(靈溪面)을 순창군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아동면(阿東面)의 구미(龜尾), 어치(於峙), 동심(同心) 등을 영계면(靈溪面)으로 한 14개면을 관할하였다.
- 1917년 : 좌부면(左部面)과 우부면(右部面)을 순창면(淳昌面)으로 통합하여 13개면으로.
- 1919년 : 금과면(金果面)과 목과면(木果面)을 금과면(金果面)으로 통합하여 12면 126리(리)로.
- 1935년 : 구암면(龜岩面)과 무림면(茂林面)을 구림면(龜林面)으로 총합하여 11개면 131리로 각각 관할하였다.
o 대한민국 : 1979년 5월1일 순창면을 순창읍(淳昌邑)으로 승격하여 1읍(邑) 10개 (面) 131리 273개 분리(分里)로 관할하였고
- 1981년 7월1일 1읍,10개면 131리, 281개 분리(分里)로 관할해 오고 있다.
- 2003년 2월8일 1읍 10개면 131리 300개 분리(分里)로 개편관리. 끝.
ⓞ 인계면의 유래(仁溪面由來)
1983년 10월 순창군에서 발행한 "옥천의 얼"지(誌)에 의하면
o 삼한시대 : 마한에 속해있고
o 삼국시대 : 백제에 속했으며
o 고려시대 : 남원부(南原府) 순창현(淳昌縣)에 속하였고
o 조선시대 : 초기에는 인화벌방(仁化伐妨, 芿化伐妨)과 호계방(虎溪妨)으로 통치 되어 오다가
_1897년(高宗34년) 방(妨)이 면(面)으로 바뀌어 인화면(仁化面)과 호계면(虎溪面)으로 불러졌으며 11개리를 집강(執綱)이 다스렸다.
o 일제시대 : 1914년 인화면과 호계면을 통합하여 인계면이라 하고 11개리(里) 23개분리(分里), 38개반(班)으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끝.
② 심초리마을 유래
심초마을은 순창군과 임실군의 경계인 북쪽에 위치한 노령산맥이 높이 솟구쳐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 매봉산고지 매봉산을 기점으로 좌우로 한폭에 산수화 처럼 높은 산이 울창한 층봉으로 이루어져 사방천지가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굴속같은 깊숙한 골안에 분지를 틀고 형성된
해와 달도 늦게 찾고 일찍 지는 심심산골 오지마을 우물안처럼 보이는게 높고 좁다란 하늘과 높은 산에 울창한 나무숲뿐인 깊숙한 두메산골 오지마을 옛날 부터 마을 이름을 형국 형세 자연의 지형에 따라 깊은 골짝에 수림만 울창하다하여 지푸실이라 불으다가 1914년행정구역 통폐합시에 심초리[深草里]라 명칭을기록 사용하여 왔던겄이다.
그리고 심초마을 터가 처음 생긴 옛 마을 터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시적굴 [始積窟]담안네장네[墻內]에 터에서 고려상감분청자기와 순창[淳昌]이라고 글씨가 색여진 청자 파편이 2개나 출토되고 또한 선사시대 돌칼이 출토된점을 보면 심초리부락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거주 정착한것으로 추측이된다.
전해오는 유래설로는 옛날 옛적에 안골에 절이 있었는데 절에 현명(賢明)한 스님도인(道人)이 지형(地形)에 맞게 작명(作名)한 동명(洞名) 동명작이라 유래하여 전해온 마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다.
지푸실은 전라도 방언으로 깊다는 뜻을 의미하므로 그렇게 불려온 것으로 알아야 한다.
③ 심초마을 지형지세와 선사시대 발굴터
심초마을 주산인 매봉산을 511m의 높은 산으로 심초마을의 주산이며 인계면의 주산이기도 하다.
매봉산의 형상은 매가 양날개를 펼쳐 인계면 일대를 품고있는 형상 인계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봉산을 기점으로 심초마을 좌우산들은 매봉산이 511m병풍산483m 두류봉이 514m 어가봉이 513m 노적봉이 300m 압산 고지가 300m 선암산이 400m로 사방이 높고 웅장한 산들이 둘러쌒고있는 깊숙한 골짝에 자리잡고 있는 심심산골 오지 마을이며 하늘은 높고 좁아 보이고 나무숲만 울울창창 깊숙한 두메산골 오지 마을이다.
심초마을은 511m 매봉산 줄기밑에 시적굴이란(始積窟) 담안네골짝에 처음 분지를 틀고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처음 터를 잡은 부족장(部族長) 집터는 지금도 아름더리 바위돌로 담장을 쌓아 살았던 터가 2000명 정도 있었고 그 밑으로 부족들이 살던 터가 10집정도 담장으로만 흔적을 남겨 놓고있다.
이곳에서 선사시대 때 돌칼이 출토되고 고려상감청자가 출토되었다.
지금의 부락터는 3번째로 닦은 터이다.
시적굴(始積窟)이란 처음으로 터를 잡아 담장을 쌓고 움집을 짓고 살던 곳이라 풀이한다.
④ 심초마을 마을터 이동경로
o 지푸실 동네는 고려조의 1110여년 이전부터 살아왔다고 추정되고 최초의 거주정착지점은 현 지푸실마을 북쪽의 매봉산자락의 평평한 능선에 자리한 "시적굴(始積窟)"에서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명자체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시자(始字)와 돌을 쌓았다는 적자積字)를 써서 시적굴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그 시적굴에는 집터정도의 밭들에 돌담을 쌓고 살았던 흔적의 돌무더기들이 군데군데 남아있고 그곳을 "담안에(墻內)"라고 부르고 있음이 말해주고 있다.
o 그 후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담안에"에서 남서쪽으로 50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낡은 터"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동네내서 그곳을 "낡은 터"라고 부르고 있음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낡은 터" 동네에서 오랫동안 마을이 형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로서는 밭들의 면적과 돌무더기 수들을 감안하면 추측이 가능하고 마을에 제2의 동네 터로 구전되어 왔다.
이곳에서는 빗살무늬 기와조각과 도자기 파편등 돌로된 절구모양이 출토되었다.
o 현재의 마을 터로 이주는 1600~1700년경으로 추측하고 있음은 당시의 주택구조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여러 성씨(姓氏)들의 조상과 대수(代數) 등을 고려하면 유추가 되었었다. (그러나 1950년 6.25사변으로 온동네가 전소되었다).
o 또 지푸실 동네에 전해져 내려온 구전(口傳)과 가설(假說)은 현 지푸실 동네의 운기(運氣)가 다하면 동네의 앞 동쪽의 비탈진 언덕배기인 "잔대기"(작은 뙈기)가 새 동네 터가 될 것이라고 예언적 마을 터로 전해져 왔다.
위와 같이 마을이 이동하게 된 연유는 인구증가에 따른 음용수 부족과 집터의 협소한데서 있었다고 분석되며 실제로 옛 마을 터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샘터에서는 지금도 물이 샘솟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동네도 지하수가 예전 같지 않는 것도 동네 터의 이동을 짐작케 한다.
o 지푸실 작은 마을 터는 현 지푸실 큰 동네가 형성된 후에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비롯한 기타의 성씨들이 이주하여 부락이 형성된 것으로 분석된다.
현 지푸실 마을 터의 이동에 대한 예언적 가설(假說)은 접어두고 생업(生業)을 위한 이동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현대사회는 과학문명시대에 자연을 이용하고 또 자연에 순응하면서 편리하게 살고 있으므로 현재의 주어진 자연여건과 환경을 보호하여 보다 유용하게 관리하고 개선하는데 힘쓰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끝.
⑤ 심초마을 명칭을 해석하여 풀어본다.
동명 深 = 깊을 심 草 = 풀 초
파자
深 = 水:물 수 穴:굴 혈 木:나무 목
해석풀이
굴속같은 깊숙한 곳에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울창한 곳이요
파자
草 = 艸:풀 초 曰:가로 왈 十:열 십
해석풀이
동서남북 사방천지왈 풀과숲이 무성한 곳이라네
*심초리 마을명은 지형.지국.지세.에 따라 산이높으면 골이깊고 골이깊으면 물이많고 물이많으면 수림이무성함이라 [山高深谷 深谷多水 多水盛草 洞名深草]이런현상을 자연진리 순리라 한다 지푸실.심초곡.심초리.명칭은 자연의 형국 형세에서 따온 지명임이 분명함으로 현명한 아름다운 지명이다
[심초리란 동명은 자연지명이다.]
* 옛날에 부르던 지푸실이란 말은 深草(심초) 두글자를 해석풀이하여 색음(索音)으로 풀이한 뜻글 말이요 심산유곡의 형국 형세 지형에 맞게 지어진 고유의 자연지명으로 지어진 동명이다 심초리[深草里]란 지푸실을 글자화 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시 지푸실이란 뜻말을 심초리로 글자화 하여 일제강점기 국토을 층량시 지도위에 기록하기 위해 지푸실을 심초리[深草里]로 명칭화 하여 기록하고 사용해 왔던것이다 심초리 마을은 지푸실 이란 명칭를 보면 고려시대 이전부터 살아온것이 분명하다 증거로은
도자기 파편에 색여진 순창이란 글자와 선사시대때 돌칼이 증명하고 있다.또한 삼국시대 백제로 편입되어 있을당시 임실군 도실군 명칭끝에 실자가 있는마을 명칭이많았다.
그러기에 우리부락도 지푸실이라 실자을넣어 지어불렀을겄이다.
⑥ 심초마을 지형지국(풍수지리)
⑦ 심초마을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