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산책과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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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영민
가격 : 11,000원
추천의 글
나는 출판계의 지인을 만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대형서점의 서가를 채우는 많은 책들, 그리고 인테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채우는 숱한 책들이 머지않아 모두 레테의 강 저편으로 사라져 까마득히 잊혀지겠지만 김영민 교수의 책들은 꺾을 수 없는 푸르름으로 살아남으리라고. 자본 속에 남으려 하지 말고 시간 속에 남으려거든 어쨌든 김 교수의 언어를 나꿔채라고. 비산하는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제 배터리 경고신호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김영민 교수의 언어로 충전될 것이다.
모든 주택이 아파트로 변하고 모든 길이 주행로로 영토화되는 천민 자본주의의 시대에 마침내 산책과 보행조차 불가능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나의 이 예측은 틀리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내 언어가 과장스럽게 들린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간곡히 권하고싶다. 이 책 <자본주의와 산책>을 한번 꼼꼼히 정독해보시라고.
-이왕주(부산대, 철학)
언어란 생활양식 안에서 몸으로 이루어내는 소통과 표현의 산물이다. 그러니 언어는 쉽게 관습적 몸의 언어로 간주되고 인문적 글쓰기도 선형적 논리로 평가 된다. 그러나 김영민 교수는 새로운 몸의 언어를 추구한다. 그는 모든 것을 뒤집어 보고자 한다. 질서의 보수는 생각의 단절이고 자유는 상상력의 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모험적이다. 여러 전통 그리고 현대 문화의 현란한 이미지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결하고, 구조화하면서 새로운 시각의 예언자적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독자는 그의 설득력에 공명하게 된다. 인간 미래라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신체적이면서 유기적이고, 신선하면서 인간적인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적 글쓰기의 전범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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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이화여대, 철학)
본문 중에서
1장 산책과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이동이면서 동시에 ‘교환’이라면, 산책의 탈자본주의적 창의성은 무엇보다도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자본제적 교환의 바깥으로 외출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구름과 바람, 소리쟁이와 기생초, 다슬기와 꺾지, 금강송 너머의 황혼 등은 단지 완상의 대상이거나 레저의 환경만이 아니다. 그것은 단번에, 그리고 총체적으로, 우리 삶의 원형적 모습이 등가적 교환의 외부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산책,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선 자본제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삶이다.
2장 체계와 무지
만하임이 허위의식이라고 불렀던 이 환상의 ‘체계’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다. 그것은, ‘무지’가 우리의 양식(良識)이자 우리의 평화가 될 수 있다는 부정적 묵시록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다; 심지어 ‘무지’가 우리의 존재론적 기반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섬뜩한 현실과 마주하는 체험이다. ‘체계 바깥은 없다’는 선언에서 간취할 수 있듯이, ‘무지’는 이처럼 ‘체계’와 비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3장 핸드폰, 거울사회의 페티쉬
핸드폰이라는 사이비 창(窓)/문(門)은 조직적 나르시시즘, 체계적 자기증식의 사회인 우리의 거울사회가 ‘거울’이 아니라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허위의식을 뻔뻔스럽게 전시해 놓는 장치로 보인다. 이미 그것은 종교와 사랑만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조차 흡수하는 나르시시즘의 표상으로 우리 사회를 종횡한다. 그것은 실로 이 거울사회의 페티쉬이자 토템이 되어가고 있다.
4장 혁명은 왜 배신당하는가?
혁명의 동인과 창업의 명분이 되었던 사연을 질기고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배신과 타락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망각처럼 편리한 화해는 없고, 내현기억(implicit memory)의 조작만한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루카치가 ‘자본주의적 삶의 산문성과 퇴행적으로 대치하는 낭만주의’를 불신했던 일마저도 이같은 기억의 문제로 번역할 수 있다고 본다.
5장 용서는 없다
너와 나의 상처는, 너와 내가 울고 웃으며 다룰 수 없는 상처는, ‘용서하라’는 것을 도그마(dogma)로 가진 자들의 날름거리는 쇠 혓바닥에 의해 재차 능멸 당한다. 그저 용서가 아직 충분히 상업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명개 먼지 한 톨 만큼의 위안이라도 얻을까? 아, 오늘도 조갯살 같은 내 상처를 조개껍질 같은 네 용서가 은폐한다, 조롱한다, 강간한다.
6장 인문학의 무능, 무능의 인문학
나는 인문학이 ‘지는 싸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10여 년째 떠들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자본, 기계신(機械神), 혹은 어떤 종류의 현상적 위기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설적 무능에 근거한 인문의 운신 원리를, 그 빈 중심의 가능성을 소환하려는 것이다. 유약자(柔弱者)로서의 인문이 그 역설적 가능성의 최대치를 지닌 채 이 세속 속을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불러본 것이다.
7장 건달인간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사치와 결부되었다;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도 ‘존재의 목자(Hirt des Seins)’도 아닌 인간은 낭비와 잉여에서 스스로의 취향을 티내고 권력의지를 과시하고 노동과 축적의 세계에 결락한 존재감을 보충한다. 건달도 꼭 그런 것이다. 건달 역시 사치와 낭비의 특별한 한 방식이며, 특히 노동의 부재에 얹힌 집단적 환상의 이미지를 키우는 대중 욕망의 대상이다.
8장 독신, 혹은 음탕한 주체
사랑조차 제도에 얹혀 유형화, 표준화되는 판에, 반품율이 50%에 이른 혼인제도 따위에 무슨 ‘자연’과 ‘자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혼인제도는 늘 기성의 도덕이나 통치 이데올로기를 공식적으로 유통, 학습시키는 기본 단말기의 하나였으므로, 체계의 차원에서 혼인을 자연화 시키려는 노력은 차마 집요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로도 사회체제가 존속하는 한 그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첫댓글 산채과 자본주의?
음...그새 수정했군, 이렇게 되면 나만 뻘쭘하군...
ㅎㅎ 게릴라님 재밌어여^^읽고싶게 만드는 책 인듯 합니다~화팅!!!
7장이 눈에 띄는군요. 건/달/인간론
출판건달과 다른 건달인간들을 위하여!!!
이번주 신문 보도가 예상되는 곳. 한겨레, 동아, 문화일보. 보도가 확정된 곳. 국민일보 저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