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클(하린) 117p
구체성 속에 암시를 담을 수 있는 방법
1. 구체성 없는 암시는 무용지물이다
*구체적 형상이 태도나 정서를 간접적으로 담도록 한다.
2. 구체성을 먼저 확보하라
3. 상징기법을 활용하라
4. 추상과 관념일수록 구체성은 필수다
시법 詩法 / 아치볼드 매클리시
시는 구형의 과일처럼
만질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말을 못해야 한다
이끼가 자라는 창터의
소매 스쳐 닳는 돌처럼 침묵이어야 한다
시는 새의 비상과 같이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시는 시간 안에서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달이 올라 갈 때
마치 그 달이 밤에 얽힌 나무들에서
가지를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임이 없어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동등할 것이지
진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슬픔의 사연에 대해서는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을 대해서는
기울어진 풀들과 바다 위의 두 불빛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여야 한다
생각하는 사물들 / 서안나
피아노가 부서졌다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쏟아졌다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이름에서 뛰어나왔다
피아노는 피아노를 끊었다
도를 누르면 나무와 바람소리가 났다
실패한 건반은 다정하다
학생들은 노래하고
선생님은 마약쟁이처럼 손을 떨며
고장 난 피아노로 노래를 가르쳤다
계약이란 악보처럼 단단했다
아이들은 간혹
망가진 피아노 뒤에서
입을 맞추곤 했다
우연히 당신 옆모습에서
우주를 발견하듯
교문을 뛰어넘는 학생들은
라 혹은 도 음으로 양귀비처럼 싱싱하다
성대를 수술한 애완견의 침묵처럼
음악실은 간혹 춥기도 했다
피아노를 열면 건반 안쪽에
거미새끼들이 흩어졌다
파열이란
저녁을 찢고 아침의 얼굴과 만나는 것
피아노를 벗어난 피아노
교문을 빠져나온 아름다운 다리들
잉여의 세계가 아름답다
연루 / 안희연
당신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사슴은 색이 없고 무게가 없지만 자주 붉은 사슴이 되고
며칠씩 사라졌다 돌아올 때가 많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그 순간 당신은 비에 대한 낯선 기억 하나를 갖게 된다
소매엔 까닭 모를 흙이 묻어 있다
덫에 걸린 사슴의 발이 검게 썩어들어갈 때
당신은 수없이 지나다니던 방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붉을 대로 붉어진 사슴이 절뚝이며 당신에게로 돌아올 때
당신은 수백 개의 신발이 강물에 떠내려오는 꿈을 꾼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자해-유령 / 장이지
칼로 그어보면
눅진한 점자로 통증이 돋아난다.
몸은 사라지려 하는데,
나는 죽기 전에 유령이 될지도 모른다.
감쪽같이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
도시에서 새로 태어날지도.
빈 도시에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그것을 바람에 실어 보내고
바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배수관에 가만히 귀를 대어볼 것이다.
거대한 적란운이 일어나 이쪼을 돌아보겠지.
나는 거리를 마구 쏘다니고.
설교도 찬양도 없이 빛의 빈 사원이 세워진다.
대낮의 거리를 휩싸고 있는 공기를 느낀다.
죽는다면 어차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죽겠지.
에볼라, 사스, 혹은 트로이의 목마 바이러스......
그 전에 나는 유령이 된다.
그 많던 물신들이 몸을 잃고 금융 자산이 된 것처럼.
유령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데,
칼로 그어보면 신의 유언이 붉게 돋아날까.
'나 여기 있어요.'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문상/하린
이유를 물으려던 입을 다물었다
사진 속 네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생각하다 나이 어린 상주를 보고 말았다
감당해야 할 절의 무게가 버거운데 상복은 무심하게 헐렁했다
젊은 미망인이 아이를 보며 한 번 더 울먹였을 때
네가 웃으면서 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