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시대 게재 작품
화촉동방의 구술시험
글: 최 기 상
그 날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아침, 여덟 살쯤으로 기억되는 겨울에 다섯 살 터울인 형의 뒤를 따라서 시집간 누나 집을 다녀오기로 정해진 날이었다. 귀에는 토끼털 귀 덮개를 쓰고 손에는 벙어리장갑을 꼈다. 한 사람도 걸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소나무 숲과 논 밭길에서 조그만 개울을 건널 때부터 함박눈이 내리고 눈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골길은 마치 동화속의 먼 나라처럼 신비하고 조금은 두려운 길이었다.
한 나절 쯤 걸어서 주저앉고 싶은 고통을 억제하며 겨우 누나의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는 발등에 덮인 눈이 녹아내려 버선발을 적시고 얼어서 발바닥과 손은 모두 감각이 없어져 울퉁불퉁한 시골길의 높낮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예기치 못한 시간에 눈 오는 대문 밖에서 들리는 동생들의 음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누나는 버선발로 황급히 달려 나와서 우리 형제를 얼싸 안아다가 길쌈하면서 쓰던 화롯불을 인두로 헤집고 동생들의 언 손과 발을 주물러 녹여 주면서 반가움인지 서러움인지 알 수 없는 눈물로 오열하면서 숨죽여 울고 또 울고 있었다. 얼었던 손과 발이 화롯불 온기에 차츰 녹여지자 뼛속까지 가렵고 저리며 바늘로 찌르듯 아파서 나는 누나의 얼굴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신음하면서도 속마음에는 매일 싸우면서 지내던 동생들도 시집을 가면 이렇게 좋아지고 반가우면 그토록 우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신 수단이 없던 그 시절, 출가한 딸의 안부가 궁금하던 어머니는 누나의 생일에 시루떡을 마련하여 형제를 보내신 거라고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누나의 결혼식이 치러지던 날.
큰방에는 젊은 친척들이 신랑의 호된 신고식을 위하여 홍두께와 방망이를 들고 와서 재치문답의 시험을 치르며 으름장을 놓았고 수시로 나오는 술상에는 젓가락 장단을 두들기며 노래판이 깊은 밤까지 열리는데 노래를 잘 부르지 못 한 죄(?)로 신랑은 얼마나 맞았는지 엉덩이가 부르터져 바로 앉지를 못했다. 하객들이 모두 떠난 뒤에 손가락에 침을 발라 안방의 창문에 구멍을 내고 신방의 동정을 엿보던 말(馬)만 한 처녀들이 혼주(婚主)의 불호령에 혼쭐이 나서 킬킬거리고 도망간 화촉동방에서 신랑이 근엄하게 처음으로 신부를 향하여 물어 본 한마디 말…….
“여자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설명 해 보시요”
“ --- ?”
신부는 그때, 재판관의 형량 선고보다 더 무서운 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된 것이다. 무지에 대한 형벌이 독수공방으로 집행되는 실형(實刑)기간에 두 동생이 찾아왔으나 자신이 당한 고통을 하소연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신혼 후에 처음 찾아온 심정적 우군(友軍)인 살붙이를 만나는 반가움으로 그토록 울었을 것이다.
새벽닭이 울면 질그릇 물동이로 마을 복판의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다가 두 세 개의 큰 항아리에 물을 채워두고 군불을 지펴서 가족의 세숫물을 데워 놓고는 아침을 준비하는 것으로 열여섯 살 신부의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가족의 빨래와 길쌈도 누나의 몫이며 어느 겨울에는 지난밤의 강추위로 우물가에 온통 빙판이 되어 물동이를 이려다가 넘어져 온몸에 피멍이 들고 물동이 사금파리가 팔목에 큰 상처를 내어 피투성이가 된 몰골이었지만 “칠칠맞아 아까운 물동이만 깨는 철부지 새댁”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감추려고 팔목의 상처를 숨기고 살아온 고난의 시집살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 온 것이다.
한 구절의 구술시험으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신부에게는 구제받을 어떤 방법도 마련되지 못하는 절대적 봉건사회가 불과 60여 년 전의 보편적 사회현실이었던 것이다. 혼수품이나 가문 등 무수한 의외의 조건들이 암초로 감춰진 결혼이라는 지뢰밭 길을 걸어가면서 그 길이 여자가 사람 되기 위하여 당연히 가야 할 시련의 과정으로 믿고 살아온 것이었다.
애끓는 사랑을 고백 해 보지도 못하고 저리고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참고 기다려 온 5년의 세월. 임이 오시라라는 환상이 스치면 미리 발밑에 떨어져 붉은 융단을 만들어 깔고 돌아서는 임에게 마지막 모습마저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소원하여 추위를 이기고 송이송이 떨어져 나무에 있을 때 보다 땅에서 고혹적으로 아름답게 다시 핀다는 비련의 동백꽃 사랑이 어찌 누나 한 사람 뿐이었을까?
누나에게 있어서 학문의 기회가 주어지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던 신(神)은 지극한 인종(忍從)과 화평의 마음을 가슴에 채워 세상에 내어보냈을 것으로 믿는 것은, 그 후로도 험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시댁 식구를 단 한 번도 미워하거나 욕하는 말을 나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세월이 흐르면 인정도 흐르는 건가, 5년여의 인고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웃의 여론은 배심원이 되어 만장일치로 변호가 되었고 공방에서 풀려나 애정의 황금기를 맞고 일남사녀의 가정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양반 집 새 아씨 답지 않게 다부진 살림 솜씨와 봉건사회의 불합리한 전통을 아프게 느낀 자형은 전통적 가부장제도의 질서를 바꾸고 지난날 자신의 처신을 속죄라도 하듯이 아내에게 한마디의 욕설이나 불평을 말하지 않고 거들어주는 행복한 반려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애증의 한이 서린 외로운 초막집에 살며 50대 중반에 사별한 남편을 그리어 “가난했어도 당신 그늘에서 살던 때가 지금보다 더 행복했다.” 고 독백하고 찾아간 남편의 묘지에서 잡초를 하나씩 뽑던 손으로 눈물을 훔치던 얼굴에는 황토 흙빛이 석양에 젖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명절이나 좋은날이면 어김없이 제일 먼저 남편의 묘소를 찾아 두 손 모으고 기도 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천사의 방언으로 사랑의 메시지로 가슴 깊은 곳에 메아리쳐 오는 것이다.
미움도 동전의 양면처럼 또 다른 사랑의 얼굴임을 나는 처음으로 누나의 처지에서 배웠고 진정한 사랑이란 오랜 참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신비한 보물이라는 것도..
*이글은 사하문학 봄 호에 산문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바보
바라만 보아도 가슴 떨리는 그대 모습
보고 싶어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
부모
부서진 삶을 끌어안아 지치고 힘겨운 나날
모든 알맹이는 다 내어주고 껍데기만 남은 조가비.
거울
거짓으로 꾸민 얼굴 저 혼자 도취되어
울렁인 마음으로 백설공주 닮았다네.
동시: 고추잠자리
수수깡 콩밭위에 고추잠자리
억새꽃 은빛미녀 춤을 추는데
연분홍 립스틱에 망사 옷 날개
애꾸눈
애꿎은 그리움이 그 무슨 죄가 되어
꾸밈새 서툴러도 청춘은 꽃밭인데
눈물은 사랑의 호수 마를 날이 없네요.
산호섬
산자락 풀잎마다 하늘빛 맑은 이슬
호수의 속살처럼 결마다 고운 눈매
섬 처녀 설레는 가슴 꽃망울로 부푸네
연하장
연연해 속 태운 정 꽃그림 그려 넣고
하늘빛 닮은 소망 키스로 봉함해 둔
장밋빛 꿈의 연서는 장롱 속에 잠자네.
배수지진(背水之陣)
배 지난자리 흔적은 없어도 임은 떠나고
수평선에 별은 떨어져도 자취가 없는데
지나간 세월 뒤에 아쉬움은 남는가
진종일 그대 생각에 달 기우는 줄 몰랐네.
등대지기
비바람 드샌 날에만
눈을 부릅뜨고 일어서는 것은
모진 팔자로 태어 났나보다.
창자 뒤틀리는 현기증
물 한 방울도 모두 토해낸 배 멀미에
비로소
손 내미는 맑은 눈물
피를 뽑아서 불을 밝히는 등대에
성난 물결 잠들고
바람 그치는 날
구름은 갈매기들 불러 모아 하늘에 수묵화를 그린다.
카사노바
카드 섹션처럼 화려한 변신
사랑을 위해서 천재적 지혜를 동원하고
노련한 성적 가술로 여성을 사로잡는
바람둥이, 희대(稀代)의 명인 카사노바여!
카오스 신비처럼 끝없는 모험심에
사랑에 목마른 여성을 얼마나 울렸을까
노코멘트(no comment)의 천재성이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고
바른 삶 아예 접어두던 자유라는 이름의 방종
카리스마 넘치는 학자의 명성이
사련(邪戀)의 함정 속에 탕진한 인생이력(履歷)
노골적 환락의 도구로 전락한 지성이여!
바람기 시드는 날 자유도 끝이었을까.
몽당연필
몽룡이 춘향보고 상사병 발작허니
당헐눔 없는권세 사또집 자제렸다
연서로 휘갈겨쓴 쪽지를 보냇넌디
필설로 당할소냐 당장에 거덜났지.
몽롱한 취중작태 이몽룡 행사보소
당장에 청사초롱 디밀고 덥쳤는디
연지에 곤지바른 춘향이 쉑시헌몸
필사로 얼싸안고 운우에 푹빠졌네.
몽정도 감당못할 청춘에 이별이라
당연히 사주단자 까맣게 잊어먹고
연모도 씰데엄시 수청을 강요받아
필사의 곤장매질 사또집 원귀될라
몽매에 잊지못할 이도령 거지형색
당연히 어사출도 연회장 들이닦쳐
연꽃잎 이슬같던 춘향이 큰칼벗고
필생의 일부종사 월매집 경사로세 ㅋㅋㅋㅋ
인칭대명사(人稱代名詞)
인적 끊긴
사념(思念)의 광야에서
칭얼대며 부르고 싶은
이름 하나
대하소설 같은
옛 이야기들 아득히 지나가고
명경(明鏡) 같은 달빛
휑하니 바라다 보이는 황야에
사랑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은
오직 하나의 이름 그것은 “당신”~~
백치 아다다*
백옥 같은 살결은 누굴 위한 치장일까
치욕도 참아내고 미움도 가로막아
아까운 여린 꿈이 향기로 꿈틀대도
다다른 곳 황무지라 가련한 여인 되어
다 헤진 가슴으로 바다에 던진 비운의 넋.
*백치아다다 - 문주란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볼에 스칠때
검은머리 금비녀에 다홍치마 어여뻐라
꽃가마에 미소짓는 말 못하는 아다다여
차라리 모를것을 짧은날의 그 행복
가슴에 못박고서 떠나버린 님 그리워
별아래 울며새는 검은눈의 아다다여
얄궂은 운명아래 맑은순정 보람없이
비둘기의 깨어진 꿈 풀잎뽑아 입에물고
보금자리 쫓겨가는 애처러운 아다다여
산 넘어 바다 건너 행복찾아 어데갔나
말하라 바닷물결 보았는가 갈매기떼
간곳이 어디메뇨 대답 없는 아다다여
하얀 눈이 오면(동시)
하얀눈이 나리던날 우리누나 시집가네
얀정없이 뿌리치고 신혼여행 떠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데 우는건가 웃는건가
이세상에 오누이로 알콩달콩 살았는데
오늘따라 천사얼굴 얄미웁게 사라지고
면사포를 질질끌고 나비처럼 날아가요..
임자 없는 들국
임이라 부르기는 아직 부끄러운데
자괴심 들 때 마다 얼굴만 붉힙니다
없는 듯 수시로 떠오르는 임의 미소
는실난실 꿈속에만 꽃길을 거닐며
들국화 짙은 향기 영혼을 물들이고
국화꽃 필 녘이면 더욱 그립습니다.
당신은 접시꽃
당신이 머물다 간 그 어느 공간마다
신선한 향 내음이 고요히 배어있어
은근히 사로잡는 살가운 추억인데
접시꽃 화판열고 꽃가루 묻어날 듯
시공간 채워 주는 느는 정 고마워서
꽃피고 새우는 날 날고파 설레이네.
대 지진 쓰나미
대저 인생은 무엇이며 문화란 무엇인가
지난세월 무수한 고난을 딛고 일궈낸 문명이
진취적인 공익보다는 아집과 탐욕에 병들지 않았는지
쓰레기로 밀려가는 삶의 핏자국을 지켜보며
나누지 못하고 움켜쥔 욕망의 부스러기들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품으라는 신(神)의 회초리는 아닌지.
한 장 남은 달력
한(恨)도 미련도 이제는 내려놓자
장밋빛 꿈들도 빛바랜 낙엽 되어
남루한 누더기로 나부끼고 있는데
은어(隱語)처럼 불러 보던 그 여인도 소식 없고
달아난 세월의 끝자락에 매달려
역류하는 회한의 파도에 가슴이 시려온다.
내 마음의 풍차
내리막길 끝자락의 여정(旅程)에 다다르면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을 물으련다
음덕을 베풀지 못하고 움켜쥔 세월자락에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곰삭은 밧줄 되어
풍진(風塵) 세상에 외로운 한 잎 낙엽 되는 날
차마 말 못한 한 마디 <그래도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갈잎은 떨어지고
갈무리 하지 못한 회한에 찬 서리 내려오면
잎새에 적어보던 뜨거운 사랑의 흔적들
은행잎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떨이처럼 덤으로 넘겨줄 사랑 이었나
어둠이 내려오는 산등성 바라보며
지난 날 기억들이 회전목마 되어
고슴도치 웅크린 사랑이 가슴에 찔려 온다
엄마, 그 이름 석자
엄마라 불러보던 더없이 좋은 이름
마음만 서러워서 꿈에도 그립니다.
그 깊던 속마음을 모르고 살던 세월
이제는 눈물로 씻을 수 없는 불효를
름름한 교훈으로 살갑게 다독이고
석류 알 가슴 열 듯 뜨겁게 사랑하신
자애로운 손길이 지금도 선합니다.
내 못 다한 이야기
내민 손 뿌리치고 돌아 선 그 마음을
못 견딜 아픔일 줄 이전엔 몰랐었네
다 헤진 미련 한 줌 끝내는 얼싸안고
한물 간 이제 와서 뉘우쳐 무얼 하리
이대로 지는 황혼 너무나 아쉬워서
야위는 추억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으며 사진첩 넘깁니다.
부치지 못 한 편지
부치려다 접어두고 뜯어서 고쳐 쓰고
치미는 격정(激情)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지웠다 다시쓰길 몇 번을 반복 했나
못 풀어 얽힌 사연 앞 뒷말 바꿔 봐도
한사코 울렁거려 진정이 되질 않아
편지 한 장 전하는게 이토록 어려울 줄
지나고 돌아보니 지금도 아득해요
그대 눈부시던 사랑
그젖은 눈가에 그리움 피어오르면
대놓고 못했던 말 혼자서 뇌어본다
눈구름 흘러가는 그 어느 하늘 끝에
부스스 눈을 뜨는 연모에 애타던 정
시공간(視空間) 채워가는 무채색(無彩色) 수채화로
던져버린 환영이 또다시 되살아서
사랑의 꽃잎으로 개화를 서두르면
낭자(狼藉)한 혈흔(血痕) 같은 얼룩진 황혼일세
첫댓글 한 작품 한 작품 가슴을 울립니다
마치 누님의 사랑이 작품마다 향기로
배어 있는 듯 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글도
인격이 동반되지 않으면
작품이 힘을 잃게됨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참으로 빛고운 마음에서 흘러내시는
작품들
모쪼록 많은 곳으로 흘러 상한 영혼들을
보듬고 새롭게 걸어 갈 힘을 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과분하신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참 많은 회원들이 다녀가지만 대충 제목만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거듭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