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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단군이래 충신 정몽주[ 鄭夢周 1]
정몽주[ 鄭夢周 ] (1337년(충숙왕 복위 6) ~ 1392년(공양왕 4) )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개성시 선죽교
출생-사망 | 1337 ~ 1392 |
본관 | 영일 |
자 | 달가 |
호 | 포은 |
시호 | 문충 |
별칭 | 초명 몽란·몽룡 |
활동분야 | 정치·문학 |
출생지 | 영천 |
주요저서 | 《포은집》 |
본관 영일(옛 연일).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도모했다. 그리고 성리학에도 밝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사회 윤리의 기반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에는 고려의 기존 법률 체계와 원나라의 법률, 1367년에 새로 제정된 《대명률(大明律)》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율(新律)》을 편찬해 고려의 법률 체계를 재정비하려 했다. 나아가 외교와 군사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정몽주 연보 | |
출생 1337~ 사망 1392 | |
1337 | 경상도 영천에서 출생. |
1357 | 감시에 합격. |
1360 | 문과에 장원하여 예문검열·수찬·위위시승을 지냄. |
1363 |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 |
1364 | 전보도감판관을 지냄. |
1376 |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으로 유배. |
1377 | 유형에서 풀려나 사신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킴. |
1379 |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
1387 |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 |
1392 |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 |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의 초상화, 궁중화가였던 이한철이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에 보관된 초상화를 1880년 모사하였다.
절의의 신화, 그리고 동방이학의 조종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1337년 경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의 후손이지만, 이후 조상은 한직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의 어느 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잠이 깬 뒤 그를 낳았다 하여 어렸을 적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검은 용이 동산 가운데 있는 배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고 깨어 나가보니 배나무에 몽란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고 고쳤다가 성년이 된 후 몽주로 다시 고쳤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과거의 삼장(초장∙중장∙종장)에서 연이어 장원을 차지하여 이름을 떨치고, 당대 최고의 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과 수학했다. 1362년 예문관의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67년 성균관 박사, 1375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성균관 박사로 유교 경전을 강의하던 당시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밖에 없었는데, 정몽주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유창한 해석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들어온 경전이 정몽주의 강의 내용과 일치하자, 사람들이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했다는 일화가 [고려사]에 전한다.
스승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가장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칭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성리학의 창시자로 평가했으며, 다섯 살 아래의 후배였던 정도전도 “여러 생도가 각기 학업을 연수하여 사람마다 이견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물음에 따라 명확히 설명하되 털끝만큼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라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정몽주는 이후 정도전에게 많은 영향을 주며 ‘마음을 같이한 벗 (同心友)’의 맹세를 나누었으나, 역사의 선택은 그들을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는 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명나라,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유능한 외교가
정몽주는 고려에 성리학이 처음 들어올 당시, 이를 탁월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뛰어난 학자이기도 하지만, 명나라나 왜국과의 외교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한 외교가이기도 하다. 친명 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된 뒤 친원파들이 명나라 사신을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명나라와의 외교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몽주는 정확한 해명을 통해 두 나라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주장을 펴 전란의 위기를 해소했다.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자꾸 분란이 생기자 명 태조가 성이 나, 장차 고려에 출병하려 할 뿐 아니라 매년 보내는 토산물을 증액시키고, 지난 5년간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며 사신의 볼기를 치고 유배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 상태에서 명 태조의 생일이 닥치자 조정에서는 모두 핑계를 대며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이때 친원파들이 정몽주를 추천했다.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음모였다. 더구나 명의 수도인 남경까지는 대략 90일이 걸리는데, 생일을 불과 60일 남겨둔 상태였다. 정몽주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을 급히 불러 서장관으로 삼고 밤낮을 달려 생일날 무사히 축하문을 명 태조에게 전했다. 이때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유배되었던 사신들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니 외교적인 능력이 탁월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377년에는 왜에 사신으로 가기도 했는데, 이 역시 앞서 사신으로 갔던 나흥유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자 친원파들이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정몽주가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교화시키자 그들은 정몽주를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왜인 승려들은 그의 시를 얻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다 한다. 이때에도 귀국 시 수백 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친명파로 이성계와 뜻을 함께했으나, 마지막 순간 서로 다른 선택을 하고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하여가]∙[단심가]라는 시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손에 죽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전설이 되다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혔다.”라며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했던 문관들은 유배 보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더는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은 없었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조선에도 정몽주 같은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정몽주의 충절은 선죽교에 뿌린 피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선주교의 혈흔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1362년 예문관(藝文館)의 검열(檢閱)·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金得培)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金鏞)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김득배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候)·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종군하여 서북면에서 달려온 병마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여진토벌에 참가하였다. 돌아와서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전농시승(典農寺丞)을 역임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했기 때문에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이듬해 예조정랑(禮曹正郎)으로 성균박사를 겸임하였다.
태상소경(太常少卿)과 성균관사예(司藝)·직강(直講)·사성(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다. 다행히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1376년(우왕 2)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구가 심해 나흥유(羅興儒)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정몽주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九州: 현재 일본의 큐수지역)지방의 패가대(覇家臺)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교린(交隣)의 이해(利害)를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전공사(典工司)·예의사(禮儀司)·전법사(典法司)·판도사(判圖司)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380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이듬해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올라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 보문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事寶文閣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1382년 진공사(進貢使)·청시사(請諡使: 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遼東)에서 되돌아왔다.
동북면조전원수로서 다시 이성계를 따라 함경도에 다녀온 뒤, 138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歲貢)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상태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우홍명(禹洪命)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귀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영원군(永原君)에 봉군되었다. 그러나 한 번 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다시 국교가 악화되는 바람에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이듬해 문하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시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 영서운관사(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寺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館事)로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봉군되고,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초(彛初)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정객들에 대한 대간(臺諫)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았다. 이에 사직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사 영경령전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경연사 익양군충의백(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 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당시 풍속이 모든 상제(喪祭)에 불교의식을 숭상했는데,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家禮)』에 의해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요청해 예속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썼다. 또 지방수령을 청렴하고 물망이 있는 사람으로 뽑아 임명하고 감사를 보내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했으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에 경력과 도사를 두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였다.
서울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그리고 기강을 정비해 국체를 확립하였으며 쓸데없이 채용된 관원을 없애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해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는 등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하고 있다.
평가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은 정몽주를 높이 여겨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 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정몽주는 고려 말의 어려운 시기에 정승의 자리에 올라 아무리 큰일이 나더라도 조용히 사리에 맞게 처결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상훈과 추모
1401년(태종 1) 권근(權近)의 요청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殿大提學監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 태학생(太學生) 등의 상서(上書)로 문묘에 배향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永慕齋),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등 몇 곳의 서원에는 정몽주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 47. 정몽주[ 鄭夢周 1] 고려말 (1337년~ 1392년 )(55) : 고려 말 단군이래 충신1(단심가)|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