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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하고 일하라. 일하고 사랑하라. 그것이 삶의 전부다.
2. 사람들은 힘과 성공과 돈같은 그릇된 기준으로 삶의 가치를 측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그릇된 기준에 이른 다른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리고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진실로 귀중한 가치들은 과소평가된다.
3. 영혼의 본성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영혼은 그것 자체의 의식이 없다.
4. 인간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용기를 얻는다.
5. 엄밀한 의미에서 행복이란 극한적으로까지 억제되어 있던 욕망이 어느 순간 갑자지 충족되었을 때 생기는 것이다.
6. 우리는 사랑하고 있을 때만큼 고통에 무방비 상태가 될 때도 없고, 사랑하는 대상을 잃거나 그 대상의 사랑을 잃었을 때만큼 무력하게 불행할 때도 없다.
7. 누구든 사랑을 하게되면 겸손하게 된다. 말하자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자아도취중의 일부분을 저당잡힌 것이다.
8. 지성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나 지성의 목소리는 그것이 말할 기회를 얻기 전까지는 쉬지 않는다.
9. 아이의 찬란한 지성과 평범한 어른의 연약한 지성의 차이는 얼마나 슬픈 대조를 이루는가
10. 우리는 오랫동안 모든 신경중의 결과를 관찰해왔다. 그리고 대개 신경중의 그 목적은 그에게 실생활의 범위밖으로 달아나도록 촉진시키는 것이며, 현실로부터 그를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1. 이드가 있던 곳에, 애고가 있게 될 것이다.
12. 공격하는 성향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독립적이며, 본능적인 기질이다. 공격하려는 성향은 인간의 지적활동을 강력히 방해한다.
13. 누구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14. 우리는 세방향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위협받는다. 첫째로 우리자신의 육체로부터 고통받는다. 고통과 불안이 경계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부패하여 썩어 없어질 운명의 육체로부터 고통받는다. 둘째로 외부세계로부터 고통받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와 다른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고통받는다. 최후의 근원으로부터 온 그 고통은 아마도 다른 어떤 고통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15. 우리는 문명이 본능의 만족을 댓가로 생명의 위기의 압력아래 창조되었음을 믿는다.
16. 네 자신의 영혼을 깊이 바라보라. 그리고 먼저 네 자신에 대해서 배워라. 그후 너는 이 질병이 왜 너에게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너는 그 시점부터 질병에 걸리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7. 마음은 빙산과 같다. 자신의 크기 7분의 1만 모습을 드러내고 떠 있다.
18.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에 존재한다.
19. 사랑과 일은 우리들이 가진 인간성의 본질이다.
20. 화가 난 사람에게 돌 대신 말을 던짐으로써 문명이 시작되었다.
21. 생각이란 그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생각의 뒤를 추적해 갈 수도 없다.
22.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살아서 묻히게 되면, 나중에 더 괴상망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23.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비로써 진실의 전모를 알게 된다.
24. 욕망과 성의 충동이 인간행동의 두가지 동기이다.
25. 이기주의자란 자기도 이기주의자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26. 사람은 비판에는 저항하지만, 칭찬에는 무력하다.
27. 지적노동과 정신할동으로부터 충분한 쾌락을 끌어낼 줄 아는 때에는 아마 운명도 그대를 어쩌지 못한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및 정신병 치료에 관한 이론인 동시에 문화와 사회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이론이다. 반복되는 비판과 논박, 수정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연구는 그의 사후에도 유력한 분야로 계속 남아 있다.
프로이트는 당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지금의 체크 프르쉬보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야코브 프로이트는 유대인으로 모직상이었고, 아말리 나단슨과 재혼하여 40세에 프로이트를 낳았다. 1859년 프로이트 가족은 경제적인 사정으로 라이프치히로 이사했고 이듬해에 다시 빈으로 갔는데, 프로이트는 그로부터 78년 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부분적으로는 빈 시민들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프로이트는 이 제국 도시를 싫어했지만, 정신분석학은 그것이 배태된 곳의 문화적·정치적 맥락을 상당히 반영한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권위가 취약하다는 점에 민감했는데, 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였던 그의 아버지 세대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겪었던 권력의 쇠퇴에 의해 자극받은 것이다. 또한 딸들에 대한 유혹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여성의 성(性)에 대한 빈 사람들의 복잡한 양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873년 프로이트는 스페를 김나지움을 졸업했는데, 당시에 유행하던 괴테의 자연에 대한 수필을 읽고 감명받아 전공을 의학으로 선택했다.
빈대학교에서 그는 당시 탁월한 생리학자였던 에른스트 폰 브뤼케, 반생기론 과학의 선두주자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함께 연구했다. 1882년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정신과 의사인 테오도르 메이네르트와 내과교수인 헤르만 노드나겔로부터 임상수련을 받았으며, 1885년에는 신경병리학 강사로 임명되었고 뇌의 연수(延髓)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마쳤다.
1885년말 프로이트는 신경병리학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 빈을 떠나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가서 장 마르탱 샤르코 밑에서 연구했는데, 프랑스에서의 19주 동안의 경험은 일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샤르코가 '히스테리'라고 분류된 환자들에 대해 연구한 것을 보고 프로이트는 심리적인 질환의 원인은 뇌에 있다기보다는 마음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샤르코는 팔이나 다리의 마비 같은 히스테리 증상과 최면상태에서 유발되는 현상들을 연결시켰는데, 이는 이 병의 원인이 신경계보다는 정신상태에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이후 얼마 가지 않아서 최면요법에 대한 믿음을 버렸지만, 1886년 2월 혁진적인 심리학적 방법을 가지고 빈으로 돌아 왔다.
수개월 후 프로이트는 함부르크의 수석 랍비와 하인리히 하이네 등을 조상으로 하는 저명한 유대인 가문의 딸인 마르타 베르네이즈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중 하나인 안나 프로이트는 후에 뛰어난 정신분석가가 되었다. 결혼 직후 프로이트와 베를린의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 사이의 긴밀한 우정이 시작되었고 15년간 친밀한 관계를 맺는 동안, 그는 플리스와 자신이 발전시킨 대담한 개념들에 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나누었다.
그의 인간의 양성(兩性)에 대한 믿음, 신체에는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부위가 있다는 생각, 심지어 성욕의 기원이 유아기에 있다고 생각한 것 등이 플리스와의 우정에 의해 발전되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 프로이트는 의사인 요제프 브로이어와 협력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1880년대초에 브로이어는 이후 글에서는 '안나 O.'라고 알려진 베르타 파펜하임이라는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녀는 여러 가지 히스테리 증상을 앓고 있었다.
브로이어는 샤르코의 최면요법을 쓰는 대신 그녀로 하여금 자기최면과 유사한 상태로 빠지게 하여 스스로 자신의 증상의 초기 발현형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했다. 놀랍게도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녀는 그동안 사로잡혀 있던 증상으로부터 회복되었다. 브로이어와 안나 O.가 각각 '담화치료', '굴뚝청소'라고 한 이 방법은 병리적인 행동의 근저에 있는 억압된 감정을 분출시켜 풀어주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프로이트는 10년 후인 1890년대 초 자유연상법을 개발하고 나서 비로소 브로이어의 경험이 함축하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을 브로이어와의 공저인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 Studien über Hysterie〉(1895)에 발표했다. 이 방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마음에 연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위적으로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정신의 한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내용들을 밝히려고 했다.
환자들이 자유연상 도중 갑자기 말을 멈춘다든가 더듬는다든가 하는 등의 어려움을 보일 때, 그는 이것이 환자의 표현에 대한 갈등과 방어를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저항'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숨겨진 충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석되어야할 것이었다(억압). 샤르코나 브로이어와 달리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 환자에 대한 임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저항의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더 나아가 신경증의 여러 증상들이 성적 감정 또는 충동과 이에 대한 정신적 방어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욕망과 방어 사이의 타협 형성의 결과로 생각되었던 신경증 증상들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자유연상을 통해 갈등을 의식 세계로 끌어내고 그것의 함축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프로이트의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는 여성의 성과 그것이 신경증으로 발현될 잠재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정신분석학(1896년 프로이트가 명명)이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남성의 정신도 연구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가장 잘 아는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켜 자신을 분석하기로 했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괴로웠던 한 사건인데 1896년 10월 아버지 야코브 프로이트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감정, 즉 그가 어린시절에 겪었던 가족 내에서의 경험과 애정에 관한 감정이 분출되었던 것이다. 1897년 7월초에 프로이트는 수천 년 동안 이루어졌던 방법인 꿈의 분석을 통해 본격적으로 그 감정들의 의미를 드러내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그가 꿈 분석의 전통에 기여한 것은 실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는 꿈의 분석이 '무의식에 대한 지식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하면서, 꿈이 왜 생기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많은 주석가들이 프로이트의 걸작으로 평가하는 〈꿈의 해석 Die Traumdeutung〉(1899)에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제시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소원실현(wish fulfillment)이 위장되어 표현된 것이며, 신경증의 증상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내부에서 욕망과 이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사이의 충돌이 타협한 결과인 것이다.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가 '꿈 작업'(dream work)이라고 부른 꿈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억하여 이야기하는 꿈의 현상적인 내용은 잠복된 의미를 베일로 가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꿈은 매일 겪는 즉각적인 경험의 잔재가 가장 깊고도 유아적인 욕망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해석이 가능하다. 꿈의 해석은 꿈의 방향과 반대되는 과정이며, 꿈을 의식적으로 설명하는 수준에서 의식의 바로 전 단계를 거쳐 무의식 자체로까지 옮겨가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 Zur 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1904)·〈농담과 무의식과의 관계 Der Witz und seine Beziehung zum Unbewussten〉(1905)에 이어 〈성 이론에 대한 3가지 기고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1905)를 출간했는데, 이 저서는 그를 성과학(性科學)의 선구자로 확립시켰다.
여기서 그는 성욕의 개념을 관습적인 영역을 넘어서 어린시절부터 계속되는 성애적인 충동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인생의 초기에 시작되며, 만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표현이 매우 다양하며 쉽게 잘못 발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성욕을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결론내렸다.
프로이트는 신체에서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부위가 점진적으로 다른 부위에 의해 대체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성적 충동의 발달과정을 설명했다(리비도). 원래 다형태인 인간의 성욕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을 통해 구강으로 충족시키려고 하며, 이후에는 다른 대체물로 옮겨진다.
구강기가 지나고 2세 때에는 어린이의 성욕의 초점이 항문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배변훈련에 의해 더욱 촉진된다. 항문기 동안에 배변을 통한 어린이의 쾌락은 주위의 자기통제 요구와 대립된다. 4~6세까지 지속되는 3번째 기간은 남근기인데, 그는 남성의 성욕을 발달의 준거로 보았고 이 시기의 주된 관심이 거세불안(去勢不安)이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 대한 그의 분석은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의하면, 남근기는 거세공포를 동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남자 어린이가 어머니와 자고 싶어하는 욕망과 이를 충족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구)가 해소되어야 성공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소년이 마침내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구를 억제하고 소위 잠복기로 들어가며, 아버지의 꾸짖는 금지를 내면화하여 정신의 한 부분인 초자아 또는 양심을 구성할 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해소될 수 있다. 그는 정신구조 내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중요하다고 항상 주장했으며, 이의 성공적인 해소가 잠복기를 거쳐 성숙된 성욕의 단계인 생식기로 변화하는 데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생식기에서는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부모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고 재생산에 유용한 열정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좀더 적당한 사랑의 대상을 선호하게 된다.
만일 성적 발달의 여러 단계를 적절히 통과하는 데 실패하면, 어느 특정한 시기에 성적 대상이나 목표의 고착이 일어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게 되거나 강력한 성적 충동이 봉쇄된다. 이 고착은 나중에 나이가 든 다음에 성도착(性倒錯)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만일 정신의 어떤 부분이 노골적인 표현을 금지하면 충동이 억제되고 검열을 받기 때문에 음성적인 도착인 신경증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감정의 갈등을 신체 증상으로 전환시키는 히스테리의 신경증 이외에도 그는 강박관념장애·편집증·나르시시즘 등의 다른 전형적인 신경증의 원인에 대해 복잡하게 설명했다. 그가 정신신경증이라고 한 이러한 신경증들은 아동기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현실의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침울증·신경쇠약증·불안신경증 등의 신경증과는 반대되는 것이다(도착증, 정신신경증).
당시 빈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1900년대초에 그의 이론에 대한 지지자들의 모임이 전세계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902년 그의 대기실에서 미래의 정신분석학 운동의 지도자가 될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요심리학회'(Psychological Wednesday Circle)가 열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A. 아들러와 W. 슈테켈이 종종 S. 페렌치, C. G. 융, O. 랑크, E. 존스, M. 아이팅곤, A. A. 브릴 등과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08년에 빈 정신분석학회(Vienna Psychoanalytic Society)로 개칭했고 첫번째 국제학회를 잘츠부르크에서 열었으며, 같은 해에 베를린에 최초의 자매학회가 생겼다. 1909년 그는 융·페렌치 등과 함께 매사추세츠 우스터에 있는 클락대학교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행을 했다.
그곳에서 그가 행한 연설은 곧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Über Psychoanalyse〉(1910)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가 일반 청중들을 위해 쓴 여러 개설서들 중 최초의 것이었다. 〈도라〉(1905)·〈작은 한스〉(1909)·〈쥐사나이〉(1909)·〈정신병자 슈레베 박사〉(1911)·〈늑대사나이〉(1918) 등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일련의 생생한 증례 연구를 포함하고 있어서, 이 책은 그의 이론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려지게 했다.
치료에서 전이의 힘과 오이디푸스적인 갈등의 보편성을 강조한것에서 예견되듯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운동의 초기 역사는 의견의 불일치, 배신, 변절, 제명 등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1911년 아들러, 1912년 슈테켈, 1913년 융과의 분립이 일어났고, 곧이어 1920년대에는 페렌치, 랑크, 빌헬름 라이히와 결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속되는 분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가 죽은 뒤 그에 대한 연구자들은 그의 정신분석학 운동이 과학자 사회보다는 분파주의적인 교회를 닮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20년대에 발간된 2권의 책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 Jenseits des Lustprinzips〉(1920)·〈자아와 이드 Das Ich und das Es〉(1923)에서 그는 초기에 정신을 무의식·전의식(preconscious)·의식으로 구분하던 것과 이후 자신이 이드(id)·자아(ego)·초자아(superego)로 범주화한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이드는 유아기 때의 만족을 추구하는 가장 원시적인 충동으로서 흥분의 방출과 에너지의 집중을 통해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충동이며, 본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1차적 과정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2차적 과정의 결과로 자아가 성장하는데, 이는 현실원리를 따르며 이드에 의해 지배되는 쾌락원리와 구별된다.
여기서 자기보존을 위해 욕망의 만족을 유보해야 할 필요를 점차 배우게 되면서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데, 자아는 이러한 갈등을 처리하기 위해 방어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 방어 메커니즘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제이지만 그외에도 반동형성·분리·취소·부정·전이·합리화 등이 이에 속한다.
3번째 구성요소는 초자아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동안에 부모의 명령을 동일화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부터 발달된다. 초자아는 부분적으로만 의식적이며 이드로부터 자아로 향하는 특정한 공격적인 요소를 빌려와서 죄책감을 들게 한다.
사랑하는 회원님!
요즘에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제한들이 해제되면서 그동안 묵혀두었던 숙제나 모임 등도 이제는 서두를 때가 되지 않았는가요?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허둥댄다고 그러한 일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허둥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어찌해서 그리 허둥대고 있었는가요?
지성있는 인간은 서두르는 일은 있어도 허둥대는 일은 없다. 허둥대면 일을 망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둘러서 일을 완성하는 일은 있어도, 서두름으로써 일이 아무렇게나 되지 않도록 항상 마음을 쓰는 법이다.
대개 소심한 사람이 허둥대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힘에 부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허둥대며 뛰어다니고, 머리를 썩이고, 결국 혼란에 빠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 이것 저것 모두 한꺼번에 해치워 버리려고 해서 어느 것에도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별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손을 대려고 하는 일을 완전히 끝마치는데 필요한 시간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가 한 가지 일을 지속해서 서둘러 완성한다. 요컨대, 서둘러도 항상 침착하여 허둥대는 일이 없으며, 한 가지 일을 끝맺기 전에는 다른 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우리도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아서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을 대충 마무리하려면, 차라리 절반은 완벽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손을 대지 않은 채로 그냥 두는 편이 훨씬 낫다. 게다가 교양 없는 인간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무성의한 글씨를 쓰는 어리석음, 그런 품위없는 짓을 해서 몇 초의 시간을 벌었다고 해도 그 시간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리 아이아코카, 만약 당신이 시간을 잘 사용하길 원한다면, 뭐가 가장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하고, 당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