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민일보 2023년 12월 19일 화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화장을 하며
문정희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 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 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테 로더의 아이라이너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올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 ㅡㅡㅡㅡㅡ 돈 들고 귀찮은 화장은 왜 할까. 단연 예뻐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고, 돋보이기 위해 치장을 한다. 스스로의 자신감을 얻기 위함일 수도 있고, 예의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점을 가리고,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더 신경을 쓴다. 가끔 자신을 돌아보지만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 화장에 길든 사람에겐 자신의 맨 얼굴이 더 낯설다.
얼굴화장을 하듯이 마음도 화장을 하면 어떻게 될까? 예뻐지고 돋보이기 위한 마음화장은 어떤 화장품이 필요할까? 얼굴도 마음도 화장을 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디에 있는 누구일까?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