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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만날수록
아름다운 내면을 드러내주는 그림
취재 | 홍성미
고려불화, 그 신비함과 화려함
Goryeo Buddhist Painting:
Mystic and Glamorous
전시가 플러싱타운홀에서 열렸다.
지난 4월 22일 플러싱타운홀에서는 고려시대의 화려한 불교문화였던 고려불화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고려불화: 그 신비함과 화려함’ (Goryeo Buddhist Painting: Mystic and Glamorous) 미술 전시가 열렸다. 뉴욕한국문화재단과 플러싱타운홀이 공동주최하고 한국 해남 대흥사와 미주현대불교가 후원했던 이 전시에는 고려불화 전승의 맥을 잇고, 고려불화를 재현하고 있는 화가 조이락과 강창호, 현승조 작가들의 고려불화 재현작품들이 선보였다. 전시와 함께 플러싱타운홀 2층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불화 전문가인 간송미술관 연구원 탁현규 박사의 강연과 조이락 화가의 고려불화의 제작과정 시연이 있었다. 작품 전시와 더불어 고려불화 강의와 시연을 통해 교육의 장을 동시에 제공했던 이번 전시는 700년 전 우리 고려인들의 미학과 사유의 경지를 엿볼 수 있었던 흔치 않은 기회였고, 미술사적 명성에 비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고려불화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전시 첫 날 리셉션에서는 불교미술을 사랑하는 미술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뉴욕지역 스님들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고려불화에 대한 사람들의 큰 관심이 느껴졌다.
고려 불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건 1991년 미술품 경매 회사인 뉴욕 소더비사에서였다. 당시 내정가의 10배인 176만 달러, 한국돈으로는 약 14억 2천만원에 경매된 그림 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였다. 당시 한국 고미술 경매가 중 최고가였던 수월관음도는 은은하고 화려한 색채의 아름다움이 높이 평가되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미국 미술계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려 청자와 더불어 고려를 대표하는 예술작품이었던 고려불화는 고려청자와 달리 그 가치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고려불화의 실물이 일반에 공개된 건 반세기도 채 되지 않는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도 고려불화 4점이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1998년 한국관 개관과 더불어 2000년대 초반에 구입된 이 불화들은 한국 불화가 아닌 중국이나 일본의 불화로 잘못 알려져 박물관에 처음 들어 왔다고 한다. 그 후 최근 약 30년간 한국 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비로소 한국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700년 동안 고려불화가 국적도 분명하지 않은 채 떠돌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까지 학계에 보고된 고려불화는 약 160여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 한국에 남아 있는 건 약 10여점에 불과하고, 미국과 유럽에 약 20여점, 그리고 그 대부분인 약 130여점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려에서 만든 고려불화가 한국에서는 그 존재조차 모른 채 대부분의 작품들이 일본에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고려불화가 일본으로 유출됐는지, 그 정확한 경로를 확인 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불화가 가장 융성했던 14세기에는 일본의 왜구들이 고려를 자주 침입했던 시기였고, 심지어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 있던 고려 왕실의 사찰 흥천사까지 왜구가 침입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약 90년동안 고려와 일본 사이에 군사적 정치적 긴장관계가 이어졌던 시기로, 공식적인 교류는 물론이고 무역도 일절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 시기 고려의 문화재들이 공식적인 루트가 아닌 약탈이라는 방법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고려불화를 소장하고 있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당시 일본 최고의 권력자들이었는데, 이는 고려의 문화재를 약탈한 일본의 왜구들이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대마도나 규슈지역의 실세였던 일본의 최고 권력자들에게 고려불화를 상납하거나 돈을 주고 팔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의 사찰들은 고려불화 한 점 갖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을 만큼 일본에서 고려불화에 대한 인기는 무척 높았다고 한다. 어쩌면 한류의 시작은 고려에서부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비로자나불도 -“만오천불”불화
이번 전시에 소개되었던 고려 불화 중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작품들은 괴로움과 번뇌의 고통에서 중생을 구원해 준다는 자비의 보살 관음을 그린 수월관음도와 더불어 조이락 작가의 고려불화 재현작 “비로자나불도”였다. “만오천불도”라고도 불리우는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만오천불이라는 글씨 아래 온화한 모습을 한 비로자나불이 홀로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1만 5천명의 부처가 그림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개인 소장자가 고배 시립박물관에 기탁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 작품은 고려 시대 불교회화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독특한 표현 방식과 내용, 그리고 초정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비로자나불도”는 고려 화공들의 뛰어난 화법과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었다.
불화 중 가장 섬세하고 작은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비로자나불도”는 화면 가득 부처와 보살이 채워져 있다. 비로자나불의 옷자락에도, 가사 소매에도, 사찰 누곽에도, 글자에도, 바탕에도 약 5mm 크기의 부처의 작은 얼굴들이 그려져 있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전혀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작품 가까이에서 다시 펼쳐졌다. 보면 볼수록 놀랍고 신비로운 작품 속 초정밀의 세계에 사람들의 발걸음 역시 움직일 줄 몰랐다.
고려불화의 재현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작품이다
섬세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불리우는 고려 불화를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남아있는 문헌이 거의 없는 700년전 그림. 베일에 싸여있는 고려불화는 그 제작과정을 하나씩 찾아가며, 그림의 바탕이 되는 비단, 석채와 아교의 비율 등 각각의 재료와 특징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어야 하는 전문성과 더불어 작가의 예술적 내공과 기량을 모두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원작이든 또는 재현작이든 이러한 예술적 경지는 누구도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가 조이락은 그녀의 재현작품 “비로자나불도”를 완성한 후, 마치 작품 속 그림에서처럼 눈 앞의 모든 공간이 부처로 가득차 있는 열반의 순간을 체험했다고 한다. 작가 조이락의 작품을 실재로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열반 체험이 당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불화 “비로자나불도”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하고, 눈가를 촉촉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조이락 작가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며 항상 겸손해 한다. 하지만 그녀의 “비로자나불도”는 700년전 그 고려 화공과의 시공간을 초월한 만남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수작이라는 느낌을 주었고, 붓을 쥔 그녀의 손 위로 왠지 그 옛날 그 고려 화공의 또 다른 손이 보이는 듯 했다.
화엄경에는 비로자나불이 깨달음을 얻을 때 대광명을 시방세계에 비추고 모든 털구멍에서 작은 부처가 나온다는 구절이 있다. “비로자나불도”에 표현된1만 5천개의 작은 불상은 바로 이 비로자나불이 깨달음을 통해 발현한 작은 부처들이 시방세계를 채워가는 상황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던 필자에게 비로자나불은 묻고 있는듯 했다. ‘너는 지금 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너의 수많은 불보살들을 보고 있느냐’고 말이다. 만약 우리가 가깝게 또는 멀리 있는 우리 주변의 모든 인연들을 불보살의 발현으로 볼 수 없다면, 비로자나불은 가슴이 무척 아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며, 비로자나불의 아파하는 마음이 필자의 마음에도 전해지고 있는듯 마음이 아려왔다. 불교 경전을 그림으로 옮기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깨달음의 기회를 주고 싶었을 700년전 그 고려 화공의 재미있는 상상력과 묵묵히 만오천불을 화폭에 담아 내었을 그의 깊은 신심에 필자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따뜻해졌다.
불심으로 역경을 이겨내고자 했던 고려인들 그리고 고려불화
고려불화가 찬란하게 빛났던 당시의 고려는 원나라부터의 내정 간섭이 극에 달했던 어려운 시기였다. 1306년 시주 권복수는 “전하가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기원하면 이 아미타여래도를 만듭니다”라는 문구를 자신의 작품에 담았는데, 그 당시 고려의 충렬왕과 충선왕은 원나라의 볼모가 되어, 고려가 아닌 원나라에서 교지를 통해 고려를 통치하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30년 동안 몽고와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고려의 장수들은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려고 했는데, 이러한 고려 장수의 염원은 고려 나한도에 잘 담겨져 있다. 진주를 만드는 상처들이라는 수필집을 예전에 선물 받았던 적이 있다. 진주를 만드는 상처들…책 제목이 눈이 자꾸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불교가 온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그 당시 불화는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인기있는 소재였고, 불화의 활발한 창작활동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떵게, 그리고 왜 고려불화는 중국이나 일본의 불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미학적 우위를 이룩할 수 있었을까? 고려 불화의 탁월한 미학적 경지는 어쩌면 오직 불심을 통해 시대적 난국을 극복하고,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하루 빨리 좋은 세상이 오기를 염원했던 고려인들의 처절함과 절박함을 반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직 염원만으로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킬 수는 없다. 고려의 예술인들은 탁월한 미적 감각과 기술을 겸비하고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조화가 되어 고려불화라는 위대한 미학이 완성된 것이다.
재료를 알고 자유자재 했던 고려의 화공들
고려의 화공들은 재료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사용했던 고도로 숙련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700년이 지난 후에도 색의 보존상태가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려불화가 바로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조이락 화가의 시연을 통해 은은하고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어 냈던 고려 화공들의 지혜와 기술을 엿볼 수 있었다. 유화물감이나 수성물감과 달리 석채를 사용했던 고려불화에서는 색을 섞어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치 중세 미술에서 광물질에서 추출한 색과 계란 노른자를 섞어 색을 표현했던 것처럼, 고려불화는 납, 수은, 구리, 금과 같은 천연 광물질에서 추출한 천연색을 아교와 섞어 사용했다. 중세의 미술작품들이 나무 판넬 위에 그림을 그렸던 것과 달리, 고려불화는 비단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속이 비치는 얇은 비단의 특성을 활용해 배채법이라는 기법을 사용했다. 바탕색을 비롯한 대부분의 색들은 그림의 뒷면에서 색을 올렸는데, 그림을 돌려보면 그 효과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앞면의 윤곽선은 선명하게 살아 있고 가장 중요한 효과라고 할 수 있는 비단의 얇은 면을 통해 배어 나오는 은은한 색감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 앞면에서는 윤곽선이나 미세한 부분을 보강하는 원색칠의 도드라져 보이는 효과를 통해 화면의 사실감을 극대화 했다고 한다. 재료의 특성상 원색만이 사용되었던 고려불화에서 혼합색인 부처의 피부색을 만드는 것은 풀어야 할 숙제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의 화공들은 연백을 뒤에서 배채하고, 황금으로 앞에서 금니 처리했다고 한다. 고려불화의 전통 제작방식과 재료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작가 조이락은 실재 금과 광물질에서 추출한 석채를 사용하고 있었다. 배채법을 이용해 다채롭고 다양한 색감을 표현해 내는 고려불화는 물감과 아교의 비율, 어느 정도의 농도로, 또 어떠한 환경에서 채색을 하는지 등 경험을 통해서 채득한 화공의 숙련된 기법과 기술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들로 작용한다고 한다. 여기에 고려불화를 그려내는 화공의 초정밀 기술이 더해져 얇거나 굵은 곳 없이 일정하게 뻗어 있는 고려불화의 금니선들과 투명한 질감표현을 재현하기 위해 아직도 가야 할 길도, 해야 할 공부도 많다며 작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수행이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수행인 불화를 그리는 21세기 대한민국 화공들의 몸에 배어 있는 겸손함의 표현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한 번 만났을 때보다 두 번 만났을 때 더 정이 가고, 만나면 만날수록 또 보고 싶고 또 자꾸 만나고 싶은 그런 진국같은 사람이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빠르고 편리함에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자극적인 맛, 향기, 이미지들을 좋아한다. 그들의 탓이 아니다. 자극적인 일상에 노출되어 있던 우리의 뇌는 일정량 이상의 높은 자극적 신호가 아니면 반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이락 작가와 티벳 하우스의 탱화전시를 보고 왔다. 고려불화를 전승하고 있는 작가에게 티벳의 탱화는 오늘 어디까지 와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필자는 티벳 탱화의 다이나믹한 구성과 화려함, 현란한 기술에 비해, 처음 만났던 고려불화에선 어딘지 모를 허전함을 조금 느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난 고려불화에서 필자는 처음 만남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무한한 평화와 평온이 번져 나오는 따뜻함을 느꼈다. 평일 오후 텅 빈 전시장은 알 수 없는 따듯한 에너지로 넘실거렸고, 부처의 위엄 뒤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따뜻한 숨결을 느껴졌다. 차의 깊은 맛을 알기 위해서는 좋은 차를 자꾸 마셔봐야 한다고 한다. 만나면 만날수록 또 만나고 싶은 그런 진국같은 사람처럼 고려불화는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의 아름다운 내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런 그림이었다. 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거친 감성을 순화시켜 주는 고려불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더욱 많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