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제주(濟州)는 한반도(韓半島)의 남서 해상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섬이다. 명칭도 도이(島夷)·주호(州胡)·탐모라(耽牟羅)·섭라(涉羅)·탁라(乇羅)·탐라(耽羅)·제주(濟州)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려왔다. 신라의 속국이었던 탐라국(耽羅國)은 938년(태조 21)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1105년(숙종 10)부터는 군을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다가, 1153년(의종 7) 군을 현으로 고쳤으며, 1211년(희종 7)에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하였다. 1271년(원종 12)에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도에 웅거하면서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에 패한 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지가 되어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다. 그 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도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는 복잡한 과정을 겪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완전히 고려에 회복되었다. 조선 태종 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성주(星主)·왕자(王子)의 칭호가 폐지되고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었다. 1416년(태종 16)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山北)을 제주목(濟州牧), 산남(山南)을 양분하여 동쪽에 정의현(旌義縣), 서쪽에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하고 전라도(全羅道)에 소속시켜 통치하였다. 1864년(고종 1)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관할 하에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제(府制)를 실시함에 따라 제주부를 설치하여 정의군·대정군을 관할하도록 했다. 1896년에 다시 13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정의군·대정군과 완도군 추자면(楸子面)이 제주군에 병합되어 제주군은 제주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5년 도사제(島司制)로 개편되어 제주도(濟州島)가 되었고, 1946년 도제(道制) 실시로 전라남도 관할 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6년에 비로소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고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을 신설했다. 1955년에 제주읍을 시로 승격하였고, 1956년에는 서귀면·대정면·한림면을 각각 읍으로 승격하고 한경면을 신설하였다. 1980년에 애월면·구좌면·남원면·성산면을 읍으로 승격했으며,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을 합하여 서귀포시로 승격하였다. 1985년에 조천면을 읍으로, 1986년에 구좌읍 연평출장소를 우도면으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시조는 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맏이인 양을나(良乙那)이다.
《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쪽기슭 모흥혈(毛興穴: 삼성혈(三姓穴))에서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21년(고려 태조 11)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 후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559년(진흥왕 20) 신라에 사신으로 예방(禮訪)하니 진흥왕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을 양(梁)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 양순(梁洵)이 682년(신문왕 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 양순을 중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제주로 삼았다. 양씨는 양탕이 신라에 입조한 이후부터 육지로 진출하였는데 제주 토박이 양씨는 제양(濟梁), 육지로 퍼져있는 양씨를 육양(陸梁)이라고도 한다.
양씨가 남원(南原)으로 분적하게 된 시기는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양우량(梁友諒)이 공훈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면서 이다. 후에 충주(忠州)가 다시 분관되어 3개의 분적이 생겨났다.
분적종 및 분파
양씨(梁氏)는 모두 제주양씨(濟州梁氏)로 남원양씨(南原梁氏)와 충주양씨(忠州梁氏)도 제주에서 분적(分籍)한 성씨이다.
유격장군파: 양보승
천호공파: 양중덕
사직공파: 양유침
중랑장공파: 양흥
서두봉관파: 양의
주요 세거지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면 신예리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상가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제주양씨는 41,169가구 총 133,35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