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6,22-34; 요한 16,5-11
+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더 친밀한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현존할 것입니다. 즉, 이전에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 ‘안에’ 계실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이 문장을 200주년 신약성경은 이렇게 번역하는데요, “그분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며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서 밝혀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책망하시며’(ἐλέγξει)라는 말씀은 재판과 관련이 있는데, 나쁜 것을 빛으로 데려가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입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첫째, 세상은 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이 되신 말씀을 거부하는 것인데, 세상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둘째, 세상은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사람들은 그분이 유죄였기에 돌아가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의롭고 예수님이 죄가 있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시고, 세상이 의롭지 않습니다.
셋째, 세상은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패배하시고 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 세상이 심판을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러한 판결을 내린 세상이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실라스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자정 무렵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는 세 젊은이가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올리브 산으로 가실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가를 부르며 올라갑니다. 어려움과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가 어떻게 하면 찬미가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여 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약함 안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은 강한 이가 힘없는 자가 되고, 힘없는 자가 강력한 자가 되고, 죄수가 해방자가 되고, 감금의 수단이 구원의 방편으로 변모하는 이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오늘 1독서의 말씀입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갇힌 죄수였지만, 오히려 간수를 죄에서 해방하는 해방자가 됩니다.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보다 간수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 더 큰 기적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을 뒤집어 모든 것을 제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시각을 꾸짖어 바로 잡게 하시고,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죄수와 해방자의 처지도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아니, 그 일은 이미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부활의 은총과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눈을 뜨고 있는가, 여전히 눈을 감고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에 다시금 귀를 기울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윌리엄 하터렐 (1855-1928),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
출처: Paul and Silas in prison by William Hatherell (meisterdrucke.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