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은 있음의 어머니…생은 죽음이 근본
<22> 증시랑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③-1
[본문] 방거사(龐居士)가 말씀하였습니다. “다만 모든 있는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간절히 모든 없는 것을 채우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 두 구절의 뜻을 알면 일생동안 참선 공부하는 일을 다 마칩니다.
요즘에 한 종류의 머리 깎은 외도가 있어서 자신의 눈은 밝지 못하면서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가르친다 하니 만약 이와 같이 쉬고 또 쉰다면 1000명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또한 쉬지 못하고 마음만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없음에서 왔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과정
[강설] 대혜선사가 증시랑에게 답장하는 세 번째 편지다. 먼저 방거사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 구절의 뜻을 알면 일생의 참선공부를 마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존재는 유형이나 무형이나 유정이나 무정이나 일체를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평범한 안목으로는 있음을 더욱 있게 하고 없음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있음은 없음이 근본 바탕이다. 그러므로 근본바탕인 없음을 잘 이해하여 모든 있음(諸所有)을 근본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생(生)은 사(死)가 근본이다. 우리들 인생은 없음에서 왔다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또 텅 빈 공간이 근본이 되어 지구나 기타 모든 위성들이 떠다니게 된다. 만약 텅 빈 공간이 없으면 지구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일체 건축물도 공터나 공간에서 건립되었다.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공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비어있는 종이라야 글씨를 쓸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모든 삶은 있음(有)이지만 실은 없음 위에서 영위되고 있다.
그러므로 없음은 있음의 어머니다. 방거사의 말을 쉽게 풀면 이렇다. “모든 있음을 있음의 근본인 없음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굳이 없음을 있음으로 여겨 살지 말라”라고 하겠다.
다음에 지적한 ‘쉬어감’의 문제는 대혜선사가 일생을 통해서 가장 힘주어 배척한 내용이다. 대혜선사가 묵조선(默照禪)을 힘써 배척하고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내용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본질은 고요한 면도 있고 움직이는 면도 있다.
그런데 ‘쉬어감’이란 다만 고요함만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중도를 잃고 치우친 것이 된다. 중도란 조화며 균형이다. 참선이 이상적인 삶을 위한 수행이라면 당연히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결같이 고요함만을 위하여 쉬어가고 또 쉬어가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출가나 재가를 막론하고 반드시 외도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기다리더라도 쉴 수 없을 것이다.
[본문] 또한 사람들에게 “인연을 따라 마음에 지니어 잊지 말라(管帶)”라고 하며, 또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묵묵히 비추라”고 하니 비추어 오고 비추어 가며, 지니어 오고 지니어 가면 더욱 혼미하고 답답하기만 할 것입니다. 공부를 마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조사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잘못 지시하여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헛되게 살고 헛되게 죽게 합니다.
[강설] 이어서 묵조선의 병폐를 또 지적하여 배척하고 있는 내용이다. “인연을 따라 마음에 지니어 잊지 말 것”과 또 “생각을 잊어버리고 묵묵히 비출 것”이다. 묵조선의 선사들이 그들의 공부 방법으로서 당시에 이렇게 가르치는데 대혜선사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서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묵조선의 공부 방법은 크게 깨닫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데 반하여 간화선에서는 화두일념의 관문을 지나 크게 깨닫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 가장 큰 다른 점이다. 조사가 제시한 깨달음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공부인을 잘못 가르쳐 사람의 일생을 헛되게 한다고 망쳐놓았다고 꾸짖는 말씀이다.
첫댓글 '있음'과 '없음'을 쌍차쌍조 하여 有無不二의 중도로 사유하지 않고 '있음'을 보면 常見에 빠지고 '없음'을 보면 斷見에 빠진다. 緣起와 空性으로 사물을 보면 있다 할 수도 없다 할 수도 없다.
깊은 혜안으로 "緣起와 空性" 열어주시고 찾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