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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국불교를 굴리는 세 바퀴
글 | 이원익
불교에는 불법승 삼보를 비롯하여 삼법인, 계정혜 삼학 등 세 묶음으로 된 기본적인 사항들이 몇 개 있다. 한국 불교의 대표 종파인 조계종의 상징 마크도 큰 동그라미 안에 작고 둥근 점 세 개가 세모꼴의 꼭짓점을 이루며 놓여 있다. 아마 불법승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절이나 불교의 표시로는 보통 아이들 바람개비 모양의 전통적인 만(卍)자가 쓰였다. 이 문양이 팔작집인 절집의 기와지붕 양 편 위 세모꼴의 수직 모서리 면에 그려져 있었고 스님들의 가사 끝자락이나 승무를 추는 비구니 스님의 고깔에도 이런 문양이 흔히 찍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이 문양은 사라지고 대신 다른 문양들이 나타났다. 아마 이 만자 표지가 나치의 스와스티카와 닮은 탓으로 본의 아니게 거리낌을 받던 차에 각 종단 내부의 개혁 과정에 따라 새로운 로고를 채택하면서 이 문양은 버려지거나 잘 쓰지 않게 된 것 같다.
어쨌든 조계종의 새로운 마크가 상징하는 대로 불법승이 불교의 세 가지 보물임에는 틀림없고 이는 시대와 나라를 뛰어넘어 모든 불자들이 지키고 기리며 받들어야 할 핵심 사항으로서 오늘 이 시간, 태평양을 건너온 이 미국 땅에서도 변함없이 굴러 가야 할 부처님의 보배로운 세 바퀴다.
그런데 보다시피 우리가 안간힘을 써서 굴리려는 미주의 한국 불교는 그 바퀴가 별로 힘차고 미끄럽게 굴러 가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왜 미주 땅이라고 덕 높으신 스님들이 안 계시고 신심 깊은 불자님들이 없었겠나. 그리고 지금도 신행과 포교에 있어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는 곳들이 있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뜻을 높이 평가하며 그 공덕에 감사드리면서도 미주 한국 불교 전체를 바라볼 때에는 냉정한 자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장래를 위한 실제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의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전체 인구의 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고국의 종교간 점유율과 비교해 보아도 이곳 사정은 너무 터무니가 없어 동포 사회에서 불자를 만나기가 좀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마치 일제 시대 때 독립 운동가를 만나듯 여간 쉽지가 않다. 다들 어디 숨었는지 때로는 불자가 있기나 한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인데 이는 이곳에 와 있는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의 경우와 비교해 보아도 의아스럴 정도로 우리의 불교세가 약하고 지리멸렬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연구 대상이다.
현각 스님의 말씀대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동쪽으로 태평양을 건너 올 때 자기들의 소중한 보물들은 죄다 바다에 던져 넣어 버린 게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시켰기에 자진해서 제 껍데기를 홀라당 벗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땅에 닿자마자 한국인에게만 해당 되는 어떤 특별한 사회, 문화적인 조건들이 작용하여 마치 된서리 맞은 무웃잎처럼 맥을 추지 못하게 돼 버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일부 타종교에서 주장하듯 이곳에 이민 온 우리 한인 동포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본래부터 부여받은 선택된 민족, 선택 된 집단이라는 우격다짐이 말 그대로 진실이란 말인가?
하지만 먼동이 트기 직전 밤하늘은 한층 더 어두워지는 법이다. 그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이러한 자괴와 설익은 지레 판단으로 이쯤 해서 모든 걸 놓아 버리고 그 물결에 그냥 휩쓸려 가기에는 이생을 받아 나온 우리 인연이 너무 소중하고 우리 자존심은 너무나 끈질기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불쌍한 목덜미를 비추는 부처님의 은혜와 가피는 은은하게 저 하늘에서부터 내리비치고 있어 어리석은 중생의 작은 손바닥으로 이를 가릴 수가 없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을 살펴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대면하자. 어느 틈으로 쐐기를 박아 넣어야 이 엄청난 장애물을 쪼갤 수 있을까, 결을 살피고 덩치를 가늠해야 한다. 한숨만 쉬고 넋두리만 늘어놓는다면 이 거대한 절벽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날이 저물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조계종의 이 새로운 로고의 형상을 빌어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그 세 바퀴, 그 꼭짓점마다에 부여하고자 한다. 어찌 보면 진정한 삼보를 굴리기 위하여 앞서 굴려야 하는 안내의 세 바퀴다. 마치 육중한 화차를 철길 위로 더듬어 인도하는 앞쪽의 작은 길잡이 바퀴들처럼 현실이라는 철길을 인도하는 이 세 개의 안내 바퀴가 함께 제대로 굴러야 미주 한국 불교는 제 갈 길을 이탈하지 않고 민중의 들판에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불보 법보 승보의 열찻간들을 목적지까지 끌고 갈 것이다.
1. 꿈의 바퀴
불교는 꿈의 바퀴를 굴려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꿈, 비전, 이상의 바퀴다. 무슨 불교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도대체 이 땅에서 어떤 불교를 왜 하고자 하는가? 이 꿈을 실천할 수 있는 명료한 이념의 바퀴, 우리의 공통 된 목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현실성 있는 이데올로기의 바퀴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껏 현실에 맞고 이상을 향해 매진할 수 있는 뚜렷한 지향점을 가진, 목표가 분명한 미주 한국 불교를 제대로 제시 받은 적이 없다. 혹 그런 적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불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왜 불교를 믿고 왜 절에 가며 왜 수행을 하고 봉사를 하며 희사를 하는가? 왜 해야 되는가? 그저 기복 신앙의 언저리를 맴돌 뿐 불자들로 하여금 낮은 차원의 이상을 더 높은 차원의 이상으로 끌어올려 실천하게 하는 정신적인 이끎, 가르침, 격양, 휘몰아감이 부족해 보인다. 불자들은 정신적인 참 지도자를 목말라 하고 있다. 정말로 크신 스님, 정말로 거룩하신 스승님을 바라며 그의 뛰어난 제자들, 깨끗하고 부지런하며 능력 있는 성직자 및 인도자들에 목말라 하고 있다. 한 떨기의 불씨가 들판을 불태우듯 진정으로 뜨겁고 맑으며 인화성 있는 진리의 불씨, 이념의 불씨, 신앙의 불씨는 미주한인 동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불어넣어질 새 꿈은 어떤 속성을 가져야 할까?
우선 그 꿈은 절실해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정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불안하고 불쌍한 중생, 남에게 속고 나에게 속고 꿈에 속고 돈에 속고 이름에 속은 우리 중생들에게 진실을 보여 주어야 하고 겉치레가 아니라 속알맹이, 거짓이 아닌 참을 얘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은 꾸준해야 한다. 한 때의 꽃구름이 아니라 천년만년 흐를 수 있는 긴 강물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 꿈은 세차야 한다. 물에 물 탄 듯, 흐리멍덩한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햇살과 같이 밝고 강해야 한다. 나약함과 불분명함으로 자신 없음과 도망 갈 구멍을 남겨 놓는 기회주의적 처신이 호도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꿈을 펼치는 이는 외유내강해야 한다. 불자들은 서로간의 근거 없는 권위 내세움에 고개를 돌린 지 오래다. 이제 모두가 겸손해야 한다. 이리하여 진정한 권위, 진정한 품위로 굴리는 꿈의 바퀴 뒤로 만백성은 줄지어 궤도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무엇보다도 한여름 밤의 잠꼬대가 아니라 현실에 발 딛고 꾼 꿈이라야 한다. 그 꿈은 우선 사람들의 기복을 만족 시켜 주어야 한다. 늘 낮은 차원의 기복에 매몰 되어도 안 되지만 기복을 무시하고서는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업힐 방도가 없다. 조선시대 오백년 동안의 핍박에도 어쨌든 불교가 살아남은 것은 바닥 민중의 이러한 기복에 요구에 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됨은 자명하다. 기복이 발원으로 번져 나가 한 단계 높은 전법의 이상으로 치달아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종교는 미신에 머물거나 민간신앙의 연못에 고여 썩고 만다.
이리하여 불교는 현실과 더불어 이상에서도 함께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안식과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한다. 이리하면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구석마다 많은 이들이 절에 모여들어 서로 사귀고 돌봄으로써 이웃을 엮고 자녀들을 엮으며 세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오래도록 재생산 되어 갈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 종교를 이어갈 성직자, 곧 남녀 출가자도 재생산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꿈은 있는가?
부처님의 법을 굴리려는 자, 먼저 그 꿈을 가다듬어라.
2. 돈의 바퀴
불교는 돈의 바퀴를 굴려야 한다. 돈 만드는 기계(Money Machine)의 엔진이 꺼지면 불교의 심장도 따라 멈춘다. 쉽게 얘기해서 미주 한국 불교는 경제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종교라고 예외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자립, 자생, 융성할 수 없으면 절도 망하고 신행 단체도 망한다. 우선은 근근이 버틸지라도 빚만 남고 결국 주인이 바뀌어 사라진다. 어떻게 돈을 만들 것인가?
다시 말하건대 종교는 돈 때문에 흥하고 돈 때문에 망하지만 꼭 돈이 많아야 흥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하여 망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든 많든 돈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쉽게 망하고야 만다. 불교가 돈을 잘 모을 수 있고 불릴 수 있으며 다스릴 수 있는 가르침이 될 수 없다면 이 각박한 종교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저 고대로부터 수천 년을 이어온 면면한 가르침의 전통과 불사의 흔적, 그것은 달리 보면 불교야 말로 깨끗하고 생산적이며 효율적인 재화의 관리에 엄청나게 성공해 왔다는 객관적인 증표다. 그런데 이 위대한 전통이 그만 시대의 발걸음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비틀거리고 쓰러지려 하고 있다. 왜냐? 여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발맞추지 못하고 뒤떨어진 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돈을 만들려면 우선은 신심에 바탕한 씨돈이 모아져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씨돈을 꾸준히 굴리고 불려서 쌓아 가야 한다. 그리고 돈이 돈을 만들며 시간이 돈을 만드는 복리의 상승작용이 일어나 재정의 엔진이 끊임없이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왜 이게 잘 안 되는 걸까?
첫째는 어찌 했든 씨돈을 내고 모아야 된다는 메시지, 창업의 이데올로기가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보시를 해야 하는지 제대로 꿈을 펼쳐 보이고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항상 돈 관리에 있어서 확고한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은 돈이라도 명확하게 관리 되지 않고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차마 쩨쩨하게 따지지 않는 너그러움과 모호함, 이것이 결국 커져 이제는 꼭 따지고 밝혀야 할 때마저 모두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제법 재정의 규모가 복잡해지고 커진 후에도 도대체 회계를 믿지 못하게 되는 불상사가 생기곤 하는데 이러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크든 작든 모든 보시는 사적이 아니라 공적인 수입으로 잡혀야 하고 지출도 반드시 공금에서 공적으로 나가며 타당한 사유와 증거에 의해 정산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일이 참 잘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아직도 쌀 한 자루 이고 산사를 찾아오던 분들의 순박함이랄까, 미워할 수 없는 생색내기랄까, 어쨌든 스님이 이런 자잘한 일에서 저만치 비켜나 있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이 많다.
자, 이렇게 일단 확실한 회계 감사 시스템이 구축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엔 어떻게 지속적으로 재화를 모아들일 것인가?
바라건대는 신도들의 자발적이며 청정한 무주상의 재보시로 모든 것이 해결 되는 이상적인 상황이다. 이상적이란 말은 현실은 그렇게 잘 안 된다는 말이다. 불가의 전통적인 방식에서는 여기에 많은 약점이 있다. 좁쌀 백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 한 번 구르는 것이 낫다고 너무 큰 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문자 그대로의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경우는 현실에 있어서는 드물다. 이보다는 십시일반, 박리다매, 누구나 참여하고 주인의식을 갖는 불교, 시간이 돈을 벌고 돈이 돈을 버는 복리와 투자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 지속적으로 융성해지자면 무엇보다도 성직자의 청정함이 우선이요 법력의 왕성함이 필수임은 물론이다. 속된 말로 가장 돈을 밝히지 않으면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포교해야 돈 문제가 해결 된다는 역설이다. 왜냐면 종교이기 때문이다. 스님의 강력한 원력과 포교정신이야말로 엔진을 돌리는 힘의 연료요 끊임없는 수행과 청정함은 기계를 정비하고 고장 없이 오래도록 돌게 만드는 무형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돈 문제는 처음부터 제도를 확립하여 능력 있는 신도들이나 중간층 간부들을 참여 시켜 조직적으로 관장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크고 길게 보면 이렇게 되어야만 제대로 발전을 할 확률이 높다. 조직과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에만 의존하여 출가자에게 직접 현금을 건네어 다루게 한다면 성직자의 명망이나 이미지, 수행과 법력에 있어서도 그렇고 현실적인 이재나 관리의 효율에 있어서도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잘 돼 봐야 소규모 개인사찰이나 구멍가게 수준을 뛰어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밖에 본국 종단으로부터의 투자도 생각해 봄직하다. 마중물을 넣어야 양수기의 물을 자아올릴 수 있듯이 초기의 과감한 투자로 인프라부터 형성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주관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와 분석이 선행 되어야 한다.
그리고 법장 스님의 청규에서 보듯이 미주에서도 신도들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또는 일부라도 스스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통상적인 신행 및 포교와 더불어 상업적이거나 공업적, 서비스업적인 영업을 곁들이는 방법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이템을 잘 고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정명의 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미국의 자선 기관이나 민간단체, 지방 정부 등에서 명목에 맞는 보조금을 타내는 방법은 없는지 알아 볼 필요도 있다.
부처님의 법을 굴리려는 자, 반드시 깨끗하고도 원활한 돈의 바퀴를 굴려야 한다.
3. 법률의 바퀴
불교는 법률의 바퀴를 굴려야 한다. 여기서 법이니 법률이니 하는 것은 다르마(Dharma)가 아니라 변호사가 법정에서 다루는 로(Law), 곧 미국의 법이다. 그 중에서도 민사법이다. 종교 단체, 비영리법인, 재산권, 상속권, 지적소유권, 보험, 상해, 고용, 세무 등이 관련 되는 법들일 것이다. 종교와 관련 된 한국의 법, 종단의 규칙, 사찰의 전통 관례에 대해서도 참조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세밀하고도 철저한 법률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른 나라도 어느 정도 그렇겠지만 미국은 더욱 그렇다. 유형의 존재든 무형의 존재든 법률 체제라는 뼈대가 제대로 돼 있지 않은 존재는 하루아침에 폭삭 무너져 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미주의 많은 사찰, 재가단체 가운데는 사실 이러한 법률의 뼈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모래위의 성들이 많다. 아무리 있는 것 없는 것 갖다 바치며 공을 들이면 무엇 하나? 몇 년 뒤에는 엉뚱한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 흩어지고 말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이러한 예를 실제로 보아 왔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물론 우리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못 따르는 한낱 중생들이기 때문이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식이든 한국식이든 아직 법 개념에 익숙하지 않고 법률의 생활화가 덜 된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다. 일이 잘못 되었을 경우에도 대개 어느 일방이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의도적으로 그리 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법을 잘 모르고 법 없이 살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뭐가 뒤틀리고 감정이 상할 때면 냉정을 잃고 무조건 법에 호소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정견을 잃어 지혜가 없고 정정을 하지 못하여 흥분하기도 하며 그러는 과정에서 사심이 싹트기 때문이다. 동포 사회의 많은 단체들이 어지럽히는 이러한 소송 사태는 신물이 날 정도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것이 종교 단체들이다.
위에서 애기한 돈 문제와도 얽힌 것이지만 이러한 법률적인 문제들도 처음에는 인정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따지거나 밝히지 않는 데서 잉태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좀 지나면 차마 그런 일은 입 밖에 낼 수가 없게 되고 문제의 소지는 잠복한 채 커져 간다. 일단 법인과 자산의 소유권 문제만 들여다보아도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이곳 초창기 한국 절은 인정에 기대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 되었으며 그 결과 자연스레 주지 스님의 개인 명의로 되기도 했을 것이다. 추후에라도 비영리 법인으로 등록이 전환 되었다면 사정이 좀 나을 수 있다. 어쨌든 유력하고 공로가 많은 신도들과의 문제, 본국 종단이나 사찰과의 관계, 한국식의 관습과 전통적인 한국 절집의 법규 등 여러 가지가 중첩 되어 있어 속을 들여다본다면 사정이 자못 복잡할 수 있다. 잘못 일이 꼬이면 아주 해결 곤란한 고질적인 싸움에 휘말릴 수 있다. 한 번 이렇게 내분이나 법정 싸움에 휘말리면 뜻있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십년 포교, 십년 공덕이 하루아침에 날아가고 미주 한국 불교 전체가 한심한 집단으로 싸잡아 매도당할 수 있다. 이럴 바에야 포교고 불사고,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 있었느니만 못해 보이기도 한다.
참 한심한 일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사람만을 탓하지는 말자. 사람이 나쁘다기보다 크게 보아 일단은 제도와 역사와 문화의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사찰의 소유와 운영에 관한 명확하고 합리적인 제도, 문화와 전통이 확립 되어 있지 않아서 생긴 피해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곳 미국 땅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어떤 제도와 문화가 가장 바람직한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우선 미주 한국 불교의 소유와 운영을 개신교식으로 할 것이냐 천주교식으로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천주교 식으로, 한국이나 미국 자체 내의 종단에서 안정적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며 성직자의 신분과 노후를 보장해 줄 수 있다면 많은 문제점들이 줄어들 수 있겠다. 하지만 스님들의 의욕이 떨어져 공무원처럼 될 수도 있다. 현재 원불교는 어느 정도 이러한 시스템에 접근해 가고 있는 듯하고 본국의 조계종단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목표 아래 해외 교구 신설의 첫발을 내디디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미주 한국 불교를 개신교 식으로, 개척 교회 식으로 한다면 어떨까? 좀 더 절박하고 역동적이어서 잘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경우도 단순하지는 않다. 스님에게 전권을 드려야지 교회의 장로들처럼 신도회에서 스님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스님은 그만 의욕을 잃고 훌쩍 떠나가 버리는 사례를 보아 왔다. 한국 스님들의 성격이나 문화가 은사 스님이 아닌 누군가의 간섭을 받아 가며 민간인이 낀 시스템의 일원으로 매여 작동하며 일하는 식이 맞지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스님에겐 신도들이 괘씸하고 신도들에겐 스님이 무능력하고 무책임해 보여 파탄 나 버릴 지도 모른다. 참 어려운 문제다. 스님이 없으면 절이 잘 되지를 않고, 스님 식 대로만 하면 어차피 발전을 기하기 어렵고…….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청정하고 법력 높으신 스님이 계시고 이를 따르는 신심 있고 활동적인 신도들이 힘을 합친다면 무주공산 이 미국 땅에서 그 절은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어쨌든 이 모든 문제의 바탕을 다지려면 무슨 계획이라도 그에 앞서 싫든 좋든 법률적인 검토부터 해야 한다. 왜냐면 장기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고 견뎌 나가려면 법률의 기초와 뼈대 위에 제도의 집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른 때이다. 귀찮고 돈과 시간이 들더라도 불교의 장래에 확신을 가지려면 이와 같이 법률에 먼저 투자하여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와 대비를 함이 마땅하다.
부처님의 법을 굴리려는 자, 세속의 법륜부터 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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