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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 산책 1만5천보
자유인 조동화는 연일정씨 문중산 배산을 산책하였다.
나의 어머님이 연일정씨여서 배산은 인연이 깊은 산이다.
고려 조선시대에 연일정씨 관리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임금이 사패지를 포상하여 그래서 배산이 연일정씨 문중산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배산 중턱 관한약수터부근 묘지군락에는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 묘역이 안치 되어 있기에 묘역을 지나며 잠시 들러 상석을 사진 촬영하고 추모하였다.
상석에 세겨진 외할아버지는 이름이 정자 옥자 규자이고 1930.11.13 돌아가시었으며, 외할머니는 나와 같은 김제 조씨이시며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네 살적 1954년 6월12일 돌아가시었고, 외삼촌 정진산은 각종악기에 소질이 있었는데 2008년 3월25일 돌아가시었고 외숙모는 2013.7.13 작고하시었다.
배산 97m밖에 않되는 산이지만 편백나무와 노송들이 많아 솔향기가 그윽하여 맑은 공기를 머금고 두어시간 1만오천보 산책하고 집에 오니 피곤함이 싹 가시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낄수 있었으며 기분이 상쾌해짐을 느낄수 있었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산책시간 및 거리 : 9:30-12:30(3:00) 도보1만5천보
나의 어머님 정순봉과 외할머니 김제조씨
본인 조동화는 김제조 6대조 조의(趙義) (충청병마절도사)는 아들 이지와 숭지를 두었는데 나는 이지의 후손입니다.
나의 어머니 정순봉의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는 김제조씨이며 이름이 조숙희이고 승지의 후손으로 확인되었답니다.
어머니의 외삼촌은 조순채(김제조씨)이며 1980년 돌아가시었다.
어머니의 외삼촌 조순채는 누님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광무7년 1903년생 생일1월16일-1954.6.12. 51세 작고하시다)와 다섯살 아래로 누님 한분밖에 없었으며,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네.
나의 외할아버지 정옥규 1930.11.13. 돌아가시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조순채의 셋째아들 병규(1950년생)는 이리에 살며 영신교회 다닐 때 몇 번 만난적이 있는데 수원인가 어디로 이사가서 아들 둘을 두었구먼.(족보확인)
나의 어머님 정순봉의 뿌리를 찾다.
어머님 정순봉(鄭順奉)께서는 모현동 옥구동에서 1928년도(소화3년) 음력 8월15일(양력 9월28일)에 태어나 1996년5월5일(양력, 음력은3월18일) 69세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는 두 살때 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를 26살 때 여의시었다.
부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는 1890년(개국499년, 명치23년) 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현 모현동)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30년 40세에 사망하시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 김제조씨)는 1903년(명치36년) 김제군백구면월봉리에서 출생하시었으며, 1920년(대정9년) 17세에 정옥규(나의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1954년6월12일(음) 51세의 나이에 사망하시었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께서는 초여름쯤 되면 해마다 모 조숙희(나의 외할머니)기일에 고기나 생선을 준비하여 옥구동으로 가시어 기일을 추모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3년 나이 차이가 난다.
외할아버지 정옥규와 외할머니 조숙희는 1남2녀를 두시었는데, 어머님의 오빠가 정진산이고 언니가 정순례, 그러니까 나의 어머님 정순봉이 막내이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1923년(대정12)익산군익산면고현리29번지(모현동)에서 출생하여 2008년 85세에 사망하시었다.
오빠 정진산은 7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어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하였으며 3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여 두 여동생들을 극진히 보살피었다.
언니 정순례는 1925년(대정14년)11월2일 출생하시어 황등면 방아다리로 출가하시었다.
나의 이모님 정순례(鄭順禮)께서는 방아다리에서 김동수 동구 동식 동만 아들 넷을 두어 장남 김동수(나의 이종동생)는 경기도 마석에 자리잡았다.
나의 어머님 정순봉은 1928년생으로 오빠 정진산이 다섯 살 위이시고 언니 정순례는 세 살 위이시었다.
※참고(대한제국 국권상실1904-1910 일제강점기 한일합방 1910-1945)
개국(開國) : 조선의 연호 1392년을 시점으로 함
(개국이란 朝鮮의 개국 연도인 1392년을 기준)
명치(明治) : 1868년이 원년-1912년까지(45년간 사용)
대정(大正) : 1912년부터-1926년까지(15년간 사용)
소화(昭和) : 1926년부터-1989년(64년간 사용)
정숙주(鄭叔周) 신도비와 묘역
작은 배산으로 가는 정씨 제각 옆 관한약수터 위에 소재하고 있는 정숙주신도비와 묘역이 있다.
延日(迎日,烏川)鄭씨 양숙공파 14대손, 덕성공파 7대손
정숙주의 생몰연도 : 1607(선조 40)∼1665(현종 6)
鄭叔周神道碑는 작은 배산으로 가는 정씨 제각 옆에 소재하고 있으며, 자연 암석을 좌대로 삼고 옥개형 개석(屋蓋形 蓋石)을 얹었다. 1944년에 세워진 이 비는 비신은 오석으로 높이가 160㎝, 폭이 60㎝, 두께가 30㎝이다.
정숙주는 조선 선조 40년(1607)에 전주부에서 증좌승지 정담(鄭膽)의 아들로 태어나 현종 6년(1665)에 죽었다. 자는 자정(子禎)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일찍이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반정 후에야 과거시험에 나아가 인조 13년(1635) 2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더불어 창의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향리로 돌아왔다.
효종 4년(165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즈음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왕실과 인척을 맺고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몇몇의 토호들은 그들의 뜻을 받들고 아첨하여 송덕비를 세우니 공이 이를 심히 지적하자 이들의 방해로 하직하게 되었다.
그뒤에 남인 허적(許積)이 물러나자, 전적,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의 요직과 보령, 강진, 순천 등의 현감, 제주판관 등을 역임하면서 이속(吏屬)들에게는 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사랑으로 대하였다.
연로한 뒤에는 사우(士友)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의리를 강설하다가 59세에 죽었다.
배산 연일정씨(延日鄭氏)의 유래
연일 정씨(延日 鄭氏)는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영일 정씨(迎日 鄭氏), 오천 정씨(烏川 鄭氏)라고도 한다.
연일 정씨(迎日 鄭氏)의 시조인 정종은(鄭宗殷)이 신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고 한다. 정종은(鄭宗殷)의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영일호장(迎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迎日)로 하였다 한다. 본관은 연일(延日)의 옛 지명인 영일(迎日)로 쓰기도 하고, 영일(迎日)의 마을인 오천(烏川)으로 쓰기도 한다.
배산의 비석에는 연일정씨 영일정씨 오천정씨로 혼용하여 비문이 세겨져 있음을 알수 있다.
익산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인 병조판서 정덕성(鄭德成)이 조선전기 입향한 이후 후손들이 익산시 모현동의 원모인마을과 옥구동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배산의 유래와 역사
배산은 익산시 모현동 2가 산10-1 등 약 10만평으로 이루어진 주산, 그리고 약 40만평으로 이루어진 해발 0M ~20M종산으로 이루어져 있다.주산은 해발 97M로서 2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다. 종산은 40여개로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종산들이 취락지와 밭을 이루고 있다.배산은 바위산이라는 뜻으로 주산이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배산은 옛말에 "바위"를 주로 "바회"라고 했지만 전라·충청·함경도에서는 "바이"라고도 했는데 "바이"가 줄은 말이 "배"다. (예 : 까치배(鵲岩), 검배(玄岩), 칠성배(七星岩), 광대배(竹岩), 도장배=도장바위, 여우배=여우바위, 갓배=갓바위, 부엉배=부엉바위, 송장배=송장바위)고전에서 살펴보면 배산을, 백산(栢山), 척산(尺山), 옥성산(沃城山), 연주산(聯珠山·連珠山), 우락암(于樂岩· 樂岩), 우령대(禹靈臺) 등으로도 일컬었다.백산과 척산은 잣뫼의 한문자 표기로 잣은 성(城)의 순수국어 이며, 뫼는 산(山)이다. 척산의 척도 자(尺)에 사잇소리가 붙은 잣이다.그런 이름이 생긴 것은 본시 배산 밑에 옥야현(沃野縣) 시대의 치소(治所)가 있었고, 배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의 산이란 뜻으로 일컬었던 것이고 옥성산도 또한 옥야현 성의 산이라는 뜻이며, 연주산은 배산이 위 아래 두 봉우리로 되어 있어 마치 구슬을 꿰어놓은 듯하므로 본시 한자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령대는 산 위 바위가 우렁이와 비슷하여 생긴 이름일 것이며, 우락암도 그로써 생긴 이름일 것이라고 했다.배산은 00시대에 연일정씨가 나라를 구한 공적이 있어 임금님으로 부터 하사받은 산으로 현재에도 연일정씨 오천공파 배산문중 종산이다.한편 작은 배산 중에서 하부 능선을 따라 동산마을에 이르기 까지는 서씨문중의 종산이다.배산은. 주산이 큰배산과 작은배산 2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 2개의 봉우리는 4방으로 봉황이 날개를 편 능선을 가졌으며 봉황의 날개속에 취락지들을 형성하여 서해 바다와 어우러진 지형이다.1912년 이전에 배산에 올라 서면 바로 앞에 펼쳐진 새들이 주인인 섬들과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지평선과 일몰 그리고 거대한 원시 늪 해안가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 원시 늪은 일정 때 금강의 끝에 군산 하구둑을 쌓아 바닷물의 유입을 막자 그 순간 풍성한 농지로 변하여 오늘날 만경평야가 탄생하게 되었다.큰배산과 작은배산 사이는 남으로 뻣은 작은 계곡이 흐르며 계곡 선단에 서당을 세워 학문을 보급하였으며 이 계곡의 명칭이 서당골이라 불리고 계곡의 아래에는 일정때 농사에 쓰일 담수호 뚝을 만들어 배산방죽이 생겼다.배산은 해발 97M로 높지는 않으나 만경평야의 유일한 주산에 해당한다.
배산은 작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특징들이 있다.
배산은 연일정씨 오천공파 배산문중 종산으로 많은 묘와 지방문화제급 제실이 있다.이 일대는 연일정씨 집성촌으로 선조부터 오늘까지 이어져 온 터라 연일정씨 가족묘 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제실 4곳과 열여문 1곳, 정열문 1곳, 시제 제단 1곳이 있으며, 한식일과 추석, 설날에는 조상을 찾은 연일정씨들의 일가 행렬로 배산을 가득 메운다.
큰배산의 정상에는 배산정이 있는데 1910년경 지어졌으나 오래되어서 철거하고 주춧돌과 바닥만 보존하고 있으며, 그 옆에 1979년 다시 연주정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작은배산의 정상에는 1980년 연수정을 세웠다.
배산에는 인공적으로 형성된 4개의 땅굴이 있다.배산이 일정 때 일본군 지휘부 주둔지로 사용되었는데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을 혹사시켜 돌을 케내는 작업으로 지하 땅굴을 만들어 사용하였다.큰배산의 동쪽에는 일본군 지휘부가 주둔하던 2개의 땅굴이 있는데 서로 연결되어진 100여미터 길이의 땅굴이다. 지금은 땅굴 입구가 무너져 내려 아주 작은 구멍만 남아 들어가기가 힘들며 들어가 보면 일제시대 흔적이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다.큰배산의 남쪽에는 1개의 땅굴이 있는데 비교적 큰 굴이며 15도 경사지게 돌을 파내에 들어간 땅굴이다. 지금은 이 땅굴이 배산 수맥과 닿아 물로 가득차 있다.작은배산에서 큰배산으로 향한 정상 지점에 조그마한 땅굴을 팠는데 이 땅굴은 경계초소 역할정도 기능을 하였으며.지금은 메워져서 사라졌다.
배산은 연일 정씨 문중의 소유로서 평야지대인 익산에서는 유일하게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서 지금은 공원으로 개발되어 익산 시민들이 많이 찾고 이용하는 산이며 여러종류의 운동기구를 배치하고 산책로를 만들어서 주민들의 운동장소로, 또 휴식공간으로서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배산은 토종 소나무 군락지로 이루어진 산으로 삐뚤어진 소나무, 휘어진 소나무, 늘어진 소나무 등, 제 멋대로 생겨서 크지도 않아 목재로 쓸만한 나무 하나 없는 토종 소나무들 입니다. 이 소나무들이 저마다 바위 틈새에 박혀 있으니 가히 신비롭기까지합니다. 또 배산입구엔 많은 벗나무들이 있는데 매년 봄이면 벗꽃이 만개하여 벗꽃축제가 벌어져 익산 시민들의 많은 참여가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배산은 97m의 높지않은 산이고 봉우리도 두개밖에 되지 않는 어떻게 보면 산이라 부르기 조금 민망한 산이지만 이곳 지역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오랜시간 함께 해온 삶의 터전이고 마음의 휴식처입니다.
☞배산 묘지 기행문
배산은 연일정씨 문중산으로 유난히도 묘지가 많다.
연일정씨 배산문중에서 제일 명당자리에 자리잡은 묘를 보니 신도비가 설치되고 비석에 비문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한문으로만 세겨 있어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겨우겨우 어느시대 어떤 직책을 가지고 나라에 봉사를 했는지 살펴볼수 있었다.
배산입구 제일 상석 명당자리의 묘의 주인은 조선조 세종시대(세종19년 1437년) 대호군(大護軍) 병조판서 정덕성(鄭德成)이다.
약550년전의 압록강 건너 적들과 싸워 공을 세운 연일정씨 조상으로 여겨진다.
550년이나 된 묘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배산묘지를 기행 했느냐고 반문이 있을것이나, 나의 어머님 연일정씨 배산옆 옥구동사람 배산 연일정씨 문중의 뿌리를 찾아보았읍니더.................
연일정씨 고려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임금이 사패지를 많이 포상하여 그래서 배산이 연일정씨 문중산이 되었고, 연일정씨 훌륭한 조상을 두었기에 배산 원모인마을과 옥구동에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고전을 찾아 옮겨보면
정덕성은 1천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의 산양회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뢰산(兀頼山) 남쪽 아간(阿間)으로 향하였다. 11일에 좌우군은 고음한(古音閑) 땅으로 들어가 적의 전장(田莊)을 협공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좌군은 홍타리 가운데의 마을로 향하고, 중군은 오자참으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적의 소굴 10여 호를 수색하여, 적의 머리 35급을 베고 5명을 사로잡고 마소와 가축을 뺏고 쌓아둔 곡식은 불살라 버렸다. 12일에 좌군은 파저강을 지나 올라산성과 아간 땅을 수색하니, 적은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다만 적의 머리 한 급만을 베고 그 집과 곡식을 태워버리고 곧 파저강을 도로 건넜다. 13일 새벽에 우군과 중군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적이 미리 알고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 빈 집 24채와 쌓아둔 곡식을 불사른 뒤에 중군은 곧 돌아오고, 우군은 소토리(所土里)에 머물러 좌군을 기다리면서 적의 머리 10급을 베고 남녀 9명을 사로잡고 홍타리로부터 와서 모이었다. 이날 신시(申時)에 적이 우군이 미처 진지를 마련하지 못한 틈을 타고 달려들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14일 아침에 적이 또 좌군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다가 우리 군사가 화포(火砲)를 쏘자 물러갔다. 좌 우군이 모두 군사를 돌릴 때, 좌군이 앞잡이가 되고 우군이 후군이 되어 오다가 길에서 적 50여 기가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는 것을 만났으나 우리 군사가 쳐서 말 두 필을 빼앗았다. 16일에 삼군(三軍)이 모두 개선하니 죽이고 잡은 적이 6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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