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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로 재임했던 아베 신조는 국제무대에서 일본을 더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길 원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아베는 속죄와 역사적 책임을 희생해야 했다.
아이작 초티너(Isaac Chotiner)
2022년 7월 9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11일 나라(奈良)시에서 피살됐다. 자민당 의원인 아베는 일본의 최고 선출직 공직에 두 번 재직했다. 첫 번째는 2006년부터 1년 동안, 두 번째는 2012년에서 2020년 사이였다. 아베는 저명한 정치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외무장관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범 혐의를 피한 후 1950년대 후반에 총리를 지냈다. 아베는 2020년 퇴임 후에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었다. 총리로서, 아베는 일본을 국제 문제에서 강력한 존재로 재건하려고 했다. 일본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그의 정책은 아베노믹스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일본이 해외에서 비방어적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아베는 도널드 트럼프와 맬컴 턴불 전 호주 총리를 비롯한 많은 세계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으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관계, 특히 한국과의 관계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가증스런 행동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베의 태도로 인해 긴장되었다.
아베가 사망한 후 나는 현대 일본과 한국을 전공한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알렉시스 더든(Alexis Dudden)과 전화 통화를 했다. 우리가 이야기할 때 그녀는 도쿄에 있었다. 우리는 대화하면서 아베의 2차 세계대전 수정주의, 미국에 대한 그의 복잡한 감정, 그리고 일본 헌법을 개혁하려는 그의 노력이 궁극적으로 실패한 이유에 대해 논의했다.
아베의 유산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치를 재구성하였거나 적어도 그렇게 시도한 총리였습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인 외교 시도를 통해 보다 적극적인 일본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널리 여행했습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다른 세계 지도자보다 20번 이상 만났습니다. 그는 시진핑(習近平)을 만났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자 그를 만난 첫 외국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베는 극도로 매파적인 견해, 일본 제국의 유산에 대한 극단주의적 입장,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에서 자행된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일본과 아시아 이웃 국가 사이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하지만, 영광스러운 과거의 일본 역사를 다시 쓰려는 그의 개인적인 비전은 동아시아에서 실제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다른 국가의 대일 외교 접근 방식을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천황의 이름으로 행해진 전시 행동에 대한 일본의 책임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해 일본 사회도 더욱더 분열시켰기 때문입니다.
교수님은 "역사를 다시 쓴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진실을 다시 쓴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을 다시 쓴다는 말인지요? 아베는 2006년 처음 집권했을 때 일본이 역사를 이해했던 방식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었는지요?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 현상 유지에 더 가깝지만 더 공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까?
아베를 공부할 때 도움이 되는 점은 그가 직접 여러 기사를 쓰고 책을 출판했으며 역사에 대해 특히 일본 역사에 대한 자신의 비전에 대해 많은 연설을 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초반에 그가 처음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는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 믿어지는 의회 내 연구 단체의 일원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일본의 국회 기록보관소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지만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베는 1990년대 중반에 시작했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이 서거하고 처음으로 "위안부"가 등장한 이후 아시아에서 일본의 전시 역할을 사회적으로 재검토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과 관련한 자신의 정당의 입장을 새롭고 보다 강력한 방식으로 더 공개적으로 밝히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일본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다시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가 첫 번째 총리 임기를 앞두고 있던 시기인 2006년은 이러한 문제들이 일본과 전 세계적에서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훨씬 더 잘 연구되어 있었습니다. 아베는 2006년과 2007년에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부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워싱턴 포스트지에 전면 광고를 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의회가 일본이 위안부 제도를 만든 역할에 대해 속죄할 것을 요구하는 구속력 없는 하원 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때 그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궤양성 대장염으로 처음 사임했을 때도 그는 충격을 받았지요.
그러나 1994년과 2006년 사이에 "일본회의"(Nippon Kaigi라고 하는 그의 주요 로비 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정치 로비 그룹은 대중의 얼굴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념적으로 매우 강력한 단체로 부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를 트럼프나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수상 및 기타 극단주의자, 또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고 있거나 극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입니다. 스티브 배넌이 있기 전까지 스티브 배넌은 누구였습니까? 아베는 하급의원과 총리가 되는 사이에 이 단체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면서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냥 "난징 대학살"에 대한 후속 조치를 원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것을 "난징 강간"으로 알고 있습니다. 1937년 일본군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을 죽이고 수만 명을 강간했지요.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어떤 노력이 있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아베는 정확히 무엇을 주장하였는지요?
그는 여러 장소에서 이에 대해 몇 가지 점들을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 중 많은 부분이 날조였고, 대부분이 일본을 비방하려는 중국의 노력이었다고 했습니다. 실제 주장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적이 없으며, 많은 경우에 일본인을 대상으로한 중국군이라는 것이었죠. 이것이 바로 그런 종류의 홀로코스트 부정입니다.
9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많은 일본 지도자들, 심지어 아베가 속한 정당 내부에서도 정부가 후원한 잔학 행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아베는 이들 일본 지도자들에 대한 반발의 일환으로 출발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할 때까지 학자는 물론 공직자도 천황의 역할에 대해서나, 천황이나 아니면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이 이러한 잔학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주제는 난징과 위안부,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입니다.
2012년 아베가 집권한 후 일본의 전시 행동에 대해 더 많은 사과를 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을 연합하려는 일부 미국의 압력이 있었지요. 일본의 전쟁 기록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아베의 이러한 움직임은 진정성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실질적인 것인가요?
누군가의 사과의 진정성은 제가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베가 책임을 맡아 자신의 스터디 그룹과 해온 일들입니다. 특히 2012년 두 번째 집권과 동시에 이 그룹은 아베와 같은 당이 이끌었던 일본 정부가 1993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던 '고노 담화 '에 대해 내각급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아베는 그 발언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조사하라고 지시했지요. 그리고 일본 학자, 한국 학자, 중국 학자,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더 많은 공개 토론을 촉발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잠깐만요, 일본은 이미 했던 사과를 철회하려는 건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베는 전쟁 기념일 등의 자리에서 "음, 저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지합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그의 정부는 이미 책에 기록된 것, 특히 고노 담화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알맹이 없는 껍데리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아베의 두 번째 임기인 20년 동안, 예를 들어 출판업자에게 압력을 가하여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과 일본군이 특히 대륙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한 구절들, 특히 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의 노력을 기록 보관 수준에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연합국에 대항했던 일본의 노력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패배한 전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등을 삭제하도록 정부가 지원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2015년 4월 미국 의회 합동 연설에 초대받았을 때 그는 연설을 하였고 모두가 일어서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상한 전투는 대부분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이겼거나 무승부로 간주된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것이 그가 말하는 내용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8월에 아베 총리는 1904년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어떻게 러시아를 물리쳐서 전 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한국의 식민지화로 이어진 전쟁이었고, 그의 연설은 한국을 후려갈긴 연설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본이 이러한 행위를 저질렀음을 아베가 마치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때에도 그는 그 때마다 저질러진 잔학행위와 이 지역의 소위 역사 문제를 부추기는 것들에 대해 일본이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고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그가 집권하기 전에 했던 모든 고된 일에서 물러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분명해졌습니다. 역대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지지했지만 아베 총리는 2015년 말 일본과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한 후, 이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일본 정부가 책임을 졌다거나 일본 국가가 위안부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러한 속죄의 몸짓을 하고 있다고 보도되는 동안, 아베 총리가 일본을 70년대와 80년대로 다른 방향으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이후의 정부는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개헌을 원한다는 기사를 읽거나 아베나 다른 일본 지도자들이 국제 문제에서 보다 적극적인 외교적 역할을 하고 싶어한다는 기사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글쎄,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75년이나 지났다. 그리고 일본은 그 이후로 이웃 국가들과 대체로 평화를 유지해 왔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이들 국가는 본질적으로 '정상적인' 국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가? 어떤 국가들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보다 더 폭력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어떻게 답하시렵니까?
아베 총리는 A급 전범으로 낙인찍힌 할아버지의 오명을 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3년 동안 투옥되었지만 재판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1957년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베는 자신의 책에서 어렸을 때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그의 할아버지를 조롱하여 놀림을 당했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의 불명예를 씻고 범죄의 개념을 뒤집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자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전범 재판소에서 기소된 것처럼 일본은 유죄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또한 그의 정당인 자민당 내에서 분열의 원인이 된 것 중 일부입니다. 일본이 처음에 미국식 용어라고 불렀던 미국 헌법을 받아들였어야 했느냐의 문제입니다. 물론 1947년 미국이 점령하고 이 헌법을 일본에 넘겼을 때, 그리고 1947년 5월에 발효되었을 때, 그것은 미국 문서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헌법에 "평화헌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해외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입니다. 그리고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이 헌법을 "마조히스트", "자멸적", "거세된"과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 되었습니다.
아베는 그것을 아시아, 세계에서의 일본의 위치에 대해 다시 써야 할 임무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게 '왜 모든 국가가 그러한 권리를 갖지 않아야 합니까?'고 묻습니다. 명심해야 할 중요한 것은 이 헌법이 결코 자위권을 금지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 미국의 지원으로 경찰력을 자위대라는 군대로 전환할 수 있게 한 이래로 군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외에서 전쟁을 하거나, 자위를 제외하고 해외에서 총알을 쏠 권리가 없었고, 미국과 함께 특히 유엔 평화유지군과 함께 급유나, 인도적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베는 이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본격적인 군대를 가진 정상적인 일본을 생각했습니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전쟁을 금지하는 일본 헌법 9조의 많은 부분이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헌법 잘라내기(슬라이싱)라고 부릅니다. 2015년에 아베는 집단적 자위권을 제정할 때라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2015년 여름 내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이 새로운 법안을 채택하는 일본에 반대하는 행진을 했습니다. 이 법안이 해외 전쟁 금지령을 뒤집는 첫 단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암살되기 전 목요일 아침 신문에서도 일본의 국방예산 증액에 대해 엄청난 논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현 총리가 이루고자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아베는 일본의 방위비 지출을 늘리고 공격 무기용의 구매를 강력하게 옹호했습니다.
미국이 만들어놓은 일본 헌법에 대한 아베의 생각을 고려할 때 그의 할아버지를 전후 훨씬 더 나쁜 운명으로부터 구해낸 것이 미국인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미국인들은 반공을 이유로 종종 독일과 일본의 전범 용의자들에 의지하려 했지요.
아베가 전범재판소의 판결을 재검토하고자 했기 때문에 아베가 쓴 글의 대부분은 결국 오히려 반미적입니다. 잡초에 너무 빠져들고 싶지 않지만 전후 일본의 부상은 이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평화조약의 수락은 일본 정부가 전범 판결을 수락하는 것을 전제로 했습니다. 일본의 위대한 성공과 일본이 전후 시대에 이룩한 놀라운 일들을 지워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아베가 하려고 했던 것은 역사의 이 작은 부분들, 실제로는 거대한 부분들입니다만, 일본과 일본 국민들이 2차 세계대전 중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다시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입장이 더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을 제외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더 독단적인 중국과 시기가 겹쳤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동의하시는지요?
그는 일본이 아시아와 세계에서 훨씬 더 강력한 군사적 역할을 하기를 계속해서 원하는 워싱턴의 특정 동맹 관리자들 그룹들과 매우 긴밀하게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그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이러한 개념으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그가 스스로 이 이 용어를 만들었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는 일본이 중국을 포함하는 이런 종류의 봉쇄에서 호주, 인도, 미국과 함께 더 군사적으로 교전할 수 있기를 정말로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해군력과 소위 방위력을 강화하고자 하였지요.
따라서 그의 교전 노력은 일본의 군사 능력을 강화하는 것과 훨씬 더 큰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에 수년간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지가 있습니다. 그는 이 기지 건설에 대한 지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자신의 비전을 강화하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확실히 밝혔습니다. 일본의 안보 입장과 태세. 아베의 유산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방식은 꽤 어려운 용어입니다. 그가 만들고 일본을 위한 책들에 적혀 있는 정책은 매우 단단한 벽을 만들어 안보 언어가 생각을 지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중국을 점점 더 공격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고 북한의 미사일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있지만 미국의 명령을 따르고자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앞서 일본 우익의 아이러니에 대해 말한 것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특정 종류의 반미주의에 대한 역사적 및 기타 이유가 있지만 그들의 정책은 미국의 정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근본적으로 반미적이기 때문에 그의 경력에 덧씌워진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미일 동맹 약속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 인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안보 측면의 것으로서 이 지역에서 더 큰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한국과의 대립, 점점 더 얼어붙는 중국과의 관계는 일본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아베의 결의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아베와 아베의 유산에 있어 "위대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은 다른 이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아이러니는 아베와 같은 정치인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 봉쇄를 아웃소싱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미국은 아베의 모든 국가주의를 간과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
첫댓글 출처 : https://www.newyorker.com/news/q-and-a/how-shinzo-abe-sought-to-rewrite-japanese-history?utm_source=twitter&utm_medium=social&utm_campaign=onsite-share&utm_brand=the-new-yorker&utm_social-type=earn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