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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76. [역경의 열매] 김인숙 (1-16) ‘아동이 행복한 세상 만들기’… 거룩한 소명에 순종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된 지 30년 아동 인권 인식 등 큰 변화 있었지만 갈 길 멀어…아직 끝나지 않은 소명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의 본부에서 40여년간 아동인권을 위해 걸어온 날들을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2019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이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지금부터 30년 6개월 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처음 접했다. 이 협약은 마치 하늘이 내린 사명인 것처럼 내게 다가왔다. 하나의 숙제이자 동시에 행운처럼 말이다.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기 6개월 전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접한 건 내가 국제비영리민간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 속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세이브더칠드런은 100여개국에서 아동 권리 증진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다. 해마다 연맹총회를 개최하고 아동 복지증진과 인권옹호 방향을 설정하며 전략적 대응을 모색한다. 1989년 세이브더칠드런 연맹총회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그해 총회가 특별했던 건 총회에 앞서 아동권리증진을 위한 별도의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기 때문이다. 참석자 중 한국인은 내가 유일했다.
콘퍼런스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틀간 진행됐는데 6개월 후 유엔에서 채택할 유엔아동권리협약도 이때 소개됐다. 협약이 ‘미사여구가 아닌 실현돼야 할 국제적인 약속’임도 이때 강조됐다. 당시 경이로웠던 건 그곳에서 만난 아동들이다. 아동권리 실현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한 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성인 아동전문가만이 아니었다. 아동 스스로 자기 생각을 춤 노래 언어로 표현하는 다양한 퍼포먼스가 이어졌는데, 지금껏 익숙하게 봐온 모습이 아니었다. 이들은 콘퍼런스 주최 측이 키워드로 제시한 ‘자유’와 ‘존엄’이라는 인권의 가치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충격이었다. 머리카락 색이나 피부색 등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어른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거리낌 없는 모습이 우리네와 많이 달라 경이롭기만 했다. 이틀간의 콘퍼런스에 이어 열린 연맹총회 역시 주제는 아동 인권 실현이었다. 모두 ‘아동의 권리는 반드시 실현되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천명하고 동의했다.
스톡홀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 일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끄신 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이 내게 내려준 사명임을 직감했다. ‘내가 너를 고아처럼 홀로 두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귀국했다.
어느새 30년이 지나 올해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30주년을 기념하는 포럼에 참석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처음 알게 해 준 세이브더칠드런과 현재 몸담고 일하는 국제아동인권센터, 두 기관이 함께 준비한 포럼이다. 포럼에선 유엔아동권리협약의 30년을 이야기하고 전망을 논하며, ‘아동폭력 없는 한반도 만들기’란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분명 세상을 바꿨고 아동 신분에도 변화를 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 함께 아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 앞에 새로운 다짐을 한 시간이었다.
포럼 이후 나는 예기치 못한 요청을 받았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기고 요청이다. 올해가 유엔아동권리협약 30주년이고, 이를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주인공의 역할을 녹여내 보자는 제안에 당황했다. 도전하겠다는 답을 보내기까지 닷새가 걸렸다. 다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명이 진행형이기에 도전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 사명 실천의 기회를 주셨음을 믿고 다만 순종할 따름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 '아동이 행복한 세상 만들기'… 거룩한 소명에 순종
* [역경의 열매] 김인숙 (2) 믿음의 가문 4대손… 신앙을 유산으로 받다
* [역경의 열매] 김인숙 (3) 8살에 집안살림 도맡자 동네선 "친엄마 맞냐"
* [역경의 열매] 김인숙 (4) 전학 간 학교서 68점 받자 서울아이들 대놓고 비아냥
* [역경의 열매] 김인숙 (5) 나를 아동인권가로 키운 건 '가정·교회·학교'였다
* [역경의 열매] 김인숙 (6) 다섯 남매, 주님 은혜로 모두 원하는 중학교 입학
* [역경의 열매] 김인숙 (7) "아이는 모두 다르다"… 교회서 아동인권 감수성 배워
* [역경의 열매] 김인숙 (8) 중학교 시절 받았던 배려·존중… 내 안에 인권 싹 터
* [역경의 열매] 김인숙 (9) 늘 꿈꾸던 이웃 위해 '변화 인자' 되는 길 찾다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0) 낙후된 농촌서 조정역 맡아 지역사회 개발에 앞장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1) 아이 스스로 삶에 목소리 내도록 '아동 힘 키우기' 돌입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2) 남편·두 아들 응원에… 온 세계 다니며 아동 인권 공부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3) 경제 발전 이룬 한국, '세이브더칠드런 한국' 세워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4) 유엔 "한국, 아동인권 인식 낮다" 권고문에…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5) '가장 작은 자를 위한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선언
* [역경의 열매] 김인숙 (16·끝) 내 여생의 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약력=1942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이화여대 불어불문학 학사·영어교육학 석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사회사업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수서종합사회복지관장,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부회장, 서울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대통령 표창(2002),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포장(2012) 수상.
***[역경의 열매] 김인숙 (2) 믿음의 가문 4대손… 신앙을 유산으로 받다
진남포서 제일 큰 예배당 봉헌한 증조모 위기 있을 때마다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왼쪽 네번째)가 2017년 9월 서울 성동구 시온교회에서 열린 ‘97호 북한교회재건 현판식’에 참여한 모습. 시온교회 안용선 목사(세번째)는 김 이사의 맏아들이다. 기독교타임즈 제공
지난 11월 20일 열린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30주년 기념 포럼엔 북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북한말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옮기는 활동을 함께한 탈북 청소년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이런 협약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특히 ‘아동학대’란 단어가 생소했다”고 말해 참석자 모두 놀랐다. 또 “북한 사회는 종교가 없으므로 종교란 단어를 쓸 때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내 신앙의 뿌리는 북한에 있다. 나는 1942년 평안남도 진남포 믿음의 가문 4대손으로 태어났다. ‘평양과 진남포 지역에서 선교하던 광성학교 설립자 홀 선교사의 전도로 개종한 김보안 권사는 큰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진남포 중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1913년 김 권사가 벽돌 건물의 예배당을 봉헌했다. 그 기념으로 교회마당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어릴 때 어머니에게 늘 듣던 이야기다. 1913년 벽돌 건물의 예배당을 봉헌한 김보안 권사는 어머니의 할머니이자 내 증조할머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나와 우리 형제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당시 감리교는 북한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교단이었다. 할머니가 예배당을 봉헌한 중앙교회는 진남포에서 가장 큰 교회였다. 나는 그 교회 부설 유치원에 다니며 교회 마당을 우리 집 마당으로 삼아 뛰놀며 자랐다.
외할아버지는 포목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이자 진남포에서 첫째가는 재력가였다. 북한 사회에서 우리 가문은 ‘부르주아’라 불리며 감시를 받았다. 사회가 점점 억압적으로 변하자 외할아버지는 출가한 맏딸(어머니)만 두고 48년 온 가족과 먼저 월남했다. 어머니는 시댁 식구와 진남포에 남았다. 아버지는 이유 없이 경찰서에 소환되는 날이 잦아졌다. 외부에선 아버지 사업에 개입하고 공장에 쌓아둔 물건을 압수했다. 아버지가 경찰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날도 생겼다.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어머니가 애타게 기도하면 죄 없이 경찰에 소환됐던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처음 기도를 듣는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경찰서에 가면 사람은 돌아왔지만, 재산은 압수됐다. 부모님은 밤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으며 시국을 살폈다. 우리 가족은 1950년 1·4 후퇴 때 외할아버지가 진남포에 남긴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올랐다. 그때가 8살이었다.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이 모습이 당시 우리의 모습이었다. 최근엔 추상미 감독이 만든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전쟁 직후 북한 정부가 전쟁고아 1500명을 폴란드로 보내는 모습에서 나와 오빠, 동생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과 우리가 달랐던 건 그때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능력도, 선택도 아니었다. 은혜요 은총이었다. 내가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되는 이유다.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만민에 부어지면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요 2:28)고 했다. 내겐 꿈이 있다. 머잖아 북한 곳곳에 무너진 교회가 다시 세워지는 꿈이다. 감리교 서부연회는 ‘북한교회 재건’을 핵심사업으로 삼고 있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2017년 9월 4일 서부연회와 97호 북한교회 재건 현판식을 했다. 1913년 증조할머니가 봉헌한 진남포 비석리의 중앙교회를 재건하는 사업이다. 이 일에 시온교회(안용선 목사)가 나섰다. 안 목사는 내 맏아들이자 김보안 권사의 5대손이다. 이후 온 교회와 온 가족이 같은 마음을 품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3) 8살에 집안살림 도맡자 동네선 “친엄마 맞냐”
전쟁 직후인 데다 남아선호 심한 시절… 아동인권 꿈도 못꾸고 불평한 적 없어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앞줄 왼쪽 두번째)와 가족들이 1997년 9월 어머니 생신을 맞아 서울에 모인 모습. 어머니(앞줄 가운데)와 5남매가 모두 모였다.
나는 남아선호사상이 일반적이던 시대의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어느 가정이든 아들과 딸을 차별하며 키웠다. 이상할 것도 없고, 분노할 일도 아니었다. 전쟁 직후였고 피난 시절이었다. 생존이 당면 과제였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고향에 두고 왔더라도 당장은 피난민이었고 가난했다.
우리 형제는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아래로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다. 오빠는 12살, 나는 8살이었다. 막내 남동생은 돌이 채 되지 않은 아기였다. 피란 통에 셋째가 병에 걸려 부모님은 그 아이를 살리는 일에 매달렸다. 결국 한 살도 안 된 막내는 8살 큰 누나인 내게 맡겨졌다. 추운 겨울에도 아기 옷과 기저귀를 근처 냇가로 가져다 빨았다. 장날이 되면 어머니를 대신해 10리 길을 걸어 장에서 쌀을 사고 찬거리를 샀다. 쌀은 머리에 이고 찬거리는 손에 든 채 다시 시골길을 걸어왔다.
무거운 물건을 머리에 이고 다녀서인지 다섯 형제 중 가장 키가 작고 목도 짧다. 동네 사람들은 냇가에서 빨래하고 장 보러 다니는 작은 여자아이를 보며 사정도 모른 채 “엄마가 너를 낳았니”라고 물었다. 친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아동 학대에 노동 착취라고 문제 될 법한 일이다. 모든 아이가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순응하는 기질인 것 같다. 한 번도 “왜 나만 시켜요. 나도 놀고 싶어요”란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친할아버지는 전쟁 전 북한에서 납치당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 할머니는 피란 시절 우리 집에 함께 살았다. 온 가족에겐 할머니가 최우선 배려 대상이었다. ‘아동 최상 이익의 원칙’ 같은 아동인권 개념은 꿈도 꾸지 못한 시대다. 할머니 다음엔 아버지, 그다음 오빠, 아픈 남동생, 막내 남동생, 여동생 순이었다. 마지막이 나와 어머니였다. 어린 내가 어머니와 같은 격일 순 없으나 역할에 있어 그랬다.
나는 어머니가 하는 일을 거의 대신해냈다. 어머니가 외출하면 막내를 업고 밥을 짓고 찬거리를 준비했다. 어머니가 오면 곧바로 식구들이 밥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 당시 나는 어머니가 죽는 게 가장 두려웠다. 어머니 귀가가 늦어지면 동생을 업고 좌불안석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절대적이라는 생각,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하다. 진리처럼 내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아동인권 옹호가가 될 기미가 전혀 없는 아이였다. 나의 권리를 느껴본 적도, 주장해 본 적도 전혀 없다. 그런데 아동인권에 대해 슬며시 깨달음을 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된다.
몸이 아주 아프던 셋째가 부모님 기도와 정성으로 살아났다. 지식인이었고 생활력이 강했던 부모님은 미군 부대를 찾아가 ‘마이신’이란 약을 구해와 치료했다. 셋째는 예민했고 언어구사력이 탁월했다. 피란 시절 살던 셋집은 온돌방이지만 난방이 잘 안 되었다. 아랫목에 한 사람 앉을 만큼만 온기가 있었다. 당연히 할머니 자리였다. 긴 병치레를 하고 난 동생은 매일 할머니와 딱 붙어 앉았다. 어느 날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던 동생이 또박또박 말했다. “할머니, 이제 할머니 집으로 가시라요.”
이북에서 피란 온 우리는 어른이고 아이고 이북 사투리를 썼다. 동생이 할머니에게 감히 명령한 것이다. 이 한 마디가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에게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완전 죄인이 됐다.
아이의 맥락을 보면 이건 아동권리선언이다. ‘할머니, 어린 나도 너무 추워요. 따뜻한 자리 독차지하지 말고 공평하게 나눠요.’ 아니면 “할머니 집으로 가시라요.”
***[역경의 열매] 김인숙 (4) 전학 간 학교서 68점 받자 서울아이들 대놓고 비아냥
부반장에 뽑히고 친구들과 친해질 무렵 피란민 위한 서울학교 분교 세워져 전학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정착하면서 가족 모임 때마다 예배를 드렸다. 어머니(왼쪽)가 아버지(왼쪽 두번째) 등 온 가족 앞에서 예배를 이끄는 모습.
나는 전쟁으로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1학기 과정을 잃었다. 1학년 과정을 마칠 무렵 피란길에 올랐는데, 부산에서 다시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3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그곳 친구들은 분명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는데도 나와 너무 달랐다. 특히 억양과 사용하는 단어가 달랐다. 그럼에도 몇 달 만에 부산 토박이처럼 사투리로 친구들과 소통하며 친해졌다. 그런 나를 보고 가족은 신기해했다.
뭐든 열심히 했고 잘하려 애썼다. 3학년 과정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부반장에 선출됐다. 학교생활이 즐겁고 안정될 무렵, 어머니는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부산으로 피란 온 아이들을 위해 서울 학교의 분교가 세워졌단다. 나와 동생들은 분교로 전학 갔다. 서울 학교의 분교는 천막 학교였다.
짧지만 우정을 쌓으며 즐거웠던 부산 친구들과 헤어지고 5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전학 간 첫날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할 아픈 기억으로 갖고 있다. 천막 교실에서 만난 친구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새 친구를 만날 때 갖는 호기심이나 배려, 친절의 눈빛은 없었다. 부산 아이들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당혹스러웠다. 같은 한국 아이들인데 완전 다르게 느껴졌다. 담임교사가 나를 소개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나진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이전 학교의 부반장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일제고사를 치렀다. 시험지를 받아본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배운 적이 없는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그 시험에서 68점을 받았다. 그런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절망스러웠다. 당찬 서울 아이들은 “쟤가 부반장이었대”라며 대놓고 무시했다.
나와 똑같이 아동기를 겪는 아이들이 어떻게 친구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었겠나. 내가 누구고, 어떤 환경에 태어났으며 얼마나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살았는지…. 전쟁으로 모든 걸 빼앗긴 채 한반도 끝자락까지 쫓겨온 서럽고 아픈 아이라는 걸 친구들은 알 수 없었으리라.
전쟁 전에 월남해 서울에서 살던 외삼촌들이 수소문해 우리 가족을 찾아냈다. 일가친척을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외할아버지가 납치당해 생사도 알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접했다. 우리 가족은 전쟁으로 고향과 재산, 집뿐 아니라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를 다 잃었다.
외삼촌들은 잔뜩 기죽은 조카들을 격려해주고 희망과 꿈을 심어줬다. 머잖아 서울에 가면 멋진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했다. 삼촌들이 사는 서울 집엔 농구 배구 등 재미난 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다고 했다. 길도 엄청 넓어서 자동차가 두 대씩 오간다고 했다. 4차선 도로가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서울은 건물과 거리도 번화하고 아름답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서울을 꿈꿨다.
부산 집 뒤쪽에 작은 동산이 있었다. 숙제하거나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을 때면 그곳에 올라가 나무 밑 그늘진 곳에 숨곤 했다. 침대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며 상상의 날개를 폈다. 나만의 비밀 장소였다. 거기 있으면 혼자가 아니란 느낌이 들어 소원을 아뢰곤 했다.
“서울은 멋진 곳이라는데 나도 거기서 살고 싶어요. 일가친척 모두 다시 만나 함께 살게 해 주세요.”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우리 가족은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결국 서울 중구 장충초등학교로 전학해 거기서 졸업장을 받았다.
북한에서 입학한 첫 번째 초등학교, 부산에 피란 내려와 들어갔던 부산초등학교, 세 번째 학교인 천막 학교, 마지막으로 장충초등학교. 파란만장한 초등학교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5) 나를 아동인권가로 키운 건 ‘가정·교회·학교’였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 들어 사용한다’는 신념 따르며 강하게 훈련한 것이 도움 돼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두 번째)가 1999년 서울 강남구 수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세이브더칠드런 스웨덴 담당자(첫 번째)와 아동인권교육 훈련을 하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란 말이 회자되지 않던 시절부터 지금껏 아동인권 국제NGO(비정부기구)에서 일했다. 아동인권을 삶과 일터에서 녹여내는 해외 전문가와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덕분에 한국에선 흔치 않은 아동인권 촉진자(facilitator)로 인정받았다.
1998년쯤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아동·청소년 복지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현장에 나올 때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우려를 평소에 많이 했던지라 흔쾌히 수락했다. 치열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 강의가 학생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간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터득한 교수법인 ‘촉진자 기법’을 활용해 토론과 워크숍 활동을 이끄는 게 신선했던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당시 강의한 주제는 아동인권과 아동복지, 아동안전, 아동인권과 사회문제 등이다. 산학협력교수로 시작한 대학 강의는 15년 정도 계속했다. 꽤 긴 시간을 대학에 드나들다 보니 교수들과 친분이 생겨 정보도 교환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게 됐다. 이들은 내가 어떻게 아동인권 전문가가 됐는지를 가장 궁금해 했다. 젊은 유학파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활동가인 내가 어떤 계기로 아동인권 전문가가 돼 대학 강의까지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활동했을 때는 아동인권이 대중에게 생소했던 시기가 아닌가.
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또 있다. 기자들이다. 어린이날이나 아동권리주간,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일 등 기념일이 다가오면 줄곧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질문 중에는 어떻게 아동인권 전문가가 됐는지, 어떻게 ‘아동인권의 대모’가 됐는지, 무슨 계기로 ‘아동인권 전도사’가 됐는지 등이 꼭 들어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을 준 적이 없다. 나는 아동인권 전문가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아동인권의 대모도 적절한 호칭이 아니라고 본다. 전도사처럼 아동인권을 열심히 알리고 전하는 사람은 맞는 것 같다. 나는 아동인권을 알리고 아이 편에서 편들어 주는 아동인권 옹호가의 한사람일 뿐이다. 이게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특별한 연구를 했다거나 학위를 받은 일이 없다. 단지 믿음의 가문에서 받은 가정교육에 교회마당을 집 마당처럼 밟으면서 받은 신앙교육,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나를 행복한 아동인권 옹호가로 만들었다. 학교 졸업 이후엔 훌륭한 일터로 인도돼 그곳에서 강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자신을 강하게 훈련하는 편이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들어 사용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나는 준비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교육환경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나 스스로 훈련하는 것은 자기 선택이고 결정이다. 이런 신념을 갖게 된 건 어떤 글에서 받은 영감 때문이다. 이젠 책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의 내용을 이해한 대로 옮겨본다.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 밑에서 두툼한 법전을 읽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법률 전문가가 되려나 봅니다’라고 물었다. 워싱턴은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어떻게 쓰실는지 모르니 성실히 준비할 따름입니다.’”
이제 이 지면에서 어떻게 아동인권 옹호가가 됐는지 말하려 한다. 내가 인권을 말하는 사람이 되는데 이바지한 3개의 아름다운 동산이 있다. 가정과 교회, 학교다. 다음 편부터는 이들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가 어떻게 배우고 성장했는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6) 다섯 남매, 주님 은혜로 모두 원하는 중학교 입학
개성의 명문 미션스쿨 졸업한 어머니… 높은 교육열로 자식들 모두 대학 보내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가족이 1984년 아버지 생신에 여동생 및 셋째 남동생 가족과 함께한 모습. 큰 오빠와 막내 가족이 이민 간 후엔 두 동생 가족과 함께 부모님 곁을 지켰다.
“주님의 동산 아름다운 산, 우리의 집은 아름답고 좋도다.… 주님이 계신 곳, 평화의 동산.” ‘주님의 동산’이란 이 찬양의 가사는 참 아름답고 영감을 준다. 한 가정을 이끄는 리더십은 부모에게 있다. 외적 리더십과 내적 리더십의 조화는 이 노랫말처럼 가정을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산으로 이끈다.
우리 집은 한국의 전통적 가정 형태를 유지했다. 아버지는 철저히 밖에서 활동했다. 경제권은 아버지께 있었다. 어머니는 살림과 자녀교육에 집중했다. 아버지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생각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멋쟁이였다. 일찍이 승마를 즐겼고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다. 당시 구하기 힘든 레코드판을 수집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취미를 즐겼다.
진남포에서 유력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개성의 명문 미션스쿨 졸업생이었다. 신앙 깊은 할머니 손에 키워져 믿음이 깊었다. 인자함과 겸손함으로 주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학업과 신앙을 연마한 어머니는 서울 유학을 꿈꿨다. 선교사들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고 본인도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하길 원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정직과 신용, 성실로 정확한 일 처리에 탁월함을 보이는 한 청년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어머니는 졸업 후 유학의 꿈을 접고 결혼해 3남2녀를 얻었다.
수많은 고비마다 구원의 손길을 느끼며 온 가족이 죽음의 피난길에서 살아남았다. 피란 생활을 하던 부산을 거쳐 서울에 안전하게 정착했다. 전쟁 직후 난민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교육열은 뜨거웠다. 당시는 학원이나 과외란 게 없던 시절이다. 반면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어떤 중학교에 입학하느냐가 한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로 여겨졌다. 당시는 중고등학교에도 등급이 있었다. 일류 중학교에 들어가면 같은 등급의 고등학교로 거의 진급했다. 대학 진입도 순조로웠다. 이 때문에 중학교 입학이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우리 집은 주님이 계신 곳, 기도가 있는 동산이었다. 나는 꼭 가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어머니도 기도했지만, 나 역시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소원을 아뢨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걸어서 학교로 오가는 길이 내 기도시간이 됐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란 여호수아의 확고한 고백이 우리 어머니 고백이고, 우리 가족 모두의 고백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다섯 남매는 모두 원하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까지 잘 마쳤다. 전쟁을 겪은 험난한 삶이었고 북한에 모든 것을 두고 온 난민 가정이었으나 우리 다섯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각각 주님이 예비하신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 자금 생각해도 이건 기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한국 사회는 늘 전쟁의 위협을 겪었다. 1970년대 초반이 특히 불안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때 이민의 길을 택했다. 우리 가정에도 이런 변화가 생겼다. 오빠 가족이 브라질 상파울루로, 막냇동생 가족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떠났다. 흔히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말하지만, 맏아들과 막내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각별했다. 갑자기 이산가족이 되는 느낌이 들어 너무 마음이 허전했지만, 부모님은 두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오빠가 떠났으니 내가 맏이 노릇을 제대로 해야 했다. 나는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둘째 여동생 및 셋째 남동생 내외와 부모님 노년이 복되고 형통하길 기도했다. 아버지는 87년 7월 별세했다. 홀로 된 어머니를 셋째 남동생이 신실한 아내와 함께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는 2004년 9월 하나님 나라로 떠나셨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7) “아이는 모두 다르다”… 교회서 아동인권 감수성 배워
“비교하면 경쟁하게 되고 차별하게 돼”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가 1978년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남편, 두 아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은 동향인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로 갔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 부산에서 임시로 천막을 치고 예배드리던 평양교회는 서울로 올라와 ‘시온교회’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교회엔 평양과 진남포 등지에서 살다 홀로 남하해 의지할 곳 없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예배 후 애찬 준비에 정성을 다했다. 교회에서 먹는 한 끼로 하루를 사는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국수 카레라이스 국밥 등으로 메뉴를 바꿔가며 외롭고 힘든 청년들을 챙겼다.
우리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모두 시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나는 시온교회 교회학교 초등부 1회 졸업생이다. 교회 중등부와 고등부를 거쳤고, 대학생이 된 후엔 교사와 중등부 부장, 고등부 부장을 했다. 평생 멘토인 한승호 목사님도 초등부 때 만났다.
한 목사님은 늘 성도들에게 삶의 기본을 가르쳤다. 이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사는 시작이라고 했다. 또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기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나는 ‘시온동산’이라 부르는 이 교회에서 삶의 기본을 배웠다.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교회에서 어머니의 헌신은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돕는 차원이 아니었다.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는 힘을 기르는 일이었다.
아동인권 감수성도 시온동산에서 키웠다. 자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란 깨우침도 이때 얻었다. 한 목사님은 “아이는 모두 다르다. 하나님이 아이들 하나하나에 준 달란트가 있다”고 했다. 비교하면 경쟁하게 되고, 경쟁하면 차별하게 된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건, 크리스천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다.
당시 나는 나처럼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와 시온교회에서 성장한 한 청년과 소꿉친구처럼 지냈다. 나보다 1년 6개월 먼저 태어났지만, 허물없는 친구로 지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의논했고, 항상 같이 다니며 서로 의지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중매가 들어왔다고 했다. 아버지 친구가 캐나다에서 의사로 일하는 지인이 프랑스어를 하는 여성을 찾는다며 나를 맺어주고 싶다고 했단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지, 언어 구사 여부로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게 결혼 조건이 된다는 게 화가 났다. 그 자리에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놀란 아버지는 누군지 물었고, 나는 소꿉친구 이름을 말했다.
아버지는 “사랑만으론 살 수 없단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군 복무 후 대학 3학년이었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사랑만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에겐 살아갈 능력과 자신도 있어요.”
처음엔 부모님은 물론 오빠까지 반대했지만, 결국 내 결정을 존중했다. 우린 1967년 결혼했다. 하나님은 69년에 첫아들을, 71년에 둘째 아들을 주셨다. 두 아들은 시온교회에서 영아세례를 받고 성장했다. 남편은 89년 시온교회 장로가 됐다. 교회에서 아동기를 보낸 사람이 장성해 장로가 된 첫 열매였다. 나는 시온동산에서 한 목사님 등 여러 어르신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고 성장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8) 중학교 시절 받았던 배려·존중… 내 안에 인권 싹 터
입학 시험날 함께 기도한 친구들 소원이었던 이화여중에 모두 합격… 자율 존중하는 최고 환경서 교육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왼쪽)가 1960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화여고 농구선수로 뛰고 있다.
어릴 때부터 기도를 듣는 하나님을 믿었다. 준비된 사람을 쓰는 하나님, 기도를 듣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내 삶의 기반이다.
나는 활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늘 뛰고 뛰어놀았다. 심부름 갈 때도 뛰었다. 어머니가 새벽에 동태찌개를 끓일 때 두부가 없으면 집에서 먼 가게로 내가 뛰어갔다. 냉장고도 없고 마트나 편의점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뛰었는지 두부를 사려는데 돈이 없었다. 분명 손에 들고 왔는데, 아뿔싸! 오던 길로 더 빨리 뛰어가 돈을 찾는다. 이때 반드시 기도했다. “주님, 돈 못 찾으면 엄마는 ‘덜레바리’라고 하겠죠. 그 말 듣기 싫어요.” 덜레바리는 이북 말로 차분치 못하고 덜렁거린다는 뜻이다. 기도하면 반드시 돈을 찾았다. 새벽이라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기도 했지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부하면서 내 소원은 ‘이화’란 이름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소원은 기도로 이어졌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해 이화동산에 들어갔다. 이화동산으로 진입한 건 내 힘이라 생각지 않았다. 기도 응답이라 믿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화여중 입학식 때 있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입학시험날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잔디밭에 한 무리의 아이와 어머니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기도했던 아이 모두 여기에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 그 무리는 장충초등학교에서 시험 보러 온 아이들과 어머니들이었다. 기도 모임 제안을 한 어머니가 잔디밭에서 대표로 기도했다. 함께 기도한 친구 모두가 합격했다.
이화는 하나님 뜻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여성교육기관이다. 자유 평화 사랑을 교훈으로 정하고 이를 삶에 녹여내도록 가르친다. 1956년 입학 당시 우리나라는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구조의 사회였다. 군인 다음으로 이런 문화에서 살아야 했던 게 학생이었다. 그 시절에도 이화는 자유를 허용했다.
이화는 학생 하나하나의 특성을 존중했고, 잠재력이 극대화되도록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다. 공부 외에도 즐겁고 잘할 수 있는 것을 발휘하도록 격려했다. 내겐 중학교 시절 이화동산에서 만나 평생 친구로 지내는 친구들이 있다. 10대 초반에 만나 70대 노인이 되기까지 변함없는 우정을 다지며 산다.
한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좋아해 판화가가 됐다. 다른 친구는 노래를 잘해 성악가가 됐다. 다른 친구는 사진을 잘 찍었다. 사진작가로 이화의 모든 행사에서 사진을 찍었다. 다른 한 친구는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나는 농구선수였다. 서로 다르고 개성이 톡톡 튀는 우리 다섯의 모습은 이화 동산에서 자란, 꿈 많은 소녀의 축소판 그 자체다.
50년대 후반, 전쟁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던 시절 한국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학교에 냉난방이 잘될 리 없던 시절이다. 겨울에 일정 온도로 내려가면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갔다. 여름에도 갑자기 날씨가 너무 더워지면 일찍 집에 갔다. 시험 기간에도 남다른 배려가 있었다. 이틀 시험 보면 하루는 쉬게 했다.
나는 교장은 물론이고 모든 교사가 우릴 존중한다는 걸 느끼며 이화동산에서 자랐다. 최초의 아동인권 옹호가 중 한 사람인 야누스 코르착은 “존중받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인격체가 된다”고 했다. 이화동산에서 최고의 교육과 배려, 존중을 받았다. 내 안에 인권 감수성이 있다면 그건 이화동산에서 훈련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9) 늘 꿈꾸던 이웃 위해 ‘변화 인자’ 되는 길 찾다
업무 환경 좋은 해외 원조단체에 입사 일 익숙해지며 매너리즘에 빠질 즈음 가치관 일치하는 기관 소개받아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두 번째)가 1986년 충북 괴산 송면의 아동과 지역 초등학교, 중학교 급식사업을 후원한 미국인 후원자 릭 라산드로(왼쪽 두 번째)씨와 해당 초등학교 앞에서 함께 한 모습.
1965년 우리 대학 졸업예정자 98%가 현모양처를 장래희망으로 꼽았다. 나는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었다. 졸업예정자는 마지막 학기에 ‘직업과 여성’이란 특강을 들었다. 이를 강연한 총장은 여성이 전문 직업인으로 일하려면 3가지에 탁월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과 지적 능력, 투철한 사명감이다. 난 모두를 갖췄다고 자신했다. 신체 건강했고, 타고나진 못했어도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지적 능력은 문제 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투철한 사명감은 내 강점이다.
1960년대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위한 고아원이 많았다. 전쟁 직후라 정부조차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 때다. 뜻있는 분들이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거나 해외 원조단체가 고아 구호사업을 펼쳤다.
나는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한 해외 원조단체에 입사했다. 기독교인이고 영어를 할 수 있어 취업이 됐다. 아이들이 보낸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고 후원자 편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업무 환경은 좋았다. 출퇴근이 정확했고 주5일 근무했다. 보수도 당시 교사나 일반 회사원이 받는 월급의 두 배를 받았다. 아이의 편지를 읽으며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를 후원자에게 전해주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2년 가까이 일하면서 편지 내용이 늘 비슷한 걸 발견했다. 한 아이가 소풍간 이야기를 쓰면 다른 아이들 편지도 모두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같은 환경에서 소풍을 간다고 해도 각자 생각이나 느낌이 모두 다를 텐데, 편지 내용은 한 사람이 쓴 것 같았다. 물론 편지를 받는 후원자는 모두 다르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지만 편지 30장을 번역하는데 반나절이면 끝나는 나날이 이어지자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즈음 같은 해외 원조기관이지만 업무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다른 조직을 소개받았다. 이 기관을 소개한 지인은 영어만 잘해선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입사 시험을 보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오전엔 미국인 디렉터에게 영어 평가를 받았다. 영어로 쓰고 말하는 시험이 끝나니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 후 다시 가니 한 아동의 이야기가 담긴 글을 줬다. 아동이 당면한 상황을 분석해 아동과 가족, 거주 지역에 변화를 주려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세우라고 했다.
정신이 번쩍 났다. 나는 이웃을 위해 ‘변화 인자’(change agent)가 되는 걸 항상 꿈꿨었다. 꼭 이곳에서 일해야겠다는 열망이 생겼다. 나는 또 한 번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미국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지부에 합격했다. 나를 채용한 디렉터는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매우 신선한 일꾼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조직은 어렵고 힘든 아이들에게 뭔가를 계속 공급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생선을 달라 하는 자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등 원조개발단체로서 철학이 분명했다. 사람을 돕는 일이 그를 무능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했다. 조직의 철학이 내 가치관과 일치함에 전율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치를 실현하는 접근법은 현장에서 터득했다. 나는 열악한 농촌과 섬 지역을 선정해 그곳 아동과 후원자를 연결했다. 특히 지역사회 주인인 주민의 역량 강화와 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의 ‘알뜰시장’(Good Will Project), 충북 괴산 송면의 아동급식사업, 충남 아산 탕정의 영유아 보육사업과 아동급식사업은 주민 힘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지금도 기억되는 사업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0) 낙후된 농촌서 조정역 맡아 지역사회 개발에 앞장
미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 참가, 비차별문화·포용·존중 등 배워…귀국 후 사업장에 적용할 수 있게 돼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왼쪽)가 1983년 5월 미국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에 참여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문화센터에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낙후된 농촌과 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개발사업 ‘살기 좋은 지역사회 만들기’는 주민의 힘 키우기 활동으로 시작된다. 당시 농촌 지역 주민은 순수했다. 특히 여성들이 그랬다. 주민 힘 키우기 사업은 ‘비형식 교육훈련’으로 진행된다. 이때 강사는 촉진자 역할을 한다.
촉진자의 진행으로 주민들은 마음을 열고 자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지역사회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된다. 그동안 몰랐던 문제가 보이면 어떻게 해야 자신과 자녀의 삶이 개선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런 고민이 주민들을 진지한 토론으로 이끌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주민 2000~4000명 규모의 면 단위 지역을 맡아 이들 삶의 변화와 발전을 끌어내는 사업조정역은 흥미롭고 보람찼다. 교육·훈련 촉진자나 사업조정역으로 일할 때 필요한 자질이 있다. 기획력 추진력 친화력은 기본이다. 겸손 인내 성실 책임성 등 지식과 능력, 기술과 성품을 적절히 갖춰야 소임을 잘 감당할 수 있다.
나는 일을 좋아한다. 일에 몰두해도 지치지 않는 강점을 타고났다. 일할 땐 아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사회로 깊이 들어가고 주민과의 만남이 진지해질 무렵, 내 역량이 열정에 미치지 못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역량 강화와 재충전 기회가 절실했다.
이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며 삶의 전환점마다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또 한 번 체험했다. 지인을 통해 미국 국무부 초청 프로그램(CIP)을 접한 것이다. CIP는 세계 각처의 사회복지사나 청소년 지도사, 지역개발 조정역 등 현장 전문가를 초청해 미국의 같은 분야 전문가와 함께 일하며 경험 지식 기술 등을 교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없이 귀한 배움과 훈련의 기회인 만큼 선정 과정은 길고 어렵다.
나는 CIP 4개월 과정에 선정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로 갔다. 이곳에서 비정부기구(NGO) 운영 전반과 조직운영 방법, 자원 개발·활용으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배웠다. 전문지식과 기술뿐 아니라 타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의 중요성도 배웠다. 4개월간의 훈련과정을 마무리하면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지역사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특히 사업장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로 지역 주민과 만날지에 대해 정리했다.
내가 배운 첫째는 ‘비차별 문화’다. 나는 그곳에서 외부인이었다. 피부색과 생김새, 능력과 언어, 사고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해해주고 인내하며 수용했다. 이런 태도는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됐다.
둘째로 ‘포용하는 자세’를 배웠다.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보여도 이들은 나를 배제하지 않았다. 무슨 일에든 나를 포함했다. 이는 자존감과 자긍심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셋째로 나를 ‘존중’해줬다. 언제든 내 의견을 물었다. 프로그램 참여 의사가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 뭘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도움이 필요한 건 없는지…. 이런 참여의 기회가 이들이 나를 동등한 동료로 본다는 걸 믿게 했다. 지식이 아닌 현장 훈련을 거쳐야만 체득할 수 있는, 이들 자질을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
4개월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나는 농촌지역에서 가장 기대되는 변화 인자인 지역 여성의 힘을 끌어내기로 다짐했다. 1983년 여성 1인 1기 사업, 알뜰시장 등의 사업을 농촌사업장에서 펼쳐 ‘여성 힘 키우기’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1) 아이 스스로 삶에 목소리 내도록 ‘아동 힘 키우기’ 돌입
아동은 보호 대상이고 이들의 행복은 부모와 지역사회에 달렸다고만 생각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두 번째)가 2002년 12월 서울 강남구 수서종합사회복지관에서 ‘제3차 동아시아·태평양지역 아동·청소년 포럼’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내 삶은 작은 자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 전쟁고아를 돕는 일로 시작했다. 긴급구호가 필요한 시기에는 자선이 불가피하다. 그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 나는 긴급구호 단계를 넘어 주민의 잠재력을 끌어내 자립을 도왔다. 낙후된 지역사회 개발과 아동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다. 주민이 힘을 키워 삶의 변화를 이끌고 아동의 행복한 삶도 보장한다는 이론에 근거했다.
미국 국무부의 전문가 교환 프로그램에서 돌아온 뒤에는 지역사회에서 작은 자로 평가받던 농촌 여성의 잠재력에 집중했다. 이들이 지역사회의 변화 인자로 활동하도록 자립심과 능력 키우기에 열정을 쏟았다. 지역사회 개발과 아동복지 사업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여성 발전으로 아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내 활동에 대전환을 준 계기가 생겼다. 1989년 세이브더칠드런 스톡홀름 연맹총회 이틀 전, 같은 곳에서 열린 아동인권 국제콘퍼런스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접한 일이다. 아동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 이때 열렸다. 아동은 보호 대상이고, 이들의 행복은 오롯이 부모와 지역사회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동이 발전하고 성숙할 권리와 이들의 참여를 간과했다. 그간 일했던 방식이 바꿔야 함을 느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를 알리고 교육·훈련하는 가운데 점진적 변화를 이뤄야 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후 196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하고 이행을 약속했다. 협약 이행을 다짐하는 세계정상회담은 1990년에 열렸다. 2002년 5월엔 사상 최초로 ‘유엔 아동특별총회’가 미국 뉴욕에서 열렸다. 협약 이행 10년의 성패를 논하는 자리였다. 유엔과 각국 정부, 비정부기구 관계자 등 3000여명이 참석했는데 이 가운데 150여명이 어린이와 청소년이었다.
아이들은 이 기간 열린 ‘아동 포럼’에서 자기 나라에서 협약이 얼마나 잘 이행되는지 등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를 냈다. 어른은 성과를 말했지만, 이들은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말했다. “어른은 아이를 위해 일한다면서, 왜 아동을 빼놓고 결정하는가”란 문제를 제기했다.
‘아이가 살기 좋은 세상,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 ‘아동이 행복한 세상 함께 만들어요!’ 유엔 아동특별총회 참석 아동이 내놓은 슬로건이다. 어른이 같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받아들였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나는 사명과 가치를 공유한 동료와 함께 배우고 일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해마다 열리는 연맹총회, 매년 두세 차례 열리는 아시아·태평양지역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해 아동인권 관련 지식과 경험 등을 배우고 공유했다. 이때 영국 대표에게 귀한 글을 받은 게 기억난다. 존재론적으로 ‘아동은 누구인가’의 답을 찾도록 도와준 글이다.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대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의 아이는 아닌 것… 그대를 거쳐 왔을 뿐 그대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비록 그대와 함께 있을지라도 그대 소유가 아닌 것을.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의 생각마저 줄 순 없다. 아이는 그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존재론적으로 아동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동인권 옹호의 시작이다. 나는 이를 국제 사회에서 배웠다. 이후 사업장으로 돌아와 아이가 자기 삶에 목소리를 내도록 ‘아동 힘 키우기’에 돌입했다. 협약 채택 이후, ‘아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이와 어른이 함께 노력하는 방향으로 들어선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2) 남편·두 아들 응원에… 온 세계 다니며 아동 인권 공부
병치레 없던 남편, 우울증에 파킨슨 증세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가 1995년 모리셔스에서 열린 유엔아동권리협약 훈련 워크숍 중 스웨덴 참가자와 환담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이후 유엔과 비정부기구(NGO)는 협약 이행 촉구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 일에 내가 속한 단체가 선두주자였다. 세이브더칠드런은 1995년 협약을 알리고 훈련할 수 있는 도구인 ‘유엔아동권리협약 훈련 키트’를 개발했다. 아동 인권과 그 역사, 협약을 현장에서 훈련하고 대중에 전파하는 자료였다.
그해 세이브더칠드런 연맹총회는 아프리카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개최됐다. 닷새 만에 마무리되던 평소와 달리 이례적으로 10박 11일의 긴 일정으로 열렸다. 연맹이 개발한 협약훈련키트 교육을 위해 총회 후 아동 인권 교육훈련 워크숍을 마련해서다. 당시 나는 모리셔스 총회와 워크숍 참석에 큰 기대를 걸었다.
나는 아동 인권을 위해 온 세계를 다니며 일했다. 가족의 도움이 컸다. 남편과 두 아들은 잦은 해외 일정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버지는 맞벌이하는 맏딸을 안쓰러워하며 가사도우미를 지원했다. 온 가족이 모두 건강했다. 손에 가진 건 많지 않지만, 늘 감사했고 넉넉하게 여겼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란 막연한 불안감마저 들었다.
그러다 잔병치레 없던 남편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즐겨 하던 테니스나 수영에 열을 내지 않았고 불면증이 심해졌다. 단추를 끼는 일도 힘들어했다. 보폭이 좁아지더니 말도 줄어들었다. 유머와 위트가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남편은 여러 병원을 찾아 많은 검사를 받았다. 증상이 있어도 결과는 정상으로 나오던 차였다. 그중 두 개의 서로 다른 진단을 받았다. 하나는 우울증이었다. 입원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 했다. 또 하나는 파킨슨이이었다. 증상은 있지만 뇌는 깨끗하니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남편이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나도 잠들기 힘들어졌다. 어느 날엔 차로 출근 중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잠들었다. 최악의 졸음운전이었다. 뒤차의 배려로 살았다. 온 가족과 교회가 걱정하며 기도했다. 교회 어른들은 해외여행으로 한번 환경을 바꿔보라고 권했다.
그즈음 모리셔스 연맹총회가 다가왔다. 내게 총회보다 절실했던 건 아동인권 교육 훈련이 열리는 워크숍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해 총회는 예년처럼 6월 초가 아닌 6월 말로 잡혔다. 마침 모리셔스는 휴양지고 기후가 좋았다. 나는 미국 유학 중인 둘째 아들에게 연락해 방학하는 대로 귀국할 수 있는지 묻고 도움을 청했다.
그해 6월 나는 남편과 둘째와 함께 싱가포르를 거쳐 모리셔스로 10박 11일의 여행을 떠났다.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남편과 아들은 해변을 산책하고 운동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회의와 워크숍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때 협약훈련키트를 활용한 아동인권촉진기술을 전문가에게 배운 뒤 수료증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알고 접한 사람으로서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는 자격도 갖춘 셈이다.
모리셔스 총회 이후 세이브더칠드런 연맹은 세계 곳곳에서 활용하도록 교육 자료를 각 지역(Region) 본부에 전달했다. 한국지부는 연맹의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속해 있는데 이곳 본부는 태국 방콕에 있다. 나는 스웨덴 영국 미국 호주 등 지역 대표와 함께 한국 대표로 이사로 활동했다. 국내에 협약을 전파하는 일에 우리 재정과 인적 자원으론 한계가 있어 이들 해외 이사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이들과 함께 아동학대예방협회, 아동권리학회 등과 워크숍을 열며 10여년간 협약을 알리고 가르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3) 경제 발전 이룬 한국, ‘세이브더칠드런 한국’ 세워
전후 미국 AID 원조 받아 구호사업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세 번째)가 미얀마 호수촌에 학령 전 아동보육시설을 세운 뒤 마을 주민과 함께했다.
6·25전쟁으로 우리나라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각국 정부와 민간단체가 나서 큰 도움을 줬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전쟁 직후인 1953년 아동복리회(SCF)란 이름으로 구호사업을 했다. 70년대엔 한국지역사회복리회 이름으로 미국 AID 원조를 받아 농촌 지역개발사업을 펼쳤다.
나는 이 현장에서 일하며 사업신청서와 중간보고서, 최종 결과보고서 및 모니터링과 평가서를 쓰는 훈련을 받았다. 세이브더칠드런 미국은 미국 AID 차관을 받아 적지 않은 개발도상국을 도왔다. 이 중 한국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 나라였다. 늘 ‘자조 정신이 강하고 근면·성실한 국민’이란 평가를 받았다.
80년대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자 세이브더칠드런 미국의 한국지부가 아닌, ‘세이브더칠드런 한국’을 세우라는 제안을 받았다. 사업은 자신 있었지만, 재정 자립이 어려웠다. 이후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한국은 독립된 세이브더칠드런을 세웠고 점차 당당한 회원국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외국의 원조로 진행된 국내 개발사업 현장에서 일한 사람이다. 1997년, 우리가 그간 쌓은 지역사회개발 경험과 지식, 기술로 개도국을 도울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한국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를 둔 ‘한·월 청소년’ 직업훈련센터 설립 및 운영 사업부터 시작했다. 이어 중국 내몽고 빈곤 지역 초등학교에 교재 및 교구, 놀이기구를 지원하는 사업도 펼쳤다.
이들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 내몽고 빈민가에 영유아 보육시설을 세우자는 사업신청서를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냈다. 이즈음 미국서 유학하고 싱가포르에서 활동 중인 마롱 베이징대 교수를 만난 건 참 기이한 일이다. 마롱 교수는 사회인류학자다. 내몽고 주민에 대한 애정으로 10년간 그곳 주민과 함께 살며 연구했다. 그의 지원으로 중국 내몽고 자치정부와 연결됐고, 그의 조언을 받으며 사업을 진행했다. 애초 우리는 1층 건물을 세우려 했다. 내몽고 자치정부는 3층 건물을 원했다. 우리 계획보다 크고 영구적인 건물을 원했다. 결국 3층 건물이 세워졌다. 현지 부군수는 개원식에 참석해 이렇게 축사했다. “여기 모인 우리는 100년 후엔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건물은 그대로 남아 계속 아이들의 행복한 배움터가 돼 줄 것입니다.”
3년 만에 이 사업을 종료하고 2002년 코이카에 새로운 사업제안서를 냈다. 미얀마 오지에 아동 인권에 기반을 둔 학령 전 아동보육센터를 세우고 이를 운영하는 사업이다. 세이브더칠드런 미국과 미얀마 호수촌에 학령 전 아동보육센터를 매년 2개 동씩 총 8동을 세우기로 했다.
중국 내몽고 사업에선 주민 자력으로 사업을 진행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정부 주도 사업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업은 잘 마무리됐으나 사업 진행 과정에서 주민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동은 정부 보호 아래 교육받으면 그저 만족이었다.
미얀마 사업은 달랐다. 지역 주민이 사업의 주인이 됐고, 정부 관계자는 행정 지원을 했다. 자력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어린이집 한 동이 세워지면 주민 운영위원회와 급식을 담당하는 부모회가 결성됐다. 훈련된 어린이집 교사가 세워지면, 온 마을에 잔치가 벌어진다. 이들은 기쁜 일이 생기면 전통음악을 연주하며 다 함께 춤을 췄다. 자녀가 안전하게 교육받을 수 있는 어린이집이 있어 기쁘고 감사해 여는 축제였다. 나는 8개 호수촌에서 열리는 축제에 매번 참여했고 그때마다 같이 춤췄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4) 유엔 “한국, 아동인권 인식 낮다” 권고문에…
정부의 책무와 역할 중요함 깨닫고 아동 권리 증진과 교육·훈련 위해 다양한 민관협력 프로그램 만들어
아동 대표들이 2003년 11월 17일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아동권리주간 선포식’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 내의 아동인권과 유엔아동권리협약 인식 증진을 위해 국내외로 다니며 애썼지만, 변화는 쉽지 않았다. 협약 비준국은 비준 2년 후 첫 번째 협약 이행보고서를 쓴다. 이후 5년마다 국가가 이행보고서를 쓰면, 비정부기구(NGO)는 이에 대한 민간 보고서를 쓴다. 국제 사회는 정부보고서와 민간보고서를 기반으로 각 정부의 협약 이행을 심의한 뒤 권고문을 보낸다.
우리 정부는 당시 두 번에 걸쳐 국가 보고서를 제출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가 보낸 권고문은 나를 비롯한 아동인권옹호가에게 큰 실망과 좌절을 줬다. 권고문에는 한국 사회의 아동인권 인식이 매우 낮고, 협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내용이 실렸다. 협약의 적극적인 홍보와 아동인권 교육·훈련사업 개발 및 시행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협약 채택일인 11월 20일을 앞두고 세이브더칠드런은 관계 기관과 협력 체제를 만들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월드비전의 대표와 법조계 인사 등으로 아동권리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위원장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가 맡았다. 나는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봤다. 위원회는 2003년 11월 17일 ‘아동권리주간 선포식’을 열었다. 매년 협약 채택일이 있는 한 주를 ‘아동권리주간’으로 지키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영부인 고 이희호 여사와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이 참석했다.
권리의 주체는 아동이다. 아동기는 그 발달 단계와 특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아동의 권리를 보호하려면 의무이행자의 책무성 이행이 선행돼야 한다. 의무이행자는 나를 비롯한 우리 모두다. 이 가운데 정부는 첫 번째 의무이행자다. 아동인권을 보장함에 있어 정부의 책무성과 역할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는 의미로, 협약에 명시된 내용이다.
아동권리주간 선포식을 시작으로 아동권리 인식 증진과 교육·훈련을 위해 다양한 민관협력 사업을 만들었다. 세이브더칠드런의 경우 2005년부터 3년간 보건복지부 공모사업에 참여해 어린이날 행사를 아동인권에 기반한 행사로 바꿨다. 행사 주인공인 아동이 지루한 날이 아닌, 이들이 주인 되는 즐거운 날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2009년부터 3년간 보건복지부 지원으로 ‘아동권리협약과 함께하는 아동·청소년의 권리’란 교재를 개발했다. 일반 대중뿐 아니라 아동 청소년 보육교사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등을 위한 맞춤형 교재를 만들었다.
법무부와도 협력 사업을 펼쳤다. 2005년 7월 교정공무원과 청소년보호관을 위한 인권 감수성 향상 교육훈련이 필요하다며 법무부 사무관이 우리 기관을 찾았다. 이 분야에서 40여년 일했지만, 공직자가 NGO를 찾아 인권교육훈련을 요청한 건 처음이었다. 구금시설이나 보호시설에 인권친화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선 먼저 직원의 인권감수성이 향상돼야 하는데, 이런 교육을 진행해줄 기관을 찾는다고 했다. 또 한 번의 호기를 만났음을 직감했다.
나는 2005년 하반기부터 2009년 말까지 워크숍 방식의 교육 프로그램을 법무부 공직자들에게 진행하며 이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했다. 지금도 기이하게 여기는 건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적절한 사람과 연결돼 이들과 변화를 모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 만난 보건복지부 아동안전권리과장과 법무부 인권국 사무관을 지금도 잊지 않는 이유다. 기적적인 만남을 주관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아동인권 발전을 이끈 전능한 분의 손길을 지금도 느끼며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김인숙 (15) ‘가장 작은 자를 위한 더 나은 세상 만들기’ 선언
20여년 함께한 동료 이양희 교수와 국내 최초로 아동 인권 센터 세워… 사명감과 열정으로 무에서 유 창조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뒷줄 왼쪽 네 번째)가 2018년 12월 22일 서울 중구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본인의 책 ‘이렇게 살아도 행복해’ 출판기념회에서 센터 관계자들과 함께했다.
2009년 12월 30일 나는 오랫동안 일해 온 일터를 떠났다. 수많은 고비가 있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 일이 천직이자 성직이라 생각했기에 힘든 줄 몰랐다. 정든 일터를 떠나 못다 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새로운 일터로 주님의 인도를 받는 데 2년이 걸렸다.
아동인권 운동을 하며 20여년 함께한 동료가 있다. 2003년부터 10년 넘게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양희 교수다. 위원장 임기를 마치고 스위스에서 귀국한 그와 뜻을 모아 국제아동인권센터를 세웠다. 국내 최초의 아동인권옹호기관이다. ‘가장 작은 자를 위한 더 나은 세상 만들기’를 비전으로,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을 통한 아동인권 보호 존중 충족’을 사명으로 선언했다.
설립 기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사명감과 열정으로 시작한 비정부기구(NGO)라도 재정이 불안정하면 보통 3년 내 문을 닫는다. 센터는 작은 조직이지만 전문성 있는 젊은 인재들의 헌신과 기지로 위기를 잘 넘기며 창립 9년 차를 맞았다.
센터는 사명 실천을 위해 정부와 연구기관 등 여러 분야와 협력한다. 아동인권옹호전문가 과정을 상설해 100시간 과정의 아동인권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워크숍 형태로 진행한다.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이들이 여기서 함께 배우고 훈련하며 과정을 수료한다. 수료생은 일터로 돌아가 아동인권옹호가로 활동한다.
2013년 센터는 사명을 더 넓게 실천할 기회를 얻었다. 서울시는 어린이·청소년 인권 조례를 만들고 조례 이행을 위해 아동인권증진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거기엔 어린이·청소년 인권교육 사업이 포함돼 있었다. 시의 위탁 공모 시기를 기다려 사업 신청을 냈다. 치열한 경쟁이 예측돼 하나님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했고, 결국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2013년 하반기에 시작해 지난해 말로 6년 차 사업을 마무리했다. 올해부터 2년간 사업 연장 승인도 받았다.
서울시와 함께하는 사업은 아동인권 교육훈련 강사를 배출해 이들을 초·중등학교와 아동복지시설 등 청소년 시설에 파견하고 그곳 교사와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아동인권 교육훈련을 진행하는 것이다. 강사들은 정기적으로 센터에 모여 워크숍과 간담회를 갖고 강의 피드백도 받는다.
이 사업의 백미는 아동인권 컨설팅사업이다. 컨설팅팀은 아동·청소년시설과 복지시설을 방문해 아동인권 친화적 환경으로 운영되도록 자문한다. 시설 종사자가 의무적으로 받는 아동인권 교육훈련의 성과를 가늠해볼 좋은 기회다. 종사자들과 심층 인터뷰를 하며 교육·훈련 후 어떻게 변했는지, 향후 프로그램에 뭘 추가하면 좋을지를 묻는다. 이때 얻은 정보로 교수법이나 교육 참여자의 준비도를 분석해 교육 내용에 변화를 준다. 서울시 인권교육 훈련이 지속가능한 사업이 되도록 연구한다.
전기작가 존 폴락은 “한 사람이 그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센터도 사명 실천을 위해 여러 단체 및 전문가와 연대했다. 보건복지부를 시작으로 법무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행정안전부 등 정부 부처와 협력했다. 서울시와 화성시, 인천 서구 등 지자체와도 함께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굿네이버스 등 유관기관과도 연대했다. 무엇보다 아동과 연대했다. 센터는 아동을 위해, 아동과 함께 일하는 기관이므로.
***[역경의 열매] 김인숙 (16·끝) 내 여생의 과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말씀 붙들고 어둡고 긴 터널 지나 아동인권 교육·훈련에 여생 바칠 것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오른쪽 세 번째)가 지난해 11월 20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열린 ‘유엔 아동권리협약 30주년 기념 포럼’에서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역경이 두려웠다. 환난이나 고난 같은 단어는 피하고 싶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예수님 십자가 고통의 진정한 의미도 알지 못했다.
원인 모를 질병에 걸렸던 남편이 3년 만에 확진을 받았다. 파킨슨병이었다. 남편은 13년간 이 무서운 병과 고투했다. 온 가족이 함께 아팠다. 200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 남편이 떠났다. 얼마 뒤엔 30여년 헌신한 일터를 떠났다. 내 것으로 알고 누려온 걸 연달아 잃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날 때면 목사인 맏아들 내외와 기도원을 찾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원 본당에 걸린 현수막의 성경 구절이 내게 확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나는 이 말씀을 굳게 잡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만 하면 된다고 믿으니 터널 끝 희미한 출구가 보였다. 내 역경의 열매는 우리 가정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정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는 어머니요, 기도하는 시어머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여생의 과제다.
역경을 거친 뒤 얻은 결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을 주셨기에 이 땅의 무엇을 잃어도 우리에겐 하나님, 곧 모든 것이 남는다’는 것이다. 너무나 황망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기도할 수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역경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련다. 아직 갈 길이 남았기에 다음의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 나는 그간 다양한 사람에게 아동인권을 교육하고 훈련하며 이 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교육받으면 그만이지 왜 훈련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우리 대부분은 학교나 교회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 많은 양의 지식이 머리에 축적됐지만, 훈련은 없다. 그래서인지 적지 않은 가정이 순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가정 학교 교회가 모두 제 기능을 하면 아동인권 교육·훈련은 따로 필요 없다. 아동학대의 83%가 친부모에 의해 발생한다. 학교에서는 경쟁과 차별, 따돌림 등이 발생해 민감한 청소년기 아동을 죽음으로 내몬다.
여러 직종의 수많은 이들에게 인권 교육·훈련을 했지만, 강의 요청을 받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교회다. 그러다 지난해 겨울, 한 목회자의 전화를 받았다. 한 교단의 지방회 교육부 총무라고 했다. 교회학교 교사 연수를 한다며 아동인권 강의를 요청했다. 최근 내가 쓴 책 ‘이렇게 살아도 행복해’(국민북스)를 읽었다며, 색다른 강의를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고 2시간 수업을 즐겁게 준비했지만, 강의는 무산됐다. 지방회장인 목회자가 “교회에서 무슨 인권 교육이냐. 안 된다”고 말했단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너무 죄송해하는 그분을 위로했다.
사람들은 인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법학자로 ‘불편해도 괜찮아’란 책을 쓴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인권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마 7:12)이라 정의한다. 우리가 평생 지키려고 애쓰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다. 인간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 인간 사랑은 귀로만 들어선 어렵고 삶의 현장에서 훈련해야 한다. 노력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매일 구해야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계명이다. 인권감수성과 영성은 별개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별개가 아닌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