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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존재들의 빛나는 저항사ㅡ 고경숙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2023년, 시산맥
서안나(시인·문학평론가)
일곱째 날 – 숨을 쉴 수가 없다
조력자는 없었다 방관자는 색과 색을 확인해 줄 뿐이다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은 헐떡거린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죽은 사람들에게 일련번호가 매겨지는 그 서열에도 끼지 못한 남자 눈동자는 차가운 바퀴 밑을 응시한다
여덟째 날 – 침묵
나뭇가지 새장에 들어있는 앵무가 고장이 났다 말을 따라 하지 않는다 따라 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깃털 속에 부리를 묻고 있다 사람들의 입도 고장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코를 가리고, 가끔은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사람들도 있다
-고경숙, 〈신데카메론〉 부분
내재된 폭력과 저항의지
고경숙 시인의 6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은 폭력에의 저항의지가 기록된 보관소와도 같다. 다크 튜어리즘 여행처럼 불편한 진실이 시집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폭력의 시대’로 규정한 것처럼, 일상화된 폭력은 우리에게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 고경숙의 시집은 이 지점에서 권력장의 구조와 일상화된 폭력의 정황을 노련하게 포착하고 있다. 특히, 우리 일상에 내재한 폭력의 경험과 저항의지와 제도권 밖으로 누수되는 소외된 자의 비극적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교묘하게 위장되고 은폐된 폭력의 정황을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지점이 이 시집의 시적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시집에서 시인은 동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공권력의 폭력의 역사와 공동체의 비극적 체험을 추적하고 있다. 관조와 기억을 통해 추적하는 폭력의 역사와 개인의 트라우마는 는 곧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목록이기도 하다. 때문에 동서양을 관통하여 “권력자/종속되는 자”의 길항이 긴장감을 형성하는 시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이때 거대한 권력이나 개인 간에 발생하는 폭력에 대항하고 투쟁하는 주체들은 아웃사이더 혹은 소외된 존재들이다. 이점에서 시인의 역사인식이 두텁게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시에서 드러나는 길항하는 이항대립적 구조는 폭력에의 투쟁사를 통해 소거되는 존재의 비극성을 강조하는데 복무하고 있다.
폐광을 거닐다 / 고경숙
당신은 권력입니까?
반짝이는 것은 모두 각광을 받았다
빛나는 것들을 위해 주변은 어두워야 했고
시간은 볼모가 되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삼족오의 후예는 권위의 상징으로
땅끝마을 갯벌을 뒤지던 초로의 아낙은 언약과 보은으로
이 빛나는 붙이를 지녔으리라
어둠을 채굴하면 빛이 되고 빛을 채굴하면 권력이 되는
종속의 관계
폐기의 수순을 밟는 순간부터 광산은 한낱 동굴이 된다
은밀하고 습한 곳은 쥔 자와 굴屈한 자가 알아서 구분 돼
굴한 자는 그곳에서 저항의 죽창을 깎고
쥔 자는 은밀한 학살의 장소로 썼다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영광과 오욕을 지나오며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없는
잡초투성이 폐광 입구에
우연히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서늘하게도, 폐광은
사람의 한 생과 닮았다
반짝이는 꿈을 좇아 쉼 없는 노동을 했고
닳아빠진 육체 숭숭 뚫린 뼈의 길처럼
허리 펴지 못한 그곳에서
공습을 피해 굴댕이*가 태어나고 게서 자랐다
반짝이는 것은 누구의 영광이었단 말인가
물소리는 끊임없이 모스 부호처럼, 말한다
역사의 조력자로 억겁을 살아온 폐광은, 읊조린다
반짝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 피난 중 굴속에서 낳은 아이
〈폐광을 거닐다〉에서 가장 “반짝이는 것은 모두 각광을 받았다”와 “빛나는 것들을 위해 주변은 어두워야 했고/ 시간은 볼모가 되었다”라는 아포리즘적 문장은 이번 시집에서 압축된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반짝이고 빛나는 것”들을 선점한 권력의 힘은 “굴屈한 자”에게 “어두워져야만 하는” 존재가 되기를 강요하고 있다. 힘에 종속된 그 어두워진 존재들은 주변인화하여 빛을 채굴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종속이 되는 악순환의 구조에 갇혀버린다. “어둠-채굴-빛-권력과 종속의 관계”가 공고화하는 자본의 논리에서 주변화 된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맨얼굴은 “시간” 즉 역사 속에서 “관조”와 기억을 통해 폭력의 가면이 벗겨지고 있다.
“밝고 빛나는” 권력은 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굴종”을 강요하고 노동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리고 폭력에 저항하여 죽창을” 드는 이들을 “폐광”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결국 권력의 탄생과 공고화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서 권력의 폭력성과 저항하는 갈등 서사가 시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폐광”에 기록된 역사성은 자본의 축적을 통해 공고화된 권력의 발생과 유지 그리고 몰락의 서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의 힘의 실행은 질서와 규칙이라는 허울아래 폭력이 교묘하게 실행되는 곳이며 종속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다. 하지만 시의 후반부에서 나의 발화는 관조를 통해 부당한 힘과 공고한 권력에 의해 “반짝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들이” 되는 전복적 상황과 내면 의지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상자가 계급적일 때 있었지 상자 내민 의기양양한 표정과 딱딱하고 각진 모서리 감촉만으로도 짐작되는 그곳, 뚜껑을 여니 환한 대낮처럼 물씬 풍기던 자본주의 냄새 앞에 왜 저절로 공손해졌는지,
까만 봉지처럼 후줄근한 겨울밤 건네받은 봉지엔 보나마나 만원 안팎의 주전부리, 그러니까 굳이 고맙다고 안 해도 될 만한 그러나 당신의 주머니를 탈탈 턴 모두라는 사실 앞에 왜 서글퍼졌는지,
상자와 봉지는 함께 들어가도 놓이는 곳은 서로 달라 당당하게 중심부로 걸어가는 상자 대신 봉지는 알아서 입구 구석에 가만히 앉지, 기다리지
봉지 속은 대개 무리거나 단짝이어서 기다림이 지속돼도 외롭진 않아
붕어빵을 꺼내 허기를 달래거나 새우깡을 안주 삼아 홀짝 거리지, 기다리지
-〈상자와 봉지〉 부분
〈상자와 봉지〉에서 시적 화자는 “상자”가 “계급적일 때”가 있는 대상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상자는 “의기양양한 표정과 딱딱하고 각진 모서리 감촉”을 지니고 있으며 상자의 “뚜껑을 여니 환한 대낮처럼”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며 나는 그 상자 앞에서 저절로 공손해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반면에 “까만 봉지”는 외양으로도 “후줄근”하며 담긴 내용물도 “만원 안팎의 주전부리” 정도일 뿐이다.
시적 정황상 “상자/봉지”라는 대립쌍의 이미지를 취하고 있다. 더 나아가 상자와 봉지가 각각 동일한 내용물을 담고 있어도, 내용물은 다르게 가치가 평가된다. 이 작품에서 “상자(권력자)/봉지(종속되는 자)”라는 이항대립적 구조는 “빛이 나는 상자”가 “검은 봉지”에 비하여 우의를 점유하여 서열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나는 “상자”가 지닌 권력의 속성을 간파하고 이에 굴종하는 소시민적 속성을 반성하는 태도를 고백하고 있다.
“어둠을 채굴하면 빛이 되고 빛을 채굴하면 권력”이 된다는 “권력/굴종, 상자/봉지”의 관계에서도 그래도 적용된다. 이러한 서열화의 완성에는 결국 교묘하게 은폐된 힘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경숙의 시집의 핵심 키워드라 할 수 있는 “가진 자(권력자)/굴종하는 자”, “빛나는 것/빛나는 것들을 위해 사라지는 자”의 길항 관계에서 부상하는 폭력과 그 비극성의 역사가 시집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찬란하고 밝은 것(권력)이 권력을 대표한다면, 밝음과 찬란한 것들을 위해 호출되고 희생당하는 존재들을 위무하고 이것들이 지닌 힘에 대해 집중하고 조명하려는 시 세계의 지향점을 파악할 수 있다.
첫눈 오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약속들이 설렘과 감정의 지속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두 번째라는 말은 김 빠진 맥주처럼 익숙하고 펑퍼짐하다 무릎 나온 츄리닝이다
둘째라는 말에는 항상 서열이 있고 세 번째 네 번째가 밀려있으니 언제고 떨쳐 낼 수 있다는 위력이 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시계의 초침처럼 불안함이 내재되어 있는 순간이란 말이다
세컨드라는 말엔 오래된 서사가 있다 은밀하게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 유령 같은 삶이 있고, 그 유령의 존재가 허술한 인생들 사이에선 한때 힘처럼 보이던 역설이 있다
관공서의 낡은 장부, 만년 과장의 캐비넷에서 잠자는 동안 세컨드는 정正이 아닌 부副로 늘 대안이었고 예비였다 트럭 뒤 여분으로 싣고 다니는 중고타이어였다
세컨드는 생각 한다
찬란한 세상 저편 혁명처럼 붉은 하늘 너머 태초의 첫 문장은 무엇이었을까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원천적 슬픔도 두 번째라는 익숙한 감정도 가끔은 사랑이란 말로 대치될 수 있을까 만일 두 번째 삶이 다시 온다면 점유했던 모든 것에서 내려 긴 길에 홀로 점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세컨드는 우울하다」
빛이 나는 존재 혹은 권력의 힘은 모두 첫 번째라는 위계를 욕망한다. 하지만 시에서 나의 관심은 오히려 “두 번째” 혹은 “세컨드”라는 대상에 집중하고 있다. “둘째”와 “세컨드”는 항상 서열에서 밀려나 “언제고 떨쳐 낼 수 있”기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시계의 초침처럼 불안함이 내재되어 있는 순간”이며 이때의 “불안함이 내재된 순간”은 “유령 같은 삶”에 가깝다.
“관공서의 낡은 장부, 만년 과장의 캐비넷에서 잠자는” “정正이 아닌 부副”이며 “늘 대안이었고 예비”이며, 마치 “트럭 뒤 여분으로 싣고 다니는 중고타이어” 같은 대체물에 불과하다. 존재감이 결여된 대상인 “둘째라는 말” 쉽게 삭제되고 소거되어 유령처럼 떠도는 “오래된 서사”가 상흔으로 남겨진 비루한 대상이다.
하지만 “둘째” 혹은 “세컨드”는 “찬란한 세상 저편 혁명처럼 붉은 하늘 너머 태초의 첫 문장”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 내면의 힘을 각성하는 변모하는 주체가 된다. 이와 같이 주체의 인식 변모와 각성의 동인은 비루한 현실과 일상화된 폭력의 인식에 있다.
돌아보지 않아도 슬픔의 최전선이다
시장통 외진 골목을 걸어가며 우는 뒷모습은,
셔터에 밀려 버려진 가게 문짝들
드럼통과 생선 상자들로 굴곡진 벽
기댈 곳도 잡을 곳도 없다
바닥에 낙엽 한 장 굴러와 쌓일 형편도 아닌 그곳,
앞만 보고 걷다가 하수도 배관에 걸리고 마는 골목,
그곳은 이미 여러 번 고꾸라져 본 이들과
기댈 곳 없어 주저앉던 이들이 지나는 길,
늘어진 전선들이 노을 속에 엉켜있는 저녁
울며 걷는 사람에게 길은 길이 아닐 때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보아온 골목은
어쭙잖게 훈계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가
슬픔을 밟고 지나가도록, 견디어주도록,
그리고, 다 지나간 다음
뒹구는 생선상자를 제자리에 쌓고
여전히 골목의 끝이 큰 길에서 보이지 않게
외진 길로 돌아앉아 있는 것,
구부러진 시장통 골목은 막다른 이가 찾아가는
시장통의 공소(公所), 슬픔의 최전선이다
ㅡ「골목에서 울다」
「골목에서 울다」에서 등장하는 “골목” 역시 중심에서 밀려난 아웃사이더의 삶의 양태가 잘 드러나는 장소이다. “시장통 외진 골목을 걸어가며 우는 뒷모습”, “셔터에 밀려 버려진 가게 문짝들”, “드럼통과 생선 상자들로 굴곡진 벽”, “기댈 곳도 잡을 곳도 없”으며 “바닥에 낙엽 한 장 굴러와 쌓일 형편도 아닌 그곳”들의 풍경이다. 시에서 제시된 장소는 빛나는 것들이 거처가 아닌, 권력의 힘에 희생된 비루한 존재들의 거처이다. 그런데 이 비루한 것들의 거처가 “슬픔의 최전선”이라고 명명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력자와 대립항인 “굴종하는 자”, “세컨드”혹은 “둘째”의 삶의 거처인 “시장통”과 “골목”이 “슬픔의 최전선”이 되는 이유는 “슬픔”과 “최전선”이라는 폭력적인 시어의 결합과 환기에 있다. 왜냐하면 “슬픔의 최전선”은 폭풍처럼 거대한 힘이 내재된 곳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최전선”에서 “최전선”에 방점을 찍을 때, 비루한 것들의 투쟁사가 기록된 “공소”와도 같은 신성한 곳으로 승격된다. 이를 통해 슬픔이나 가난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의 힘으로 폭력의 역사와 투쟁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인 “최전선”으로 전환한다.
“슬픔의 최전선”이란 외부의 권력의 폭력으로부터 단련된 힘으로 곧 “시장통의 공소(公所)”와 같은 신성한 곳으로 전도되며, 권력이나 자본의 논리로는 훼손할 수 없는 숭고함을 지닌 비의적 공간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슬픔은 악어, 지류로 서서히 노를 저어오는 작살 든 보트처럼 날카롭고 재미없지/물가 숲에 이마를 숨긴 물고기들이 아가미를 닫고 숨을 멈춘 그곳이 슬픔의 진앙지야//평생 반경 육십 킬로를 못 벗어났다는 옛날사람의 범주에/풀, 꽃, 나비를 포함시키고 낭만이라 했다//거기엔 비문명과 날것에 대한 연민도 가미시켰다/환경도 조금 운운했다//그거와 별개로 문명인인 나는 나아가야 한다//…중략…//그거와 별개로 문명인인 나는 새로워야 한다//먼 곳에서 오는 만남은 일방적이다/그들도 그들만의 낭만과 비문명과 연민을 남겨두고 온다/트렁크처럼 딱딱하고 항공기처럼 차갑다/먼 곳에서 오는 것 중엔 나에 관한 것도 많다/젊었던 나와 써지지 않는 시와 희미한 시야,//문명인인 나는 새롭게 나아가야 하는데/풀, 꽃, 나비를 낭만이라 부르며/반경 육십 킬로를 못 벗어나고 있다
-「슬픔추방법」부분
더 나아가 “슬픔”이란 “악어, 지류로 서서히 노를 저어오는 작살 든 보트처럼 날카롭고 재미없지/ 물가 숲에 이마를 숨긴 물고기들이 아가미를 닫고 숨을 멈춘 그곳이 슬픔의 진앙지”이며 슬픔이 탄생하는 지점은 “악어와 같은 권력을 쥔 자”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앞으로 나아가는 질주정과 속도의 맥락을 거느리고 있다면, “먼 곳”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만남”은 질주와 속도와는 또 다른 의미망을 껴안고 있다. 문명이 “트렁크처럼 딱딱하고 항공기처럼 차가운” 반면, 먼 곳에서 다가오는 비문명적인 힘은 가공되지 않은 원초적인 에너지 그 자체이기에 폭력에 희생된 존재들에게 야생의 힘을 선사한다.〈신데카메론〉의 한 구절처럼 “빗방울 그득 먹고 자란” 야생의 에너지로 가득 찬 “풀을 따러 염소 몇 마리”처럼 우리는 슬픔의 힘으로 “산비탈을 내려올 것이다”
제도와 정책의 변질과 은폐된 폭력
그때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이동 중이었습니다/바뀌지 않는 제도와 정책에 대해 얘기가 오고 갔죠//아무리 면담을 하고 시위를 해도 소용없다는 K의 말에/열정적인 그녀 M이 반박했습니다//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아무리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시간이 지나면/돌아보기라도 할 테니까요//돌아보긴 합니다 그리고 말하죠/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좌중이 일제히 웃었습니다/그건 노!라는 말입니다/조수석에 앉아있던 공무원 P가 겸연쩍게 웃습니다//K가 한마디 더 했습니다/또 있습니다/확인해 보겠습니다란 말!//일제히 더 크게 웃으며 말합니다/그것도 노!라는 말입니다//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화기애애한 시간 악수 나누며 다들 인사합니다/추후 연락하자고,//나는 돌아서며 웃습니다/그 말은 잘 살라!는 다른 말입니다
-〈명랑한 이음동의어〉
〈명랑한 이음동의어〉를 살펴보면 회의가 끝나고 점심 식사 후 일행이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이때 차에 동승한 개별적 인물들은 각각 상이한 직업군과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이동 중에 차 안에서의 대화의 중심은 “바뀌지 않는 제도와 정책”이다. 이들 중엔 웃음으로 불편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공무원과 제도와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시위에 참여하는 이와 이를 관망하는 자도 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차 안은 현실이 압축된 공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이들 각자가 자각하는 점은 공권력의 무소불휘의 힘과 불통의 현실일 뿐이다. 이때 인물들 모두 이니셜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는 공무원으로 대표되는 구가 공권력이 지닌 폐쇄성과 폭력을 강조하는 시적 장치이기도 하다. 변화를 갈구하며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이 존재감의 결핍을 상징한다면, 공무원 역시 이니셜로 처리된 것은 공권력의 변혁의지의 결핍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시위에 참여하는 인물의 목소리는 권력의 중심부에 닿지 못하고 휘발되고 있다. 따라서 공권력을 대표하는 공무원이 대답인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말, “확인해 보겠습니다란 말”은 언어가 지닌 기능과 의미가 탈각되고 모두 “노!”라는 대답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무원의 태도와 말투가 부드럽고 상대를 배려하는 명랑하고 긍정적 의미와 달리 모두 거부 혹은 금지와 부정의 뜻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에 등장하는 “이음동의어”는 공적인 국가권력의 제도와 정책 등의 행정 시스템에 굳게 자리 잡은 폐쇄성과 폭력의 실체를 폭로하는 동시에 개선하려는 의지의 결여를 확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때 국가공권력이 보여주는 태도는, 결국 특정 계급만을 보호하는 기형적인 정책과 제도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진솔한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진흙 심장을 꺼내든 한 사람이 조심조심 건네다 불구덩이에 빠뜨린 뒤 마음은 단단해졌습니다/…중략…/사람들은 이제 서로에게 심장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거짓과 편견이 판치는 세상에 잘 구어진 심장은 몇 안 되게 절박한 사랑을 하는 이들밖에, 그래서 없습니다
-「도자기 심장」부분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할까? 누가 지더라도 이의는 없기야 이긴 자는 상대의 목을 베어 말 엉덩이에 매달기, 그 말을 채찍으로 후려치기, 밤새 그 말이 달려 더 이상 너도 나도 따라갈 수 없도록 누가 되든 절벽에서 멋지게 뛰어내리기, 그리고 완벽하게 죽기.
-「그림자 죽이기」부분
이러한 권력의 폭력성은 “진솔한 마음을 보여”주려고 “진흙 심장을 꺼내든”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에게 심장을 보여주지” 않는 각박한 현실을 조성한다. “거짓과 편견이 판치는 세상에” 양심을 지키는 연약한 심장을 지닌 이는 현실이 곧 비극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자기 심장」과 「그림자 죽이기」에서 드러나는 세계는 대화와 소통이 어긋나는 곳이다. 이음동의어처럼 소통부재의 현실은「도자기 심장」과 「그림자 죽이기」를 통해 극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공무원으로 표상되는 대상은 민원인들의 제안을 끊임없이 우아하게 거부하고 연기한다. 언어가 지시하는 기능과 달리 이상사회를 염원하는 주체들에 의해 제기되는 민원의 의지는 결국 공고한 국가권력의 권력장에 부딪쳐 와해되고 있다. 결국 “진솔한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진흙 심장을 꺼내든 한 사람이 조심조심 건네다 불구덩이에 빠”지는 참혹한 트라우마의 현실을 조장할 뿐이다. 이와 같이 국가의 공권력이 지니는 폭력적인 힘은 “이긴 자는” 가차 없이 “상대의 목을 베어 말 엉덩이에 매달”고 있으며, “말을 채찍으로 후려치기, 밤새 그 말이 달려 더 이상 너도 나도 따라갈 수 없도록 누가 되든 절벽에서 멋지게 뛰어내”리는 비극적 결말을 조성할 뿐이다. 그리하여 “완벽하게 죽”는 비극적 현실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해발 700m는 아침엔 영하 낮엔 영상의 온도가 유지돼 고로쇠나무 생육에 최적이라며 남자는 상기됐다
무기질 함량이 풍부하고 수액 체취 후 정제와 살균으로 저장기간이 길고 위생적이라는 얘기 끝에 남자는 거품을 물며 웃었다 기자도 웃었다
나무는 옆구리에서 뭉클 수액이 빠져나갈 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생각했다 오들오들 떨었던 밤엔 통증으로 낮엔 탈수로 불면인 봄날,
옆구리 호스를 빼고 아버지나무가 비로소 편해진 날도 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살랑거리는 생육 최적의 날이었다
잔맛 없고 단맛 나는 수액의 생산자가 바로 우리라고, 가지를 뒤틀고 잎을 흔들어봤다 깐깐한 검증을 통해 나온 수치로 ‘자연의 맛’을 강조한 생산자는 허가증을 품고 돌아갔고,
끝까지 항변하지 못했다 우선은 살아야 했고 회유는 깔끔했으므로,
덕분에 나머지 세 계절은 편안했다
그런데 자꾸 궁금했다 정말 자연의 맛은 어떤 맛일까?
*플리바게닝: 유죄를 인정하거나 증언을 하는 대가로 형을 낮추거나 가벼운 죄목으로 다루기로 거래하는 것.
-「플리바게닝」전문
심장이 도자기처럼 구워질 수밖에 없는 상흔을 지닌 “고로쇠나무”와 같은 열악한 존재들은 “우선은 살기 위하여” “플리바게닝”처럼 비열한 거래에 응할 수밖에 없다. “고로쇠나무”가 견뎌내야만 하는 생육환경은 “해발 700m”이며 “아침엔 영하 낮엔 영상의 온도를 유지하는” 곳이다. 고로쇠나무 수액은 이 극한의 조건에서 무기질 함량이 풍부해져 최상의 상품성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고로쇠나무의 생명수인 수액은 모두 “자연의 맛”을 강조하는 사내의 차지가 된다. 사내가 고로쇠나무 수액을 상품화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대신, 고로쇠나무는 밤낮으로 탈수와 불면의 고통에 시달린다. 고로쇠나무는 생존을 위해 사내로 상징되는 권력에 “끝까지 항변하지 못”하고 “우선은 살아야 했고 회유는 깔끔했으므로”, “나머지 세 계절은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 “거래”를 시도해야만 하는 비극적 존재이다. 수액을 음용하는 권력자와 권력자를 위해 결국 희생되어야만 하는 존재의 비극을 여실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봄과 집사와 봄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꼬리를 흔듭니다
남자는 일어섰습니다 예식장에도 들어가 보고 초등학교 열린 교문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 파랗게 싹이 나오는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나섰습니다 점심상 차려놓은 지가 언젠데 안온다고 ‘솔’ 톤으로 약간 격앙 됐습니다 미나리무침과 쭈꾸미숙회입니다 꽃무늬 앞치마를 펄럭이며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잘 만났다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우편물을 건넵니다 시집입니다
우체부가 지나가고,
여자가 집에 들어가고,
남자가 대문을 괴어놓고,
그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마당을 사뿐히 건너 부엌으로 갑니다
부뚜막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부엌문 너머 낮술 얼큰한 남자에게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지긋이 감고 발가락을 까딱댑니다
-〈고양이와 집사와 봄〉
시집의 표제시인〈고양이와 집사와 봄〉을 읽다 보면 집사가 고양이에게 건네는 질문의 진술방식이 눈길을 잡는다. 나는 고양이에게 “당신은 봄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던지는 “봄입니까?”라는 질문은 고양이가 지닌 속성과 층위가 다른 돌연하고 엉뚱함을 지닌다. 때문에 질문이 지니는 돌연함이 곧 비극적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적인 힘으로 확장되고 있어 이채롭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 질문을 던진 후에 이어지는 사내와 사내의 아내의 행위가 질문의 힘을 다른 의미로 확장하고 변주하고 있다.
“당신은 권력입니까?” 읽히는 질문은 사실 고양이에게 어떠한 대답을 듣으려는 의지가 동반되지 않는 질문이며, 사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임을 알 수 있다. 집사인 사내가 고양이게 질문을 던진 후에 취하는 행동들을 취합해 보면, 한 여자를 만나고 “예식장-초등학교 열린 교문-학교 운동장 그리고 이어 여자의 행동과 집안 풍경들-우체부-시집” 등의 일련의 행위와 서사를 통해 다시 사내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봄입니까?”라는 질문은 봄이라는 계절이 지닌 의미로 인하여 “당신은 행복하십니까?”이거나 “당신은 행복을 보장할 만큼 권력을 쥐고 있습니까?” 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내의 목소리를 빌어 다시 질문의 대상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의 차지가 된다. “당신의 권력은 영원합니까?”라는 질문이 껴안고 있는 의미망이 입체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집을 읽는 당신에게 질문해 본다. 아마도 당신은 이 시집을 다 읽어도 결국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집은 폭력의 목록이며 투쟁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이 시집을 읽되 결국 읽지 않은 것이 될 테니. 또한, 이 시집은 묘하다. 시집을 읽으면 서사적으로 아파진다. 당신은 서사적으로 아플 준비가 되어있는가. 그렇다면 우선 고양이가 되어야 하고, 집사의 마음으로 혹은 사내의 마음으로 당신의 화려한 봄을 불러올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 이 시집은 독자들에게 질문하는 시집이다. 권력의 힘을 통해 제도권 밖으로 추방되는 자들의 고통의 서사이다. 그러니 권력의 폭력적인 칼날로 권력을 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선 총을 든 패잔병”이 “마지막 한 발은 자신을 위해 조준해 놓고/눈을 붙이는” 당신이 숨어있는 벙커에도 봄이 오고 있는가?(「벙커에 봄이 오면 」) 시인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의 권력은 영원합니까? 당신의 권력은 안녕합니까?. 이 질문은 시집 전편을 읽는 내내 유효한 긴장감으로 작동할 것이다.
이번 고경숙 시인의 시집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적 개성은 이미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 전편에 강력하게 표출되는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다. 시집 전편에 역동적 힘으로 추동하는 역사인식은 시의 장시화 경향과 3인칭 화자의 등장이라는 독특한 진술방식을 통해 시적 개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적 장치를 빌어 고경숙 시인의 시집에서는 빛나는 것보다는 빛나는 것의 존재 의의를 위해 삭제되고 소거되는 존재에 대한 관심과 소외된 존재가 지닌 “슬픔의 힘”과 긍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서안나(徐安那)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겨울호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새를 심었습니다』와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과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전집 1․2』가 있고, 『전숙희 수필선집』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