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1607∼1689)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문신 학자로.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송시열 유허비는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있으며, 충북기념물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 때 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 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때문에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유학사상은 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 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숭정후삼술이월일’이라 새겨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다.
사진과 글 : 송시열 유허비, 제주큰동산, 2014.02.19.04:13, 제주 서귀포시 보목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