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쓰며 보낸 세월 총체적 오미자 맛
정운종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타계한 선배 한분이 남긴 글에서 ‘ 인생은 오미자(五味子) 맛’이라 한 구절이 생각난다. 쓰고, 달고, 시고, 떫고, 짜고---.오미자 다섯 가지 맛처럼 인생길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지난날도 총체적 오미자 맛, 돌이켜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나는 솔직히 말해 신문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1965년 7월 신아일보 조사부 수습기자로 들어가 그때 내가 한일은 그 날 그날 국내외 신문 잡지에 실린 주요 기사를 오려 스크랩북에 더덕더덕 붙이는 작업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실로 호출돼 멋모르고 받아쓴 글을 정리하거나 사장 지시로 사설을 직접 쓴 것이 계기가 돼 어느 날 갑자기 논설위원 발령을 받으니 사람팔자 알다가도 모를 일, 1970년대 당시만 해도 신문사 논설위원 실은 국장급 정도는 돼야 가는 곳이었다. 그러니 평 기자인 내가 논설위원 발령을 받은 것은 파격중의 파격이었다. 내가 처음 써본 사설은 가정부도 가족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글, 격려 전화까지 받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식모’ 의 인권을 강조한 내용이 독자의 심금을 울린 모양이다. 그때부터 사회 문제 사설은 거의 내가 썼다. 하루 전에 출고하니 신문 쇄 출 시간 단축에도 도움이 됐다.
평 기자 논설위원발령 파격 중의 파격
밤새워 쓴 사설 검열로 난도질당하기도
갑자기 논설위원이 되고 보니 심심찮게 외부에 기고도 하고 방송국에 출연할 기회도 잦아 그런대로 품위유지도 가능했다. 1970년대 중엽 KBS가 광복 30주년 특집으로 6개월 동안 매일 방송했던 ‘세월 30년’ (대담 : 이혜복 KBS 해설위원) 출연은 신아일보 논설위원의 자긍 심 제고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각 언론사 논객들과의 교분도 나에게 용기를 배가 시켰다. 정부 각 부처 장관들이 마련한 이런 저런 모임에다 가끔 산업시찰, 전방시찰, 해외 출장의 기회도 주어졌다. 그럴 때마다 시제와 무관한 사설 몇 편은 미리 써 놓고 다녀왔다.
사설을 쓰며 겪어야 했던 씁쓸한 맛도 열거하라면 한이 없다. 지금은 모두들 타계 하셨지만 “사설(社說)은 나 사(私)자 사설(私說)이 아니다”라던 어느 대선배의 자조(自嘲) 섞인 충고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엄혹했던 시절 밤새워 쓴 사설이 다음날 상황 돌변으로 취소되거나 다시 쓰고 애써 쓴 글이 언론 검열로 난도질당했을 때는 정말 죽을 맛 이었다. 아침에 사설을 쓰다 마감 시간에 쫓겨 당황한 때도 비일 비재했다.
80년대 초 경향신문 사설은 유난히 길었다. 신문 한 면을 거의 통사설로 채울 때도 많았다. 5공 정권의 창출에서부터 통치이념 확립에 이르기 까지 이념지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다. 나도 맡겨진 일에 충실하다보니 밤새워 사설쓰기는 항다반사였다. 대학생아르바이트은행부장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아르바이트 관련 사설은 거의 도맡아 썼다. 관리국 부장으로 사설 쓸 기회가 주어진 것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아르바이트은행은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매일 아르바이트 알선 통계와 씨름해야 했고 사무실 분위기는 각 대학 취업지도 담당관들의 내방으로 항상 붐볐다. 아르바이트 직종 개발을 위한 지방출장도 잦았지만 성과는 별로였다. 하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정년’으로 일터를 떠날 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고비마다 고마운 이웃 친지들의 도움으로 백수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달콤한 오미자 맛이 아닐 수 없다.
<대한언론 2022년 9월호>