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 하셨습니다. 치악산행을 마치고

[문곡]

 

산죽(山竹)의 향연(饗宴)

                 -치악산-

치가 떨리고 악이 바쳐 치악산인가? 동행한 아내가 다시는 산행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 사다리병창 코스도 아닌데 아내에겐 버겁고 힘겨운 코스였나 보다.(상원사 오르막 4km지점)

대악(GM大宇自動車山岳會)의 정기산행일이다. 버스 안은 산행을 위한 에너지 충전으로 조용하다. 말똥한 눈은 창밖을 응시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거리엔 불빛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아내와 겨울산행을 한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통해 부부간의 정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또한 위대한 자연 속에서 호흡하다 보면 무심한 나무와 바위가 전해주는 삶의 지혜도 배울 수 있음이다.

산행버스가 일찍 출발해 문막에서 얼큰 우동 한 사발로 속을 데우니 든든하다. 문막을 지나자 병풍처럼 펼쳐진 산엔 쓸쓸함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찬바람에 떨고 있는 나뭇가지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버스의 속력이 떨어지면서 시선은 한 곳으로 주시했다. 사과를 싣고 달리던 트럭이 전복되었다. 사과상자가 뒹굴고, 농부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는 사과들이 도로 위로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 깨어진 사과에서 농부의 부푼 꿈이 산산 조각되어 날라 갔다. 마음 한편이 겨울 날씨만큼이나 시리고 아팠다.

예정시간보다 이르게 치악산(雉岳山)에 도착했다. 상원 산장에서 상원사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아내와 함께 선두에 서서 오른다. 2.5km 정도 오르자 아내는 숨을 몰아쉰다. 산행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좁다란 산길을 따라 꼬리를 물고 늘어섰다. 오늘 산행코스는 남대봉(1181m)을 오르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정상에 올라야 한다. 그래야 산에 간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상원사(1100m)를 향하는 길엔 돌덩이가 유난히 많아 초보자가 걷기에도 불편했다. 상원사 5.2km 표지판을 지나간다. 산길을 오르면서 아내는 그 동안 꾸준히 운동해 온 천마산 걷기를 이야기 한다. 그 속에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마치 오늘을 위해서 벼르고 기다리기라도 한 듯 당당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 얼마가지 않아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평소 2, 3시간씩 산을 탄 저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유난히 숨이 찬단다. 걷는 속도의 강약문제였다. 아무려면 어떠랴. 숨이 차면 천천히 걷고, 그래도 힘들면 쉬었다가 가면 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느새 나무들은 화려한 의상들을 벗어 던지고 임 가시는 길에 주단을 깔듯 수북이 옷가지를 펼쳐놓았다. 밟혀 썩어 한 줌의 거름이 되기까지 낙엽은 산행 인들에게 우레탄이요, 사색과 상상을 부르는 운치를 안겨주기도 했다. 낙엽을 밟고 지나가며 사각사각 대화를 나눈다. 그 뿐이랴. 사방에 산죽소리가 질투를 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그 소리는 분명 일행을 반겨주는 환영의 기립 박수였다. 춤추는 산죽은 마음속까지도 시원하게 해주는 청량제와 같았다.

아내는 간간이 속도를 늦추자고 운을 뗀다. 선두에서 걷다보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주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으려 애를 쓴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돌길을 오르니 땀이 나기 시작했다. 선두로 출발했지만 얼마 걷지 않아 중간으로 물러서 걷는다. 남대봉에 오르는 것이 우선이니 무리하지 않고 체력안배를 잘해야 했다. 내 마음 같아선 혼자라면 산악마라톤하면 제격인 코스였다.

그렇게 땀이 흐르다가도 긴장감을 풀 수 있는 철다리 계곡을 건널 때면 무거웠던 다리에 피로가 싹 가시었다. 4km를 올랐을까. 가파른 언덕이 아내의 발목을 잡았다. 천마산을 걷던 실력은 맥 못 추었다. 체력의 한계를 느낀다며 쉬었다 가지고 한다. 결국 상원사가 보이는 지점에서 아내와 숨을 돌리고 후미로 따라 붙었다. 아내는 지금이라도 산행을 포기하고 출발지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부부란 무엇인가. 멀쩡한 두 다리가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돌아가자니 맑은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칠 일이다. 아내를 두고 혼자서 오른다면 산행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평탄치 않은 치악산의 산행 길 만큼이나 어려운 산행이란 나에겐 더 없는 값진 추억의 의미로 기억되리라.

아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장한 각오라도 한 것일까.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걷더니 중반부로 상원사에 도착했다. 상원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써 치악산 남쪽 끝 남대봉 기슭에 백여 평 남짓 돌바닥에 세워진 오래된 절이다.

잠시 사찰을 둘러보며 숨을 고르고 남대봉을 향해 걸었다. 남대봉까지는 0.7km에 짧은 거리였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 마음까지 움츠러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치악산의 매서운 바람으로 신고식을 치루는 것일까. 남대봉 가는 길엔 온통 산죽으로 덥혔다. 무릎 높이의 녹색 산죽이 품어내는 소리는 겨울 산의 오케스트라요, 향연이었다. 등산로엔 소금을 뿌려 놓은 것처럼 싸라기눈이 내렸다. 아내와 함께 메밀밭을 걷는 심정으로 향연을 감상하며 잠시 상상에 젖어도 본다.

드디어 남대봉(1181m)에 도착했다. 풍속 3m, 영하10도에 체감 온도는 15도라고 한다. 칼바람이 가슴을 후려친다. 원주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굽어보는 이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 위함이었나. 힘들었던 순간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세상을 내 품에 안은 듯 짜릿함과 해냈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열렸다. 이 순간을 아내에게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아내도 언제 힘들었냐는 듯 고진감래(苦盡甘來)를 만끽하고 있었다.

칼바람은 정산에서 일행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영원사를 지나 금대리까지 6km를  내려가는 길이다. 내심 안심하고 걸었으나 오래지 않아 발병이 생겼다. 등산화가 아닌 지엠 규격품 운동화를 신은 게 화근이었다. 오를 때만 해도 거뜬했는데 내려가는 길엔 발가락이 코에 닿으면서 통증이 시작됐다. 내리막 시작인데 벗을 수도, 걷기도 불편한 신발이 되어 버렸다.

급경사 돌길은 매우 위험했다. 그러나 피해서 갈 곳도 갈 일도 없었다. 주어진 이 길이 내가 갈 길이다. 네 발로 걸어서라도 내려 가야할 판이었다. 백 미터 돌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통증은 내려갈수록 점점 심하게 발가락을 압박해왔다. 일행이 추월한다. 아내도 나를 앞지르며 위풍당당(威風堂堂)하다. 빨리 오라 재촉하지만 마음뿐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올라갈 때 아내의 힘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흐뭇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그래도 내 발가락이 아픈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심한 통증도 돌길을 걷는 긴장감에 연속으로 둔해져 갔다. 그렇게 돌길을 따라 영원사를 지날 때 긴장이 풀렸는지 통증이 일시에 밀려왔다. 뒤꿈치로 걸을 만큼 발가락이 아렸다. 이제 금대리까지는 평치로 이어진 산책로이고, 종착지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통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한 첫 산행에서 마음에 담고 온 것이 많았다.

포기하지 않고 악산을 오른 후 해냈다는 성취감에 기뻐하는 아내의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올 겨울은 치악산에서 첫 추위를 일찌감치 만난 기쁨이다. 싸라기눈과 얼음 그리고 칼바람으로 신고식을 했으니 말이다. 유난히 많은 산죽은 바람이 불면 춤을 추며 향연이 시작된다. 어느 유명한 춤 군이 이만할까. 이것이 자연이 베풀어 준 소중한 선물이고 융숭한 대접이 아닌가. 돌아오는 길에도 산죽의 향연은 내 머리에서, 내 귓전을 끝없이 맴돌았다.(07.11.18)

[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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