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가다보면 만나는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자칭 나그네에게 가장 반가운 것은 아마도 옹달샘이 아닐까. 묘적암(妙寂庵)을 오르는 길에서도 석간수(石間水)가 고인 반야샘을 마주치게 된다.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을 하고 나니 바로 지척에서 달맞이꽃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샘 주위라서 공기가 습해 그런지 저물녘에 꽃문을 열기 시작하는 달맞이꽃들이 활짝 만개해 있는 것이다.
묘적암은 암자면 그대로 묘하고 적적한 은둔지 같은 산골에 있다. 반야샘을 조금 지나 모퉁이를 도니 그대로 불이문(不二門)이고 암자가 아닌가. 꽃처럼 붉은 봄단풍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고, 그 밑에는 산토끼 한 마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껑충거리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스님도 봄단풍나무도 산짐승도 아무 차별이 없는 무등(無等)의 세게에 살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묘적암이 유명한 것은 나옹(懶翁)스님이 출가했던 곳이디 때문이다. 두말할 필요없이 나용스님은 고려말 보우(普愚)스님과 함께 조선불교의 머릿돌이 되었던 여말 최고의 선승(禪僧)이 아닌가.
'나옹스님은 경북 영덕의 한 시골마을에서 살다가 21세 때 친구의 돌연한 죽음을 목격하고는 이곳 묘적암으로 출가했다고 합니다. 스님이 입적했던 곳은 55세 때의 일로 여주 신륵사(神勒寺)고요."
우연히 암자까지 동행하게 된 한 젊은 스님의 설명이다. 좋은 수행처를 찾고 있다는 그 스님은 뜻밖에도 나옹스님에 대해ㅔ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준다. 당시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던 나옹은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자, 회암사로 간다. 호암사에는 일본의 고승 석옹(石翁)이 와 있었는데, 거기서도 나옹은 2,3년만에 요달(了達)해버리고 대오(大悟)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원나라의 연경으로 가 인조 승려 지공(指空)의 문하로 들어간다. 그러나 고려의 수행승 나옹은 지공으로부터도 3년만에 공부를 끝내고 귀국해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고승도 나옹에게는 3년 이상을 가르쳐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원나라 순제(順帝)마저 나옹스님을 존경하여 연경의 광제선사(廣濟禪寺)라는 새절의 주지로 임명할 정도였다.
나옹은 할 수 없이 광제선사로 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지만 공민왕의 간청에 의해 회암사 주지 등을 지내다가 50세에 이르러 왕사(王師)와 조계종 대종사(大宗師)를 맡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늘 묘적암 시절을 그리워햇다고 한다. 명예를 누리고자 출가한 것이 아니라 산승(山僧)으로서 자유인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묘적암 시절을 떠올리며 릎었음직한 그의 이런 선시(禪詩)도 출가의 초심(初心)이 무엇이었는지 짐작케 한다.
흰구름 무더기 속에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으니 스스로 한가하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이 차다
그렇다. 흰구름 무더기 속에 있는 초막이 바로 그가 늘 고향처럼 여겼다는 묘적암이 아닐 것인가. 하산길에야 들러본 반야샘 옆에 자리한 부도지(浮屠址). 범종 모양의 위엄 있는 부도가 나옹스님의 것인데, 돌에 낀 허연 이끼 지국들이 마치 단청을 연상케 한다. 세월이란 시간의 손이 몇백 년 동안 그린 것이겠지만 흰구름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無染 정찬주/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